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Six: 사라진 시간
“선배, 정말 KBS도 갖고 있지 않은 겁니까? 구라 치는 거 아니죠?”
한국 축구 100년의 최대 이벤트인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지상파 3사 스포츠 PD 들은 입소문으로만 내려온 바로 그 ‘전설의 필름’을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일월드컵 개막 직전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원맨쇼의 상징인 바로 ‘그 장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제보는 모두 허탕이었고 끝내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그 전설의 경기는 바로 1976년 박스컵 첫 경기 말레이시아전에서 마치 만화인냥, 영화처럼 만들어진 차범근의 ‘6분’ 혹은 ‘7분 해트트릭’이었다.
영구집권의 야망 담긴 박스컵
일단 요즘 세대에는 이름도 생소한 박스컵부터 살펴보자. 한국에서 열리는 축구대회에 왠 상자(Box)? 여기서 박스는 상자가 아니라 Park’s다. 이제 느낌이 오는가.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프레지던트 박은 당연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고. 국왕이나 왕실을 이름으로 단 컵 대회는 유럽을 비롯해 여럿 상존하지만 대통령을, 심지어 대통령의 성을 떡하니 대회 이름으로 내건 대회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의 임기는 기껏해야 8년이 최대일 텐데 고작 8년 하려고 언제 바뀔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성을 딴 국제대회를 만들겠는가. 결국 이 대회의 창설은 8년이 아닌 수십 년을 해 먹겠다는 독재자의 검은 속내가 담겨있고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평가를 결정적으로 엇갈리게 하는 10월 유신으로 직결된다.
10월 유신의 시작은 3선 개헌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을 본 따 재선만 가능했던 대통령제에서 3선을 밀어붙이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새마을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또 한 번 헌법에 손을 댔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분명하게 강조하면서 어마어마한 선거자금과 행정력을 투입했고 온갖 협잡과 부정, 금품선거를 펼쳐댔다. 이에 경쟁자인 김대중 신민당 후보는 박 대통령을 “박정희씨”라 칭하며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집권의 총통제를 한다는 데 대한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유명한 1971년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95만 표의 아슬아슬한 승리 이후 벌써 4년 후가 다급해진 박정희는 선거 바로 다음 날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씨가 뭐를 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안 나?... 다음엔 김대중이 될지도 몰라... 그러니 내 좀 특수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중앙일보 ‘김종필 증언록’)
게다가 국제정세는 박정희의 폭주를 자극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5년 안에 주한미군 철수를 통보했고 이듬해에는 중국과 ‘핑퐁 외교’를 시작했다. 닉슨 정부가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켜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직후였다. 선거에서의 ‘사실상 패배’와 레드 콤플렉스까지 겹치면서 결국 박 대통령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항의 ‘특별선언’을 발표하였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헌법을 일부 효력 정지하며, 정지된 헌법의 기능을 비상국무회의가 대신하는 내용이었다.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구성하고 여기에서의 간접선거로 제8대 대통령에 다시 한 번 박정희의 이름을 새겼다.
유신헌법에 따라 1960년 4.19혁명으로 꽃 피우려던 민주화는 자유당 시절 아니 그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급추락했다. 대통령직선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제로 바뀌었고 1987년 6월항쟁으로 직선제가 부활하기까지 15년이나 방치된다. 대통령 임기는 6년제로 늘어났으며 그마저 연임 제한이 철폐되면서 김대중 후보의 연설은 현실이 되었다. 국회의원의 1/3은 대통령이 추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일괄 선출한다. 국회의 국정감사권도, 지방의회도 사라졌고 대통령은 긴급조치로 헌법 효력마저 일시 정지시킬 수 있으며 국회의원이 발의한 헌법개정안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결을 받아야 확정된다. 게다가 국민들이 서로 감시하면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자는 바로 ‘남산행’인 국민상호감시제라는 SF 소설에나 나옴 직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수준의 독재체제를 실행하였다.
6년이 흘러 1978년 다시 한 번 간선으로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의 영구집권의 야망은 그러나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김재규의 총탄으로 물거품 된다. 그러나 유신헌법의 심각한 결함은 전두환이 너무도 손쉽게 정권을 찬탈하는 기반을 만들어줬고 정작 10월 유신의 장본인인 박정희의 7년보다, 1년 더 긴 8년 동안 전두환이 권력의 최정점에 서는 데 본의 아니게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박정희의 이름을 딴 박스컵 역시 허무한 독재자의 최후와 맞물려 8년만에 ‘박’을 지우고 대통령배국제축구대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6분? 7분? 그마저도 불분명한 전설
1999년까지 29년 동안 열린 박스컵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누가 뭐래도 차범근의 전설의 해트트릭이다. 때는 1976년 9월 11일 서울, 상대는 말레이시아였다. ‘아니 말레이시아한테 해트트릭한 게 전설이라고?’라고 의아해할 축구팬들이 꽤나 있겠으나 1960-70년대 동남아시아는 아시아 축구의 어엿한 한 축이었다.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축구대회도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과 태국의 킹스컵이었다. 실제로 버마(현재의 미얀마)는 박스컵 원년대회부터 3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이에 격분한 박 대통령이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바로 전 달 열린 메르데카컵에서도 차범근이 이끄는 한국의 1진팀 화랑은 결승에서 태국을 꺾고 우승했지만 개막전인 말레이시아전에서는 1-2로 패한 바 있었다. 그리고 1976년 제6회 박스컵에서 다시 말레이시아와 맞붙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철수의 자책골을 포함해 전반에만 내리 3골을 내 줬고, 후반 24분에서야 차범근이 때린 슈팅이 골 포스트를 맞고 튕겨 나오자 박상인이 밀어넣어 1-3으로 따라붙었으나 그마저도 10분 만에 추가골을 얻어맞고 1-4로 참패 직전까지 왔다.
