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 17일 KBS 1TV ‘스포츠뉴스’는 전날 자정 직전 끝난 이란과의 1996년 아랍에미리트아시안컵 8강전 결과를 보도하며 침울하게 문을 열었다. 한국 축구사에서 처음으로 ‘참사’ ‘쇼크’라는 표제가 만들어진 날.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맞붙었던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나 불과 2년 전 미국월드컵에서 상대했던 위르겐 클린스만같이 월드클래스 공격수도 아닌 당시 한국인에게는 생소했던 이란 스트라이커 알리 다에이에게 마치 전편의 에우제비오를 만난 북한처럼 4골이나 얻어맞으며 2-6의 참패를 당한 날. 그리고 이 때의 패배 원인을 찾는 중 불거진 ‘파벌 논란’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재 진행형의 사안이다.
무너진 박종환 신화
1996년 아시안컵을 지휘한 박종환 감독은 한국 축구사에서 처음으로 ‘참사’의 비난을 받기 전 ‘신화’를 최초로 이룩한 찬사를 받은 장본인이었다. 스타플레이어 출신이 아닌 그는 1983년 멕시코U-20월드컵에서 지옥훈련과 벌떼축구로 상징되는 자신의 축구관을 청소년 축구 국가대표팀에 이식시켜, 해외언론으로부터 지금은 한국 축구의 상징이 된 수식어 ‘붉은 악마(Red Furies)’라는 극찬을 처음으로 이끌어내면서 거스 히딩크가 역사를 세우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지도자였다.
고지대인 멕시코시티에서 펼치는 경기를 대비하여 마스크를 쓰고 산소가 희박한 환경을 만들어 훈련할 정도로 치밀하고 치열했던 박종환호는 조별예선 첫 경기인 스코틀랜드전에서 0-2로 완패당해 “그럼 그렇지” 정도의 비아냥을 들으면서 미약하게 시작했으나, 개최국 멕시코를 상대로 선제골을 내주고도 신연호의 극장골로 첫 승리를 따냈고 월드컵 예선 때마다 형들의 발목을 잡던 호주도 꺾으면서 스코틀랜드에 이어 조 2위로 사상 첫 8강을 달성한다. 박종환호의 특징은 소수의 특정 스타플레이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활동량을 바탕으로 누구든지 주역이 될 수 있는 경기 스타일이었다. 실제로 조별예선에서 터트린 4골은 모두 그 주인공이 달랐다.
우루과이와의 준결승에서는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한국에 첫 승리를 안겨다 준 신연호가 낭중지추처럼 솟아올라 최초의 멀티골로 마침내 4강 신화를 이뤄냈다. 그리고 말이 필요 없는 그 때까지 한국이 차마 눈이 부셔 넘볼 수조차 없었던 그 브라질과의 준결승에서도 김종부가 선제골을 터트리며 세계를 놀라게 했고, 끝내 종료 직전 역전골을 얻어맞아 결승 진출이라는 말도 안되는 대업은 이루지 못했지만 ‘졌잘싸’의 표본을 보인 경기로 기억된다. 브라질은 이 대회 우승팀이었고 이 때 브라질의 에이스는 11년 뒤 세계를 제패하는 바로 그 베베토였다. 3-4위전에서도 이기근이 역시나 선제골을 올렸고 연장까지 또 한 번 가는 투혼 속에 아쉽게 패하면서 신화는 2002년 한일월드컵의 히딩크호처럼 4위로 마무리된다.
4강 신화로 국민영웅 반열에 오른 박종환 감독이었으나, 그 특유의 스파르타식 훈련과 체벌을 포함한 강압적 지도방식은 바로 이듬해부터 탈이 나기 시작했다. 만 18-19세에 불과했던 U-20월드컵 멤버들에게는 이러한 스타일이 잘 먹혔으나 성인이 된 1984년 LA올림픽 축구대표팀 선수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최순호 변병주 이태호 등 축구대표팀의 주축들은 태릉선수촌을 무단이탈하면서 감독에 반기를 들었고, 거칠 것 없던 박종환 신화에도 제동이 걸렸다.
1989년 K리그 일화 천마의 창단 감독으로 프로에 데뷔한 박종환은 1993-95 K리그 사상 첫 3연패라는 대업을 달성하면서 '박종환 신화'를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증명할 것은 단 하나, 월드컵뿐이었다. 때마침 1994년 월드컵의 선전 이후 외국인 감독으로 첫 지휘봉을 잡은 아나톨리 비쇼베츠가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뜬금없이 탈락하면서 입지가 불안정한 상태였고, 국민적 인기를 등에 업고 돌아온 박종환은 아시안컵을 제패하고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첫 16강을 이뤄 GOAT의 역사를 장식하는 청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술한 2-6 참사 이후 다시는 박종환이 하마평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클럽팀인 성남 일화도 박종환 없이 다시 한 번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며 그의 그림자를 온전히 지워냈다. 1980년대의 국민적 영웅에서 1990년대의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감독으로 그 평가가 완벽히 뒤틀린 박종환의 무너진 신화에는 ‘열하나회’라는 키워드가 자리하고 있다. 잠깐! ‘하나회’라고...?
