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광주의 피'로 만들어진 프로축구 K리그

Take Eight: 화려한 휴가

by 간지훈
5.18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


“올림픽이나 프로스포츠 같은 걸 유치해서 국민들을 적당히 즐겁고 신나게 만들어주면 정치에는 무관심해 질 게야”


나향욱 ‘개돼지 망언’ 사건급의 발언을 술자리에서 툭 내뱉는 늙은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아니 다카키 마사오의 일본 괴뢰국 만주국의 만주군 상관이었던 일본 극우파 세지마 류조. 그 앞에서 연신 손을 비비며 고개를 끄덕이는 머리가 벗겨지고 있는 남자와 코가 커지고 있는 남자. 향후 대한민국의 대통령 자리를 연이어 바통 터치하는 이들은 이 말을 무슨 금언인냥 가슴에 새기고 잇따라 대형 스포츠 이벤트들을 진행 시켰다. 1988년 서울올림픽,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프로야구, 프로씨름, 농구대잔치, 대통령배전국남녀배구대회 그리고 아시아 최강의 리그인 프로축구를 연이어 탄생시킨 전두환과 노태우였다.


5.18민주화운동이 낳은 3S정책


‘열하나회’ 편에서 다룬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일으킨 1979년 12.12군사반란으로 또다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박정희 대통령 사후 ‘서울의 봄’을 꿈꿨던 국민들의 열망은 1980년 3월 개강을 맞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시위와 집회가 끊이지 않는 형국을 만들어낸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3金’으로 꼽히며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했고 5월 15일 국회헌법개정특별심의위원회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합의했다. 10월 유신으로 9년간 멈춰있던 민주화를 향한 시계가 다시금 서둘러 재깍거리며 나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가만히 당하고 있을 전두환이 아니었는데, 5월 17일 밤 9시 42분, 신현확 국무총리 주재하에 확대국무회의가 열렸고 우습게도 단 8분 만에 전국 비상계엄 선포가 의결되었다. 중동 순방 중 급히 귀국한 최규하 대통령은 특별 선언을 통해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하였다. 제주도까지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계엄지휘체계에 국방부장관이 배제되고 계엄사령관이 대통령 휘하로 바뀌는데 최 대통령은 신군부의 허수아비 수준이었고,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역시 신군부가 추대한 ‘바지사장’이나 다름없었는바 결국 이제 모든 권력은 하나회와 전두환 손아귀에 들어선 것이었다.


5.17내란으로 모든 정치활동과 집회가 금지되었으나 전국 각지에서 가두 시위가 이어졌고 무려 2699명이 구금되었다. 그중 가장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터전이 바로 광주였다.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바로 다음날인 5월 18일 광주 시민들이 “비상계엄 해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진행했고 계엄군이 이를 유혈 진압하면서 민주화운동의 막이 오른다. 다음날인 19일에는 전두환의 지시로 전쟁 중 적군도 아닌 시민을 향한 첫 실탄 사격이 가해졌고 첫 사망자가 발생한다.


그러나 5월 20일 MBC뉴스는 계엄 당국의 앵무새가 되어 “소요 진압 과정에서 일부 부상 학생은 정성껏 치료를 받고 있고 중상자는 없다”고 거짓 보도를 내보냈고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MBC 건물을 방화한다. 계엄군의 진압은 도를 넘어 실탄 발포가 이어졌고 4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가 병원마다 침상을 가득 메운다.


다음날인 21일 광주 시외전화를 끊으면서 완전히 고립시킨 계엄군에 맞서 시민군이 조직되었고 유사 이래 가장 강력한 저항권이 행사된다. "북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왜곡 보도를 내놓은 광주KBS 건물도 방화되었고 이에 전라남도청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조준사격을 가한다. 분노한 시민들이 장갑차와 총기, 화기 등을 탈취해 무장군인에 맞섰고 계엄군은 도청에서 철수해 조선대학교로 향하면서 외곽을 둘러싸고 진압하는 작전으로 변경한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해방 광주’로 명명된 시민 자치를 천명하고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한다. 계엄군은 무조건 무기 반납을 요구했고 이를 둘러싸고 시민군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 결국 무장 투쟁을 이어가겠다는 분파만 도청에 남기로 결정하고 계엄군은 5월 26일 오후 6시까지 투항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최후의 저항을 결심한 시민군에 맞서 계엄군은 이튿날 새벽 광주 시내로 재진입하고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여 진압에 성공한다. 이 와중에 16명의 시민군이 목숨을 잃었으나 계엄군은 단 한 명도 피를 흘리지 않았다.


