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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와 노무현의 역대급 반전 드라마

Take Two: 꿈은 이루어진다

by 간지훈
영화 '노무현입니다'


“鄭夢準, 노무현을 버렸다”


제16대 대통령선거가 예정된 2002년 12월 19일, 조선일보 1면은 이 제호를 대문짝만하게 박았다. 이 사설은 “‘노무현, 정몽준 후보 단일화’는 단연 코미디 대상”이라며 “정몽준씨마저 ‘노 후보는 곤란하다’고 판단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사설을 1면으로 한 선거 당일 조선일보가 거리 가판대마다 떡하니 자리 잡은 뒤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 로그온했다)이라는 상징적인 제호로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 보도를 내놓았다. 대한민국 헌정사 유례없는 역대급 역전 드라마의 탄생을 알리는 승전보였다.


오대영과 바보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16대 대통령선거의 유력한 주자로 떠오른 계기는 누가 뭐래도 2002년 한일월드컵의 거대한 성공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누가 뭐래도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한국에 ‘오대영’의 참패를 안겨준 그 남자 거스 히딩크가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월드컵 도중 한국축구의 영웅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는 쇼크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허정무 감독 역시 2000년 레바논아시안컵에서 결승 진출에 실패하는 사이, 월드컵 공동개최국인 일본은 아스널의 수장 아르센 벵거의 추천을 받은 프랑스 출신 필립 트루시에를 감독 자리에 올려 1999년 U-20월드컵 준우승, 2000년 시드니올림픽 8강, 2000년 아시안컵 우승,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 준우승 등 새역사를 창조하고 있었다.


한편 히딩크 감독 본인에게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의 성패는 커다란 의미였는데, 프랑스월드컵에서 요한 크루이프 시절 이후 최강의 전력이라는 오렌지 군단을 이끌고도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며 이후 레알 마드리드, 레알 베티스 등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클럽에서도 연이어 경질당해 55세의 노장을 눈 앞에 둔 감독으로서 한국 축구대표팀에서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경우 감독 커리어는 곧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드컵이 채 1년도 남지 않은 상황, 안방인 달구벌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조별예선 1차전 프랑스전은 한국 축구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물론 나쁜 쪽으로 말이다. 비록 상대가 ‘마에스토로’ 지네딘 지단을 필두로 프랑스월드컵과 유로2000을 연이어 제패한 세계 챔피언이었다 할 지라도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드러내며 ‘오대영’ 참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승에서 프랑스와 맞붙은 공동개최국 일본은 이른바 ‘졌잘싸’를 선보이며 0-1로 아쉽게 패하자 여론은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고 히딩크는 경질 위기에 처했다. 정몽준 협회장이 이용수 기술위원장에 “우리 둘 중 하나는 한강에 뛰어내려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뼈있는 농담을 던져야 할 정도였다.


부림사건으로 인권변호사로서 주목 받기 시작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5공청문회에서 요샛말로 ‘사이다 발언’을 터트리며 일약 청문회 스타가 된다. 하지만 민주당 소속으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했다 낙선했고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부산시장, 이듬해 제15대 국회의원선거 서울 종로구에서 연이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다 1998년 이명박 의원이 선거법 위반 논란으로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열린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되어 6년 만에 여의도로 귀환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치 일번지’라는 종로구 의원이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난데없이 종로가 아닌 부산 북구·강서구 을에 등판하면서 소위 난리가 난다. 결국 부산에서만 3번째 실패를 맛 본 노무현 후보는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다”며 한국 민주주의의 심각한 병폐인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도전을 이어갈 것을 천명했고, 언론은 그에게 ‘바보 노무현’이라는 새로운 닉네임을 선사한다.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


유럽원정을 떠나 파벨 네드베드가 이끄는 체코에마저 ‘오대영’으로 깨지면서 비난을 넘어 조롱을 듣게 된 히딩크호는 2002년 새해 벽두 참가한 골드컵에서도 단 1승도 하지 못하고 만만해 보이는 상대들인 미국, 코스타리카, 캐나다에 연이어 패하면서 조롱을 넘어 절망적인 반응에 처하게 된다.