서울의 봄 군홧발로 짓밟은 하나회
1980년대 대한민국 정치 헤게모니를 한 손에 움켜쥐고 좌지우지한 군부 사조직 하나회는 1951년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 모임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의 ‘오인회’에서 비롯되었다. 이듬해 백운택이 가세하고 박병하가 유급하면서 ‘오성회’가 되었고,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면서 박정희의 눈에 든 뒤 수장 격이 되는 손영길을 포함하여 ‘칠성회’로 개편되었다. 1963년 2월 18일 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군 복귀와 민정이양을 발표할 때 열심히 반대 시위를 하면서 알랑방귀를 뀐 이들은 노정기 박갑용의 합류로 ‘텐 멤버’가 된 뒤 10인으로 ‘일심회’를 창설했고 ‘하나회’로 개칭한다.
보안이 생명이던 하나회의 존재가 불거진 것은 1973년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었다. 윤필용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은 군사정변 이래 박정희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는데, 양지축구단을 만들고 사라진 김형욱의 뒤를 이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술자리에서 “대통령께서 노쇠했으므로 그만 물러나시고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아부를 떨다 징역 15년에 처해 진다. 그리고 윤필용의 후원을 받던 하나회의 존재가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수사로 드러나는데 “각하는 하나”를 부르짖으며 박정희의 비호를 받던 하나회가 숙청 당할 리는 만무했고, 윤필용의 수하였던 손영길이 징역 12년을 받는 선으로 종결되었다. 강창성 사령관은 좌천됐고 손영길에 밀려있던 전두환이 하나회의 수장으로 등극하는 계기가 된다.
윤필용 사건으로 제거되지 않은 하나회는 박정희 친위대로 어느덧 5.16 군부에 버금갈 만큼 군 내에서 세력을 키워갔고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암살로 마침내 수면 위로 머리를 쳐들었다. 이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국군보안사령관이자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대통령인 양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하나회 수장 전두환을 한직인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보직 이동시키는 것을 필두로 하나회 인사들을 군 핵심부에서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임명이 그 시작점이었다.
그러나 은밀하지만 지나치게 천천히 물갈이하려던 하나회 숙청 계획은 하나회 측의 재빠른 역공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암살 이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정승화 참모총장이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한 것을 빌미로 정승화 총장 체포의 구실을 만들었고, 정승화 체포 수사의 재가를 최규하 대통령이 거절하자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는 초법적 행각을 벌였다. 특전사 수도권 4개 여단 중 3개 여단장이 전두환의 심복이었고 수도경비사령부의 주요 부대들인 30경비단과 33경비단, 헌병단은 물론 대통령 경호실마저 하나회가 장악하고 있었으니, 정병주 육군특수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산발적인 저항으로는 군사반란을 어찌할 수 없었다.
차후 연재분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룰 12.12 군사반란의 신군부 이후 거침없이 권세를 누리던 하나회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하나회의 ‘넘버 투’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되려 분열되기 시작했다. 평생을 2인자로 살아오다 대통령 직선제로 최고 권력자가 된 노태우에게 국민적 분노를 받는 쿠데타로 권력을 쥔 전임자는 눈엣가시였다. 이어 최초로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김영삼 대통령은 정승화 총장의 실패를 거울삼듯, 비선 조직을 통해 철저히 비밀리에 하나회 숙청 계획을 짰고 취임 11일만에 기습적으로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전격 보직해임 처리하면서 마침내 하나회 숙청에 돌입했다.
하루 만에 하나회 출신 7개의 별이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김영삼 대통령 취임 3달 만에 18명의 하나회 장군이 옷을 벗었고 떨어진 별의 합은 40개에 이르렀다. ‘무신정변’을 언급하며 쿠데타 위협까지 한 군부의 반발을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고 가볍게 제압한 김영삼 정부는 4차에 걸친 숙청으로 중장 이상급 하나회 전원의 모가지를 날렸고 영관급까지 숙군의 손길을 뻗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을 선고받고 구속되면서 하나회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1979년 12월에 시작되어 1995년 12월에 정확히 16년 만에 초라하게 막을 내렸다.
하나회는 숙청되었으나 열하나회는...
