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왕’ 같은 영화에서 현해탄을 넘나들며 밀수입하는 조폭들의 대사 같은 이 한마디는 실상은 대한축구협회장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국전쟁 휴전이 1년도 지나지 않은, 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지도 않은 1954년 2월 장택상 축구협회장은 1954년 스위스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에 참여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죄다 집에 모아놓고 이같이 일갈했다. 지금 같으면 허풍을 떠는 농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야만의 시대’였던 당시에는 얼마든지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의에 가득 찬 선수들의 눈빛 속에 잠시의 불안감이 스쳐 지나간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친일과 반일 모두 이용해 먹다
중화민국이 불참하면서 스위스월드컵 아시아지역예선에 나서는 팀은 한국과 일본, 달랑 둘이었다. 무슨 말인 고 하니 철천지원수 일본만 이기면 역사적인 최초의 월드컵 진출을 달성하는 셈이다. 심지어 아시아 국가의 최초 월드컵 진출이었던 1938년 프랑스월드컵의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는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불참하면서 자동으로 진출한 대회였다. 즉, 정상적으로 지역예선을 치르고 아시아를 대표하는 팀은 한국과 일본 둘 중 하나가 최초가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역사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은 경기 이기도 했다. 국토가 초토화된 뒤 수습에 나선 지도 불과 반 년. 반면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소련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미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빠르게 정상화에 나서고 있었다. 만에 하나 일본에 지기라도 한다면 반일과 반공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은 지 불과 6년인 독재정권의 기틀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서울에 받아들여 국민 들이 보는 앞에서 패배라도 한다면 충격파는 몇 곱절일 것이다. 결국 이승만이 러닝메이트 이기붕 대한체육회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내놓은 조건은 홈앤드어웨이 없이 두 경기를 모두 일본에서 치른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지원은 고사하고, 홈그라운드 어드밴티지마저 앗아간 극도로 불리한 조건이었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일본 선수단이 한국 땅을 밟게 할 수 없다”는 선동이었다. 이처럼 반일 감정을 자극한 장본인이 정작 친일 세력을 이용해 집권의 기틀을 마련한 이승만이라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다. 본인 역시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폐지 시켜 결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을 무산시킨 주역이기 때문이다.
제헌 국회에서 친일파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1949년 1월 8일 화신그룹의 창업자인 친일기업가 박흥식을 체포하는 것으로 활동을 시작한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방해와 견제를 뚫고 노덕술, 최운하 등 악질 친일경찰과 이광수, 채만식, 최남선 등 현대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남겼으나 인성은 그 재능을 따라가지 못한 문학계의 거두들을 잡아들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다섯 차례나 발표했고 “친일파를 처단하자고 하는 놈들은 빨갱이”라는 ‘반일’을 ‘반공’으로 덮는 정치선전을 펼치면서 특위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결국 박흥식 체포 5개월도 되지 않은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윤기병 서울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경찰관 80여 명이 반민특위 청사를 급습했고, 6월 11일 “불법적인 조직”이라며 반민특위 특경대를 강제해산 시키면서 반민특위를 와해시켰다. 결국 1년도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반민특위는 그해 10월 완전히 사라졌다.
노덕술, 김창룡 등 대통령의 보호를 받고 반민특위 활동에서 벗어난 친일파들은 충실히 독재정권의 개가 되었고, 국내 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장기 집권을 향한 씨앗을 심었다. 이승만에게는 친일파 척결보다 ‘국가보안법’을 통해 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해 초법적인 행각과 군사력, 경찰력 활용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게 더 시급했을 것이다.
한편 표면적으로는 독도와 이어도, 대한해협으로 이어지는 소위 ‘이승만 라인’을 내세우며 이 안에서 조업하는 일본인 민간 선박들을 나포하는 등 강경한 반일의 자세도 양면적으로 드러냈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친일과 반일의 양가적인 감정을 동시에 이용하면서 12년이라는 긴 세월을 집권하는 노회한 정치인의 권모술수였다.
목숨을 건 최초의 한일전, ‘숨 참고 현해탄 다이브’?
정상희 단장을 필두로 한 축구대표팀은 공교롭게도 삼일절인 1954년 3월 1일, 일본 도쿄에 발을 내딛는다. 3월 7일 아직 국내로 돌아오지 못한 재일교포들은 도쿄 메이지신궁경기장에 태극기가 일장기와 같은 높이에서 펄럭인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을 훔쳤다. 전날 내린 비로 질퍽한 피치를 보고 우리나라가 내세운 작전은 ‘치고 달리기’였다.
처음부터 계획대로 되진 않았다. 전반 16분 만에 이날이 A매치 데뷔전이었던 일본 공격수 나가누마 겐에게 선제골을 얻어맞았다. 그러나 스피드와 체력에서 월등했던 우리 대표팀 선수들에게 질퍽한 메이지신궁경기장의 바닥 상태는 되려 호재였다. 서른 일곱의 백전노장 정남식이 동점골, 스물 둘의 신예 최광석이 역전골을 연이어 터트린 뒤 한국 스트라이커 계보의 시작인 ‘황금다리’ 최정민이 멀티골을 터트리면서 무려 5-1의 대승을 거두고 자신에 가득 찼던 일본 홈 관중들을 충격의 침묵 속에 빠뜨린다.
이날 서울 시내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고 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집으로 돌아가 라디오 중계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물론 한국의 골이 터질 때마다 장안이 떠나가라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은 광복을 맞은 9년 전 이래 처음이었다고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때의 룰은 홈앤드어웨이의 점수 합산이 아니었다. 현재의 룰 대로라면 4골 차로 승리한 우리나라가 2차전에서 3골 차로 져도 자동 진출이 확정되나, 당시는 골득실 규정은 없었고 승패만 있었기에 2차전에서 1골 차로 져도 동률이 되어 재경기를 치러야 하는 방식이었다. 즉, 1차전을 5-1로 대파 했지만 바짝 약이 오른 일본의 홈 텃세와도 싸우며 단 0-1로 지더라도 3차전을 제3국에서 치러야 하는 쉽지 않은 일정이었던 것이다.
또다시 상대 공격수 이와타니 토시오에 선제골을 얻어맞으며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정남식이 또 한 번 동점골로 경기의 균형을 맞췄고 간판 스트라이커 최정민이 역전골까지 터트려 결국 2-2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광복 후 9년 만에 치른 최초의 한일전은 극도로 열악하고 불리한 조건에서도 1승 1무로 마무리되었고, 대한민국은 예선전을 치르고 당당히 월드컵 본선 무대에 서는 최초의 아시아 국가로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되었다.
다행히 ‘현해탄 다이브’를 하지 않고 배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선수단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역마다 엄청난 환영 인파 속에 뒤덮였다. 수문장이었던 홍덕영은 “나의 축구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환영 인파는 처음이었다. 기차가 정차하는 역 플랫폼마다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들 모두 동원돼서 나온 게 아니라 승리의 기쁨에 겨워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서울에 도착한 선수단은 지프차에 각 3명씩 나눠 타고 경무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예선 출전을 반대했던 과거는 어디에 두고 이런 걸 가만히 지켜 볼 이승만은 아니었던지라, 동아일보 전면에 선수단과 악수하는 대통령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그리고 이제 총성이 멈춘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이 기적의 항해는 스위스월드컵이라는 최초의 장도에 오른다.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