5월 31일 계엄사령부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총 1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였으나,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800여 명으로 추산했고 최대 2000여 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9일 만에 진압된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중반까지 터부시되며 ‘광주 폭동’ 정도로 폄하되었으나,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꽃 피우는 민주화의 도화선이자 정신적 지주로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광주에서는 말년의 전두환를 계속 법정에 세웠으나, 끝끝내 단 한 마디의 사과도 듣지 못하고 독재자는 초라한 몰골로 세상을 떴다. 그리고 손자의 입에서마저 “학살자”로 폄하되면서 사후에도 끊임없는 조롱과 구설수에 시달리는 중이다.


광주의 피냄새를 축구장 흙먼지로 덮다


1981년 4월 30일 전두환 대통령은 동남아 순회공연 아니 순방을 마치고 뇌물 아니 새마을 성금을 기탁 하며 신군부에 열심히 사바사바한 기업인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갖는데, 이 자리에서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을 돌아보며 “최순영 회장이 ‘할렐루야’ 팀을 갖고 있으니 ‘나무아미타불’ 팀을 만들어 보시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5월 25일 동아일보는 “유공 최종현 사장이 프로축구팀 창설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광주의 피바람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81년 5월, 빈약한 정치적 정당성으로 언제 또다시 광주와 같은 대규모 항쟁이 불거질지 우려된 전두환 정부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나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그랬듯 스포츠, 그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인 축구로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는 ‘3S(Sports, Screen, Sex)’ 정책을 들고나왔다. ‘한국축구의 대부’ 김용식을 감독 자리에 앉히고 창단한 국내 최초의 프로 축구팀 할레루야의 최순영 회장이 청와대로 불려가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프로축구 창단에 자신감을 드러냈고 같은 해 10월, 1983년까지 8개 팀을 만들어 K리그를 창설하겠다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내놓는다.


1983년 3월 대한축구협회 산하 슈퍼리그 위원회가 꾸려졌고 기존의 할렐루야 독수리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한마디에 바로 만들어진 유공 코끼리,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인 박태준 회장의 포항제철 돌핀스, 축구광이었던 김우중 회장의 대우 로얄즈 그리고 국민은행 까치까지 5개 구단이 원년 리그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는데 1년 먼저 창설된 프로야구가 이종도의 개막전 만루홈런, 김유동의 한국시리즈 최종전 만루홈런, 박철순의 22연승 신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김재박의 개구리번트와 한대화의 역전 3점 홈런으로 만들어낸 드라마틱한 우승 등으로 엄청난 붐을 일으키면서 축구 열기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었다.


결국 리그 개막에 앞서 3월 12일부터 29일까지 대통령배전국축구대회를 무료로 개방하면서 축구붐을 일으켰고 마침내 5월 8일 할렐루야와 유공의 개막전으로 이 땅에 프로축구의 첫발을 내딛는다. 원년 총 72경기 동안 60여만 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을 정도로 흥행은 성공적이었고 한일은행, 럭키금성, 현대가 이듬해 참가하면서 8개 구단으로 규모도 확대되었다. 네덜란드에서 뛰던 허정무, 미국에서 활약하던 조영증 등 해외파가 가세했고 야구에 14년이나 앞서 외국인 선수를 받아들이는 등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세가 거듭됐다.


프로축구와 프로야구로 대표되는 프로스포츠의 성공은 1980년대 경제적 호황기와 맞물려 전두환 체제의 안정화에 분명히 기여하였다. 축구 자체에 있어서도 프로축구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생기면서 선수의 육성과 성장에도 크게 기여하여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 32년 만의 귀환을 시작으로 2022년 카타르월드컵까지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세계 최상위 무대를 누빌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마치 포르투갈의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3F(축구, 종교, 가요) 정책을 통해 36년이나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힘입어 에우제비오를 내세운 포르투갈 축구가 위대한 펠레의 브라질을 넘어 1966년 잉글랜드월드컵 4강에 이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엔터테인먼트의 뒤에 광주의 피가 있고, 그 피를 시민들로부터 눈 돌리려 한 독재정권의 협작이 있었다는 역사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편안하게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는 것도, 그 배경에 그러한 3S 정책에도 불구하고 분노와 절망과 열망을 축구장과 야구장에서만 분출하지 않고 다시금 광장으로 쏟아져나와 민주화로 연결지은 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거장 리들리 스콧에 오스카를 안겨 준 영화 ‘글래디에이터’에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이천 년 가까이 지난 과거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의심을 품어볼 대목이다.


“He will give them death, and they will love him for it”(황제는 군중에게 죽음의 검투를 보여주고, 군중은 그것 때문에 황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keyword
이전 07화여기가 '광부' 아니 '차붐'의 나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