후반 종료도 7분 만에 남지 않자 관중들이 슬슬 자리를 뜨면서 “세금 내놓아라!”라고 욕설을 퍼붓기도 하는 상황. 하지만 후반 38분 하프라인에서 패스를 받은 차범근이 예의 그 폭발적인 질주로 상대 골문을 향해가다 때린 왼발 중거리슛이 말레이시아의 골문을 가르면서 기적이 시작되었다. 곧바로 후반 42분에 이어 후반 44분에도 단신 스트라이커 김진국의 슛이 골 문 앞으로 흐르자 차범근의 발 끝에서 골이 만들어지면서 마침내 경기가 6분 만에 원점이 되었고 경기장에서는 연신 함성이 터졌다. 발 길을 돌리던 관중들이 그 소리에 다시 관중석으로 바삐 돌아오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후반 38분에 첫 골이 나오고 후반 44분에 해트트릭이 완성되었으니 ‘6분의 기적’이지만 정작 본인 차범근은 ‘7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5분으로 기록하는 언론사도 있다. 이 역시 영상자료가 소멸 되었으니 정확히 확인할 방도가 없다. 특히 2번째, 3번째 골에 대해서는 차범근조차 “나중에 들어간 2골은 어떻게 넣었으며 당시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 때나 지금이나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고 밝힐 정도다. 차범근은 이 대회에서 말레이시아전 해트트릭은 물론이고 전 경기에서 득점하면서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선수임을 입증하고 독일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기억하지 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유튜브 세대가 되면서 펠레는 물론이고 현대축구 초창기의 슈퍼스타 주세페 메아짜의 영상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한국 축구에서 한 인물이 이룩한 가장 환상적인 순간이었던 차범근의 해트트릭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한국 축구 최초의 월드컵 출전이었던 역사적인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국제축구연맹(FIFA)이 참가국 16국에만 보낸 기념 앨범은 당시의 선수 사진과 프로필, 경기 장면 등이 죄다 담긴 기념비적인 사료이나 대한축구협회가 제대로 챙기지 않아 스위스월드컵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이었던 주영광이 개인적으로 보관하다 그마저도 분실해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지금의 축구팬이나 전문가들은 너무도 손 쉽게 펠레, 레프 야신,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의 이름을 얘기하고 그들의 영상을 공유하며 전설을 영접하지만 동시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던 이회택, 이세연, 김정남, 박이천 등의 활약상은 전혀 볼 수가 없다.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와닿지 않는 법이고 결국 젊은 세대가 얘기하는 역대 축구 베스트11이라든지, 역대 최고의 선수 논쟁 등은 모두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로 국한된다.
현재도 언급되는 거의 유일한 원로인 차범근마저도 육체적으로 최전성기였던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 이전, 1970년대 국내에서 활약하던 영상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 차범근의 A매치 역대 최다득점 기록도 2014년에서야 55골에서 58골로 정정될 정도로 축구협회 자체의 데이터도 신뢰성이 떨어진다. 이마저도 FIFA에서는 56골로 집계한다. 황선홍의 전설적인 8경기 연속골도, 안정환의 이탈리아 세리에A 진출 전 최전성기의 활약상도, 고종수 이동국이 불러왔던 세기말의 K리그 르네상스도 한참을 유튜브를 뒤져도 제대로 된 영상 하나 찾기 힘든 실정이다.
아나키스트 신채호는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망한다”고 꼬집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80년이 다 된 지난 7월 99세의 전 유태인 강제수용소 서기 이름가르트를 법정에 세웠다. 하지만 우리의 친일파 척결은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유야무야 허망하게 막을 내렸고,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다”고 선서한 만주국 육군 장교 타카기 마사오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줬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피로 일궈낸 1987년 체제에서도 독재정권의 후계자를 직접 투표로 당선시켜준 흑역사를 우리 스스로 자처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 법이고 기억하지 않는 민족은 그 역사를 되풀이하며, 그러한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차범근의 전설이든, 10월 유신이든, 헌법을 찬탈한 더러운 권력이든 기록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사라진 시간’으로 남겨두면 언젠가 또 다시 반복될 역사에 우리 모두 ‘공범’으로 기록되고 기억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