반전의 서막은 월드컵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아 조별예선 1차전 폴란드전이 예정되어 있던 부산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이었다. 이날 한국은 안정환의 아름다운 칩샷을 비롯해 시종일관 상대를 압도하면서 4-1의 대승을 수확한다. 한국이 유럽팀을 상대로 이처럼 압도적인 경기력을 드러낸 것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비로소 히딩크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다음 평가전 상대는 한일월드컵 4강 후보로 꼽히는 잉글랜드. 발롱도르 수상자 마이클 오언이 이끄는 축구종가를 상대로 1-1 무승부. 그리고 딱 1년 전 ‘오대영’ 조롱의 발단이었던 프랑스와의 리턴매치. 세계 챔피언을 상대로 박지성과 설기현이 연이어 골을 터트리면서 2-3의 석패. 절망에서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다시 희망을 넘어 확신에 가까울 정도로 여론은 급선회했고 역시나 쇼맨십에 강한 히딩크는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며 1면 머릿 기사 제목을 던져준다.


애국가 시청률 아니 지지율


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은 최초로 국민 참여 경선을 도입하면서 총선을 앞두고 여론몰이에 나섰다.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는 단연 이인제 후보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3위에 올랐고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도 자신의 정치 기반인 충청권을 필두로 40년 만에 민주당계 최다의석이라는 쾌거를 이뤄냈기에 당내 지지 세력이 탄탄했다. 무엇보다 상대인 이회창 후보에 대적할만 한 전국적인 인지도를 갖춘 유일한 후보라는 평이 우세했다.


반면 노무현 후보의 대선 출마 선언 직후인 2001년 12월의 지지율은 애국가 시청률 수준인 1.6%에 머물렀다. 노무현 역시 “다른 후보가 우리 민주당의 대권 후보가 되는 것은 상관없다”는 입장이었고 다만 “이인제의 대선 출마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권 경선에 나섰다”고 이인제 저격론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권노갑 상임고문의 불법 정치자금 이슈가 터지면서 이인제가 타격을 입었고 ‘노사모’ 열풍을 타고 노무현의 가파른 맹추격이 시작된다. 첫 경선지역인 제주에서 이인제 2위, 노무현 3위(1위 한화갑)로 시작한 민주당 경선은 노무현의 홈 그라운드인 영남권 첫 경선지 울산에서 노무현 선두로 역전된다. 그리고 민주당의 정치적 텃밭인 광주 경선을 앞두고 처음으로 노무현 VS 이회창 양자 대결에서 노무현이 승리한다는 문화일보의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되면서 영남 출신인 노무현이 광주에서 1위를 차지하는 대이변의 밑거름이 연출된다.


안방인 광주에서의 패배 이후 3자 대결 구도의 한 축이었던 한화갑 후보가 사퇴하면서 양자 구도로 좁혀졌고, 충청권에서의 압도적인 지지로 이인제가 다시금 멀찍이 앞서갔으나 강원에서 노무현은 이인제가 꺼내든 ‘빨갱이 색깔론’까지 극복했으며 경남, 전북, 대구까지 연승으로 ‘노풍’을 이어간다.


그리고 열 번째 경선지인 인천을 앞두고 이인제 측의 색깔론은 극에 달했으며, 이회창 후보 측과 보수언론의 지원사격도 불을 뿜었다. 이에 노무현은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라는 명연설로 색깔론을 정면돌파 하면서 결국 인천까지 승리, 경선 승리의 8부 능선을 넘는다. 결국 경북과 전남까지 노무현이 2-3배 차이로 압승을 거두자 이인제는 백기를 들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바보’는 ‘포스트 김대중’이 되었고, 누구나 승리를 의심치 않았던 대권주자는 탈당하면서 ‘피닉제’라는 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축구의 화양연화


개최국 어드밴티지라는 말이 우습게 유로2000 4강팀 포르투갈, 동유럽의 다크호스 폴란드, 반년 전 골드컵에서 히딩크호를 제압한 미국과 한 조를 이뤄 예년의 월드컵과 다름없는 조 편성을 받아들면서 여전히 16강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대장정의 막이 오른다. 월드컵에 참여한 지 반 세기가 되도록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나라. 16강에 앞서 우선 1승이 조별예선 첫 경기 폴란드전의 현실적인 목표가 되었다.


