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의 간판 수비수 버질 반 다이크를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니다. 1966년 7월 19일, 잉글랜드월드컵 이탈리아와 북한의 조별예선 4조 최종전이 열린 영국 미들즈브러의 에어섬파크. 경기를 현지 중계하던 영국 공영방송 BBC의 캐스터가 눈이 동그래져 계속 ‘박두이크’를 부르짖었다. 전편에서 다룬 2002년 한일월드컵 이전 아시아 국가가 월드컵에서 거둔 가장 기록적인 성취의 주인공 바로 박두익이었다.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의 원조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은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3개 대륙을 통틀어 단 한 국가만이 월드컵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이 높았는데 그 적자로 간택된 이가 난생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는 북한이었다. 영국 현지에서 축구보다 정치적 이슈로 더욱 관심을 받았던 미지의 국가 북한은 이탈리아와 소련, 칠레 등 강호들과 한 조에 엮여 12년 전 대한민국처럼 처녀출전국의 경험을 쌓는 데 만족할 것처럼 보였다.
조별예선 첫 경기 역대 최고의 수문장 레프 야신의 소련과 만나 일방적인 피지컬 열세를 드러내며 0-3으로 대패한 북한은 지난 월드컵에서 개최국 열풍을 일으키며 당당히 3위에 오른 남미의 강자 칠레와 2차전을 치른다. 경기 종료 직전까지 0-1로 끌려가던 북한은 후반 43분 프리킥 기회에서 상대 수비수가 헤딩으로 걷어낸 볼을 간판 미드필더 박승진이 오른발 중거리슛으로 연결하며 좀처럼 열리지 않던 칠레의 골문을 열어젖힌다. 이는 아시아 국가가 월드컵에서 기록한 첫 번째 골이었고 첫 번째 승점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영국 해군병사들이 피치로 난입해 북한 선수들을 응원할 정도로 인상적인 경기였다.
하지만 북한의 첫 월드컵 나들이는 여기가 마지막일 듯 했다. 최종전 상대가 다름 아닌 4년 뒤 열릴 멕시코월드컵에서 아직까지도 역사상 최강의 국가대표팀으로 꼽히는 1970 브라질과 결승에서 맞붙는 아주리 군단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아직도 이탈리아 역대 베스트11을 꼽으면 무리없이 들어갈 지안니 리베라, 산드로 마졸라, 지아친토 파케티 등이 버티고 있는 우승후보였다.
그러나 변수가 터졌다. 전반 34분 이탈리아 캡틴이자 볼로냐 레전드인 핵심 미드필더 자코모 불가렐리가 칠레전 동점골의 주인공 박승진에 태클을 걸었다 떨어지는 박승진에 되려 깔리는 통에 부상으로 실려 나간 것이다. 선수교체 규정이 없던 마지막 월드컵이었던 터라 이탈리아는 남은 60분간을 꼼짝없이 10명이 싸워야 했다.
그리고 불가렐리의 왕성한 활동량에 꽁꽁 묶여있던 바로 그 박두익에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전반 42분 하정원이 공중볼 싸움에서 승리하며 따낸 헤더가 이탈리아 페널티박스 안으로 흐르자 쇄도하던 박두익이 오른발 땅볼슛을 때리며 아시아 국가 사상 첫 선제골을 터트린다. 다급해진 이탈리아가 맹공을 퍼부었으나 북한은 명례현 감독의 유명한 ‘사다리 전법’으로 끈질기게 버텼고, 마침내 아시아 국가 사상 첫 월드컵 승리, 첫 무실점,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국가 중 첫 8강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다. 반면 이탈리아는 썩은 토마토와 달걀 세례를 받으며 비참하게 귀국했고 감독과 주요 선수들은 근신과 퇴출이라는 징계를 받게 된다.
8강에 오른 북한의 상승세는 거침없어 펠레의 브라질을 완파하고 준준결승에 당도한 포르투갈을 상대로도 칠레전의 영웅 박승진의 선제골을 시작으로 전반에만 3골을 퍼부으며 세계를 경악시켰다. 하지만 포르투갈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전 이베리아 반도 사상 최고의 스타 에우제비오가 버티고 있었고, 고립주의를 택하느라 국제경험이 전무해 경기 운영에 있어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낸 북한을 상대로 4골을 터트리는 원맨쇼로 5-3의 대역전극이 펼쳐진다. 영국 다큐멘터리 ‘천리마축구단’으로까지 제작된 북한의 8강 신화는 2002년 월드컵 히딩크호의 신화가 이를 경신할 때까지 유럽 축구팬들에 가장 강력하게 각인된 아시아 축구의 상징이었다.
빨갱이 잡으러 만들어진 최초의 드림팀
전술했듯 1966년 월드컵 지역예선은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3개 대륙에 단 한 장의 진출권만 주어진 터라 이에 항의하여 아프리카 가맹국들이 죄다 기권했고 북한, 호주와 맞붙어 승리만 하면 대한민국 역시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룰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당시 북한은 1963년 이래 A매치에서 29승1패를 기록한 당대 아시아 최강의 팀이었으며, 엔트리 중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축구종가 출신이었던 호주를 상대로도 6-1, 3-1의 압도적 전력차를 과시했다. ‘반공’이 핵심 이념이었던 당시 정세에서 북한에 완패하는 꼴을 보여줄 수 없었던 정부는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FIFA에 벌금 5000달러를 물면서까지 예선 참가를 포기한다.
