1936년 일본 도쿄. 8월에 열리는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할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한 남자가 분통을 터트리며 축구화를 집어던지고 있다. 이 남자는 조선과 일본 전역을 뒤져도 첫 손에 꼽히던 천재 김영근. 막 발표된 베를린올림픽 일본 축구대표팀 최종명단에서 제외된 데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합숙 훈련 숙소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다부진 체격의 한 사내가 쓸쓸한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영근의 출전 포기로 1936년 올림픽 축구에 유일하게 남은 단 한 명의 조선인, 바로 ‘한국의 주세페 메아짜’라 해도 과언이 아닌 한국 축구의 대부 김용식이었다.
일본 침공
김용식이 축구선수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경신학교(현재의 경신고) 3학년이던 1928년 5월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면서부터다. 이 때 김용식에 뼈아픈 패배를 안긴 주역이 바로 올림픽 엔트리 탈락에 분통을 터트리고 귀국한 김영근이었다. 이후는 김용식의 독무대였다. 바로 다음 달 열린 서울5개중등부대항전에서 처음으로 우승컵을 집어들었고, 조선체육회 주최 제9회 전조선축구대회에 이어 해를 넘겨 아사히신문 주최 제3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도 성인팀인 보성전문학교를 꺾고 정상에 올라 세간을 놀라게 했다.
더 이상 국내에 적수가 없게 된 김용식의 경신은 1929년 9월 일본최강의 와세다대와 자웅을 겨루게 된다. 하지만 와세다 측은 “젖비린내 나는 중등부 팀을 와세다의 대진표에 넣다니 어불성설 아니냐”며 경신을 얕잡아보면서 경기를 거부했다. 이에 경신 측은 재학생 뿐 아니라 졸업생까지 포함시켰다고 와세다를 달랜 뒤 실제 경기에서는 원래대로 재학생만 출전시켰다. 그리고 고등학생만 출전한 이 경기에서 경신은 일본 최강의 성인팀이라는 와세다를 4-3으로 제압하는 ‘일본 침공’ 수준의 파란을 일으켰고 ‘대학 팀 꺾은 경신’ ‘성인 팀 꺾은 경신’ 등 승전보를 알리는 제호가 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찍혀 식민지의 설움에 한 숨만 내쉬던 경성시민들을 들끓게 했다.
11월에 열린 마이니치신문 주최 전국대회조선대표선발전에서도 챔피언이 돼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경신은 1930년 일본 원정에 올라 본격적인 ‘일본 침공’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제강점기 최후의 전국적 항일 운동이 터지면서 일본 원정은 무산된다. 1930년 3월까지 3.1 운동 이래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이다.
하남자들이 일으킨 광주학생항일운동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중학 3학년이던 후쿠다 슈조, 스메요시 가쓰오 등 ‘일본산 하남자’들이 광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광주일고) 3학년 박기옥과 이광춘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가 달려와 항의했음에도 후쿠다가 “조센징 주제에”라며 적반하장격으로 나오자 박준채의 ‘응징의 한 방’이 터졌고 이는 광주중과 광주고보의 패싸움으로 크게 번졌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끼리끼리 아니랄까 봐 패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하남자들을 편들면서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했고 이를 접한 광주고보 학생들이 11월 3일 광주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광주학생운동의 불꽃이 타올랐다. 학생들이 피어올린 불꽃에 신간회를 비롯한 어른들이 가세하면서 11월 12일 광주고보뿐 아니라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까지 참여한 대규모의 시위로 퍼져나갔다.
이어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학생전위동맹이 경성에서의 시위를 계획하여 12월 2일 밤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살포했고, 12월 5일 경성제이고보(지금의 경복고)의 휴교를 시작으로 경성제일고보(지금의 경기고), 중동, 보성, 중앙, 휘문, 배재, 이화, 동덕, 협성실업 그리고 김용식의 모교인 경신까지 동맹 휴교가 잇따랐다. 12월 9일부터 13일까지 경신, 보성, 중앙, 휘문, 협성실업학교 학생 12000명이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1400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는 학생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겨울방학을 조기에 실시해 학교를 폐쇄하고 통제를 강화했으나 이듬해 1월 15일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약소민족해방 만세 등의 구호와 함께 수천명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시위는 3월까지 경성에 국한되지 않고 개성, 부산, 진주, 청주, 공주, 대전, 홍성, 예산, 조치원, 부여, 전주, 정읍, 고창, 이리, 평양, 신의주, 정주, 선천, 영변, 함흥, 원산, 회령, 청진, 대구, 춘천, 해주, 사리원 등 전국 각지로 전개되었다.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한 학교는 194개, 인원은 5만 4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자료니만큼 이는 축소되었고 실제로는 갑절은 족히 됐을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불합리를 타개하려 했던 광주학생운동의 정신은 30년 뒤 4.19 혁명과 1987년 6월 항쟁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일장기와 태극기를 동시에 ‘축구의 손기정’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김용식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퇴학당해 ‘일본 침공’의 꿈은 이루지 못했고 군산에 있는 친구 채금석의 고향집에 숨어 지내며 일경의 무분별한 검거를 피해갔다. 일제의 탄압이 잠잠해지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김용식은 1934년에서야 조선축구단의 일원으로 도쿄 원정을 떠나게 되었고 4년 전 이루지 못한 ‘일본 침공’을 마침내 달성한다. 일본 최강으로 꼽히던 게이오대와 도쿄농대를 무려 5-2, 6-0으로 대파한 것이다.