이름 자체가 하나회를 떠오르게 하는 축구 국가대표팀 내 사조직 열하나회가 언론에 부각 되기 시작한 건 역시나 박종환 체제였던 1995년 코리아컵국제축구대회였다. 비쇼베츠를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한정시키고 여론의 지지를 듬뿍 받으며 A대표팀 감독으로 컴백한 박종환호는 안방에서 치른 이 대회를 새 사령탑의 축포로 삼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별예선 전승으로 축구팬들의 관심을 고조시킨 뒤 정작 준결승에서 아프리카의 결코 강호라 할 수 없는 잠비아에 2-3으로 허무하게 패하며 탈락했다. 그리고 박종환 감독 본인이 패배의 원인으로 잠비아전 전날 음주한 뒤 태업성 플레이를 펼쳤다며 간판선수 홍명보 등 열하나회 선수들을 언급하면서 논란이 커졌고 박종환 역시 불과 1달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는다.
선장 없이 표류하던 축구대표팀은 아시안컵을 앞두고 다시금 박종환을 재신임하면서 ‘어게인 1983’을 꿈꿨으나 조별예선부터 쿠웨이트에 0-2로 완패한 가운데 겨우 조 3위로 운 좋게 8강에 올랐다. 그리고 이란과의 8강 전반은 2-1로 앞서갔으나, 후반은 전술한 대로 다에이에 4골을 얻어맞으며 ‘이란 쇼크’로 끔찍한 엔딩을 맞는다. 다에이의 원맨쇼가 펼쳐지는 동안 홍명보를 필두로 한 한국 수비라인은 이상할 정도로 무기력한 움직임을 보였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것이 ‘박종환호 태업설’이 탄생한 계기다.
당시 참사를 보도한 경향신문의 유형렬 특파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복무 당시 사조직으로 만든 ‘하나회’의 이름을 본따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열하나회’를 조직했다”며 “아시안컵 축구대회를 통해 대표팀의 단합을 해치는 ‘보이지 않는 세력’으로 작용, 대책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참사의 배경에 사조직 열하나회가 있음을 강조했다. 엘리트 의식으로 무장된 회원이 가입이 거부된 비회원을 철저히 따돌리는 등 서로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 속에 팀워크를 크게 해친다는 것.
또 열하나회의 핵심인 홍명보를 콕 집어 “홍명보의 경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지도하는 감독을 원한다’며 스파르타식의 박종환 감독에게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중연 당시 KBS 축구해설위원 역시 “홍명보가 선수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것 같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홍명보와 하나회에 대한 논란은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전 참패에서도 승부조작설로 이어졌고 히딩크가 대표팀의 핵심이자 주장인 홍명보를 대표팀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충격적인 극약처방을 내린 다음에야 잠잠해졌다.
2002년 월드컵의 4강 신화로 아름답게 마무리되며 잊힌 홍명보와 열하나회의 이름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의 참패 때였다. 브라질월드컵 최종엔트리 23명 중 무려 14명을 자신이 이끌었던 2012년 런던올림픽 동메달 멤버로 채워 넣으면서 ‘의리 축구’ ‘인맥 축구’로 조롱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고려대 후배이자 병역문제로 시끄러웠을 때도 올림픽 와일드카드로 발탁해 당당히 군복무를 해결하게 해 줬던 박주영이 대표적이었다. 결과가 좋았다면 이 또한 무마되었을 터였으나 1년 가까이 소속팀에서 완전히 벤치를 달군 박주영은 아무 것도 못했고 히딩크가 한국 축구를 스텝업 시킨 이래 지금까지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유일한 월드컵으로 남았다.
귀국길에 ‘엿 세례’를 받고 그 와중에 재신임됐다 개인사까지 털리면서 스스로 사임하는 흑역사를 만든 홍명보 감독은 정확히 10년 후 다시금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 사이 울산 현대 감독으로 K리그 2연패를 기록하면서 얼마간 명예회복에 성공한 직후였다. 홍 감독의 고려대 후배이자 열하나회 멤버였던 이임생 대한축구협회 기술총괄이사가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만큼이나 기습적으로 홍 감독의 대표팀 감독 선임을 발표하면서 가뜩이나 정몽규 축구협회장의 클린스만 감독 독단적 선임 논란부터 들끓었던 여론이 폭발한 것이다.
하석주 축구협회 부회장은 열하나회에 대해 “베스트11에서 따온 이름일 뿐”이라며 전두환의 하나회와 선을 긋고 축구인들의 봉사단체라고 해명한 바 있다. 하지만 축구협회의 밀실행정 속에 ‘고려대’ ‘열하나회’ 더 나아가 ‘축피아’ 등의 키워드들이 불신과 갈등을 키우고 있고 안방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에서 붉은악마가 우리 대표팀에 야유를 보내고 간판 선수가 응원석 앞에서 아쉬움을 표하는 촌극이 펼쳐지고 있다. 손흥민을 필두로 한 황금세대의 ‘한국축구의 봄’이 군홧발 아닌 축구홧발에 밟혀 사그라들까 하는 우려가 29년 째 변함 없이 재현되는 씁쓸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