잉글랜드월드컵 8강 신화는 한국 축구계뿐 아니라 정치계에도 큰 충격이었다. 남북 체제 경쟁이 절정이던 당시 국력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축구에서 밀리는 모양새는 민심에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월드컵 이듬해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지휘로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정의 부훈에서 따온 ‘양지축구단’이 결성된다. 페렌츠 푸스카스, 산도르 코츠시스, 요제프 보직 등을 모두 포진시켜 1950년대 세계 최강의 클럽팀으로 군림한 헝가리군의 부다페스트 혼베드를 빼닮은 모양새였다. “빨갱이 때려잡기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축구팀의 탄생이었다.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의 맨 위에 자리해 있는 ‘황금다리’ 최정민을 감독으로 국가대표팀 23명 중 11명이 양지축구단에 포함될 정도로 ‘드림팀’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 황희찬, 이재성 등이 죄다 한 팀에 소속되어 있는 셈이다. 당시 면면을 따지자면 한국축구 역대 최고의 중앙공격수로 첫 손에 꼽히는 이회택을 필두로 역대 최고의 센터백 라인인 김호-김정남, 차범근 이전 최고 윙어 박이천, 이운재 이전 최고 수문장이었던 이세연 등이 모조리 한 팀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전폭적인 지지로 무려 105일 간 유럽 전지훈련을 떠나는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양지팀은 동남아시아 위주의 국제대회인 1967년 메르데카컵에서 당시 버마와 공동우승을 차지했고, 아시아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1969년 아시아챔피언클럽토너먼트에서 준우승을 거뒀다. 이제 북한을 제압하고 1970년 멕시코월드컵 본선에 나서기 위한 아시아지역예선 1라운드가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펼쳐진다.
한국과 일본, 호주가 풀리그로 2경기씩 맞붙어 조 1위만 2라운드에 진출하는 당시 예선 방식에서 한국은 호주와의 최종전을 앞두고 1승1무1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1969년 10월 20일, 호주와 1-1로 팽팽하던 후반 이회택이 얻어낸 천금의 페널티킥 기회를 1960년대 국내 최고의 미드필더로 꼽히던 임국찬이 그만 놓치면서 북한을 만나보기도 전에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임국찬은 이 때의 실축으로 선수생활을 그만두고까지 비난에 시달리다 이민을 떠날 정도였다. 하지만 양지축구단은 이듬해 열릴 방콕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국제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 양지축구단의 ‘아버지’인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경질된 것이다.
엔드게임: 허망한 권력의 최후
중령으로 5.16군사정변에 참여하여 36세의 젊은 나이에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이 된 김형욱은 1963년 7월 청와대에 이은 국가 ‘넘버 투’ 권력기관인 중앙정부부장에 취임하여 1969년 버림받을 때까지 6년 넘게 자리를 지킨 역대 최장수 중정부장이었다. 하지만 토사구팽당한 뒤 1971년 국회의원으로 정치적 생명을 연명했으나, 그마저도 이듬해 유신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1973년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독재자의 오른팔에서 망명자의 신세가 되어 잊히는 듯 했던 김형욱은 불과 3년 만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바로 ‘코리아게이트’였다.
1976년 10월 24일,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무려 10면에 걸쳐 “남한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로 로비스트 박동선과 중앙정보부가 미국 상하원 및 유관 공직자들에 매년 50만-100만 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포함한 불법 로비를 펼쳤다”고 단독 기사로 대서특필했다. 여태껏 아니 지금까지도 미국 주요 언론에서 한국 관련 기사에 저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김형욱은 뉴욕타임스와의 단독 인터뷰를 시작으로 1977년 6월 22일, 미국 하원의 이른바 ‘프레이저 위원회’에 출석하여 “프레지던트 팍”에 대한 거침없는 폭로를 이어갔다. 불법 로비뿐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다음달에도 프레이저 위원회에 2차 출석하여 “박정희씨”라고 호칭하며 대통령을 계속 자극했다. 그리고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을 집필하면서 박정희 정권과의 거래를 통하여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1979년 10월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으로부터 회고록을 넘기는 대가로 거액의 원고료를 약속받고 프랑스 파리로 향한 김형욱은 10월 7일 감쪽같이 행방불명되고 만다. 이는 10월 16일 조선일보 단독 기사로 국내에도 보도되었으나 부마항쟁이 터지고 불과 열흘만에 대통령이 암살되는 초유의 사태가 연이어 전개되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권력의 최정점에서 뼛가루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김형욱의 행방불명에 대하여 2005년 국가정보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1979년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지시로 권총 살해당했다고 발표했다. 반면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이라 주장한 이는 주간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김형욱을 산 채로 머리부터 양계장 해머 밀에 집어넣고 갈아 죽였다는 충격적인 폭로로 이를 반박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양지축구단은 김형욱 경질 이후 불과 5개월도 안 되어 해체됐고 한국 축구가 월드컵 무대에 돌아오기까지는 이후 16년이나 더 걸렸다. 그리고 양지축구단의 목표대로 북한의 1966년 업적을 넘어서기까지는 무려 32년이 더 소요되었다. 무엇보다 2002년 히딩크호의 4강 신화는 허망한 독재 권력의 덧 없는 지원 따위가 아니라 광화문에 모두 빨간 옷을 입고 목이 터져라 외쳤던 광장의 축구팬들의 열정과 간절함이 만들어낸 뜨거운 결과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