첫 경기의 긴장감 탓인가 상대적으로 밀리던 경기는 주전 왼쪽 윙백 이영표의 부상으로 대신 선발 출장한 이을용의 정교한 왼발 크로스를 원톱 황선홍이 감각적인 왼발 발리슛으로 연결하면서 한국 쪽으로 크게 기운다. 그러나 4년 전 월드컵 첫 경기에서도 하석주가 멕시코를 상대로 축구 대표팀 사상 첫 월드컵 선제골을 터트리고도 내리 3골을 내주며 패배의 아픔을 맛봤기에 방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상철-김남일이 압도적인 활동량으로 중원싸움을 제압하면서 승부의 추를 유지했고 유상철의 쐐기골이 터지면서 월드컵 참가 48년 만의 첫 승이 마침내 이뤄졌다.


하지만 다음 목표인 16강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조 최강으로 꼽히던 포르투갈이 미국에 덜미를 잡히면서 계산은 좀 더 복잡해졌다. 조별예선 2차전 미국전을 이기면 사실상 16강 확정이기에 더욱 중요한 승부였다. 전반 초반 황선홍이 머리에 부상을 입으면서도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그러나 폴란드전 승리의 시발점이었던 이을용의 왼발은 페널티킥 성공까지는 이뤄내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선제골을 얻어맞았다. 이을용의 속죄의 프리킥이 부상 당한 황선홍 대신 교체 출전한 안정환의 이마가 아닌 옆통수에 맞으면서 승부는 원점이 된다.


조 최강으로 평가받은 포르투갈과의 최종전. 미국과 나란히 1승1무이기에 이 경기를 진다면 16강 탈락이 유력한 만큼 최소 무승부 이상이 요구되는 경기였다. 첫 경기에서 미국에 일격을 맞은 포르투갈은 2차전에서 폴란드를 4-0으로 대파하면서 우승후보의 위용을 되찾았다. 그러나 전반 초반 주앙 핀투가 박지성에 프로레슬링이나 다름 없는 태클을 저지르고 퇴장당했고, 후반 초반에도 베투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면서 11-9의 싸움이 된다. 동시간대 이미 탈락이 확정된 폴란드가 미국에 3-0으로 앞서가는 이변이 연출되면서, 루이스 피구를 비롯한 포르투갈 스타플레이어들은 온갖 바디랭귀지와 애교를 섞어 0-0으로 비기고 사이좋게 나란히 16강에 오르자고 설득하였으나 영어를 잘 못 알아듣은 탓인지 박지성의 왼발은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두 번째 승리와 조별예선 1위 최초 16강이라는 역사를 창조한다.


하지만 전편에서 언급하였듯, 우승후보 이탈리아가 의외의 부진을 겪으면서 조 1위에 오르고도 16강 상대는 이탈리아로 결정된다. 정작 조 2위인 미국의 상대는 해볼만 한 멕시코였다. 한국축구 월드컵 사상 최고의 기념비적인 경기인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초반은 조별예선 미국전의 판박이였다. 시작하자마자 얻어낸 페널티킥을 이번에는 안정환이 실축했고, 크리스티안 비에리에 선제골을 얻어맞고 끌려다녔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과 이탈리아의 수비라인 수준 차이인데, 알레산드로 네스타와 파비오 칸나바로가 부상과 경고누적으로 빠졌음에도 크리스티안 파누치와 마르크 율리아노가 그 자리를 메웠고 ‘라스트 댄스’에 나선 파올로 말디니의 라인 컨트롤과 잔루이지 부폰의 선방 능력은 한국이 월드컵에서 이제껏 대결했던 그 어떤 포백보다 탄탄했다.