기세를 몰아 1935년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축구대표팀 선발전을 겸한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조선 대표로 출전한 김용식의 경성축구단은 결승에서 도쿄문리대를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해 전 일본을 놀라게 했다. 10월 메이지신궁경기대회의 우승 역시 경성축구단의 몫이었다. 그러나 베를린올림픽 대표팀 1차 후보 명단에 포함된 경성축구단 멤버는 김용식과 고교시절의 맞수 김영근 뿐이었고 그 김영근마저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자 결국 베를린에 가는 조선 축구인은 김용식 단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차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베를린에 도착해서도 김용식은 훈련과 연습 게임에 배제되기 일쑤였다. 결국 분개한 김용식은 대표팀 코치에게 “경성 가는 차표나 끊어 달라”고 거칠게 항의했고 실력이든 리더십이든 팀 내 에이스 자리에 걸맞는 김용식을 출전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일본 코칭스태프도 첫 경기인 강호 스웨덴 전에 그를 선발 출장시킨다.
세계의 벽은 높았는지 전반에만 상대 간판 공격수 에리크 페르손에 멀티골을 얻어맞으며 0-2로 밀렸다. 그러나 후반 들어 김용식의 왼쪽 측면이 살아나면서 경기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고, 경기 종료 5분을 남기고 왼쪽 측면을 완전히 허문 김용식의 크로스를 받은 오른쪽 날개 마쓰나가 아키라가 극적인 역전 결승골을 터트리면서 3-2의 기적같은 역전승을 일궈낸다. 경기가 끝난 뒤 그를 차별하던 코치와 선수들마저 김용식을 얼싸안고 “잘 싸웠다”고 사과할 정도였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으나 조선 축구인으로서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하여 첫 승의 주역이 되는 ‘축구의 손기정’과 다름없는 개가였다.
유일한 올림픽 출전이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였던 것에 한이 맺혔던 김용식은 요즘 시대에도 축구 선수로 환갑일 우리 나이로 서른 아홉이던 1948년 런던올림픽에 마침내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플레잉코치 자격으로 출전하게 된다. 그리고 12년 전 베를린에서 스웨덴을 꺾는 기적을 연출한 것처럼 광복 3년에 이제야 정부가 들어설까 말까 할 정도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세계 최빈국 수준의 국가로서, 북중미의 강자 멕시코를 상대로 정국진이 멀티골을 터트리는 대활약 속에 5-3으로 완승을 거두는 기적을 재현한다.
8강 상대는 12년 전 김용식의 기적의 제물이 되었던 스웨덴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때 역시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를 8강에서 만나 0-8로 참패한 것처럼 스웨덴은 런던올림픽 우승을 거머쥐는 최강팀이었고 군나르 노르달-군나르 그렌-닐스 리드홀름으로 이어지는 오렌지 3총사 이전 AC 밀란의 상징과도 같던 그레놀리 3총사가 버티고 있는 팀을 어쩌지는 못했다. 그래도 김용식은 일장기와 태극기를 각각 가슴에 달고 올림픽에서 각각 승리를 거둔 유일무이한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됐다. 베를린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고 런던올림픽에서는 태극기를 품에 안고 감독으로 마라톤대표팀을 지휘한 손기정과 역시나 닮은 모양새다.
한국 축구 최초의 슈퍼스타
흔히 세계 축구 최초의 슈퍼스타로 마티아스 신델라나 메아짜를 꼽는 것처럼 한국 축구사 최초에는 언제나 김용식이 자리한다. 채금석과 마흔살까지 현역 선수로 뛴다는 ‘도원결의’를 한 이래 마흔셋이 되는 1952년까지 선수 생활을 한 김용식이 1950년 4월 홍콩전에서 기록한 39세 275일이라는 A매치 최고령 출전과 최고령 득점 기록은 반 세기를 넘어 한 세기로 이어지도록 그의 몫이다.
지도자로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간 그는 추후에 자세히 다룰 한국 축구 최초의 월드컵 출전인 1954년 스위스월드컵을 지휘했으며, 아직까지도 마지막 아시안컵 우승으로 남아있는 1960년 아시안컵에서도 득점왕 조윤옥을 이끌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멤버도, 손흥민 김민재 등 발롱도르 후보를 배출한 현재의 ‘황금 세대’도 64년이 지나도록 이루지 못한 바로 그 아시아 챔피언의 타이틀이다.
제자 최정민에 이어 중앙정보부의 산물인 양지축구단의 감독까지 이어받았던 김용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축구단인 할렐루야 창단 감독으로 또 한 번 역사에 획을 그었다. 할렐루야 창단을 시작으로 유공, 대우, 포항제철, 국민은행 등이 연이어 창단하면서 K리그의 뿌리가 움튼다. 2006년 축구협회는 축구협회 명예의전당을 최초로 헌액하면서 ‘퍼스트 세븐’의 첫 머리에 그의 이름을 새긴다.
해방 이후 일본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릴 일이 딱히 없었을 그가 환갑이 넘은 1971년 일본 후지TV에 등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스포츠 프로그램이 아닌 ‘세계의 비밀’이라는 일종의 불가사의를 다루는 프로그램이었다. 베를린올림픽에서 이탈리아에 참패한 뒤 한국 축구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은 김용식은 ‘1만일 개인기 훈련’을 시작했고 일흔살이 되는 1979년까지 이어갔다. 환갑이 넘은 노인의 멈추지 않는 축구 훈련이 일본 카메라에는 ‘불가사의’로 비춰졌을 것이다.
거진 100년 전에 유럽축구와의 수준차를 깨닫고 공부하고 훈련하며 이를 좁히려 시도했던 선각자의 노력은 수십억의 예산을 날리고도 내분과 불신 속에 파행으로 치닫는 대한축구협회의 현재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