스리백의 핵심인 김태영-홍명보까지 빼고 황선홍-이천수-차두리 등 공격자원이 연이어 투입되었으나 끝내 열리지 않는 카데나치오. 조별예선 2승과 최초의 16강 진출이라는 업적이 충분히 훌륭하나 이 축제를 조금만 더 즐길 수 없는가라는 아쉬움과 탄식이 교차하던 후반 43분 미국전에서 황선홍이 만들어 준 완벽한 기회를 계속해서 날리던 설기현이 마침내 극적인 동점골로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고, 승부차기까지 가면 부폰의 벽을 넘기 힘들 것이라는 불안감이 피어오르던 연장 후반 종료 3분 전, 안정환의 우리 모두가 다 아는 그 골든골이 터지면서 포르투갈전이 끝나고 던진 히딩크의 “I’m still hungry”는 어록으로 등극한다.


로테이션 없이 117분의 혈투를 치러 지칠대로 지친 히딩크호의 베스트11은 스페인을 상대로도 처절하게 싸워 이운재의 선방으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유럽과 남미를 제외하면 어느 대륙의 어느 국가도 이루지 못한 4강이라는 ‘화양연화’를 달성한다. 승부차기까지 120분을 뛰고도 이틀만 쉬고 준결승전에 나서는 살인일정 속에 끝내 요코하마국제종합경기장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장엄한 광경은 목도 하지 못하였으나, 우리 생애 다시 오지 못할 2002년의 여름은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하이라이트이자 반전 드라마가 되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월드컵에서의 거대한 성공으로 한강물 입수 농담에서 유력대권주자가 된 정몽준 협회장은 국민통합21을 창당하고 대권레이스에 나선다. 때마침 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 열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최규선게이트 등으로 새천년민주당이 참패하고 ‘내부의 적’ 이인제 측의 공세에 시달리던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협회장과의 단일화를 받아들이면서 노무현-정몽준 VS 이회창의 대권구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16대 대통령선거의 개시를 불과 몇 시간도 남겨두지 않은 12월 18일 밤 정몽준 협회장의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가 발표되면서 선거판세는 급박하게 변한다.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협회장의 자택 앞에서 기다리는 장면이 생중계되었고, 정몽준은 우래옥 평양냉면에 과음한 탓인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서 한나라당은 쾌재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회창 후보는 제15대 대선에서 대척점에 섰던 김대중-김종필의 연합과 자녀의 병역 문제, IMF로 바닥까지 추락한 대통령의 지지도, 이인제 후보의 탈당 등 온갖 악재 속에서도 불과 1.5%P 차이로 패배했고 선거를 코 앞에 둔 11월 8일 여론조사기관 TNS 조사에서도 37.2%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다. 이 때 노무현 후보는 21.4%, 정몽준 협회장은 22.2%의 지지였는데 지지 철회로 정몽준의 지지율 중 절반만 가져와도 압승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고 정몽준의 문전박대가 무당파의 노무현 지지를 불러일으켰으며, 지지 철회가 너무 임박하게 이뤄지는 통에 정몽준 지지자 중 옮겨간 세력의 크기 역시 예상만큼 크지 않았다. 또한 가디언의 ‘인터넷 대통령’ 표현처럼 KBS 출구조사에 따르면 오전까지는 이회창 후보의 근소한 리드였으나, 휴대폰과 인터넷을 통한 젊은층의 투표 독려가 이어지면서 오후 1시를 기점으로 노무현의 역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결국 2.33%P의 근소한 차이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의 명패에는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다. ‘바보’라 불리면서 지역주의 타파를 부르짖던 이의 꿈은 정치입문 14년 만에 민주당계 정당에서 최초의 영남 출신 대통령이라는 새역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유시민 전 장관과의 대화에서 “노무현의 시대가 오겠어요?”라고 회의적으로 묻던 선문답은 “100% 오지요”라는 유시민 장관의 대답처럼, 드라마처럼 현실이 됐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근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것 같아요”라는 답변도 예언처럼 현실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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