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6월 16일 늦은 밤, 스위스 취리히공항에서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참가하는 마지막 나라의 입국을 기다리던 기자들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미지의 나라에서 온 초라한 행색의 선수단에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바지의 밑단이 말려 올라간 허름한 단복을 보고 호기심 반, 조롱 반으로 무례한 인터뷰를 청하는 그들에 6년 전 역사적인 올림픽 첫 승의 주역이었던 골키퍼 홍덕영이 당당하게 답했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어 물자가 부족하다. 물자를 절약하는 게 애국하는 길이라 바지를 짧게 입었다” 그렇다. 참혹한 내전을 겪고 전쟁 피해를 복구하지도 못한 세계 최빈국이 월드컵이라는 꿈의 무대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남북통일 눈 앞에서 멈춘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국이 암호명 ‘폭풍 224’라는 작전에 따라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하며 전쟁의 포화 속으로 돌입했다. ‘선조의 후예’ 이승만 대통령은 이틀 만에 수도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달아나 임시수도를 세웠다. 국방부는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은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이라는 거짓 방송을 내보내면서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 및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임진왜란 싸대기 휘갈기는 속도로 밀리는 모양새였다.
이른바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해 북한의 남침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과 헤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남침 다음 날 UN군 참전을 결정했고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은 7월 18일부터 더글러스 맥아더 UN군 사령관에 위임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해 2주 만인 9월 28일 서울을 3개월 만에 탈환하는 개가를 이뤘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모두 수복되었으나 평소 ‘북진 통일’을 외치던 이승만은 10월 1일 국군의 선두부대로 하여금 38선을 돌파하도록 지시했다.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없다며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을 무시하던 트루먼 정부 역시 중공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대한민국의 통일 필요성을 깨닫고 10월 7일 UN 총회에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10월 9일부터 국군과 UN군의 거침없는 북진 작전이 시작되었다. 광복 5년 만에 비로소 한반도가 통일되는 장관이 눈 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군의 북한 점령이 자신들의 방위에 치명적일 것임을 걱정한 마오쩌둥이 10월 8일 북한에 중공군을 참전시키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재래식 무기에 그쳤지만 엄청난 물량 작전으로 반격하는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UN군은 결국 1951년 1월 4일 ‘1.4후퇴’로 다시금 서울을 중공군에 내줬다.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수도 부산으로 이동했고 이 와중에도 이승만은 대통령 재선을 위해 개헌에 반대하는 야당 국회의원 50명을 헌병대에 연행, 군인과 경찰로 포위한 채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친위쿠데타 ‘발췌개헌’을 감행한다.
사실 전쟁은 1951년에 일찌감치 끝날 수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지 5년 만에 다시 치르는 ‘남의 나라’ 전쟁에 미국 국내 여론도 피로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UN을 통해 중공에 정전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유엔군을 밀어내며 기세등등해진 중공은 한반도에 모든 외국 군대 철수, 대만의 미군 철수,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공만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할 것 등 UN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을 요구했다. 이에 UN은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항전하기로 결의하면서 전쟁은 2년을 더 끌게 됐다.
휴전 협상은 1951년 6월 23일 개시되었으나 전쟁 포로 송환 등 각종 쟁점 들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UN군과 공산군의 전투는 반복됐다. 그러던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 UN군 대표 마크 클라크, 북한군 대표 김일성, 중공군 대표 팽덕회가 ‘정전협정서’에 서명하면서 1129일 동안 이어진 한국전쟁은 일단 멈추게 되었다. 이 협정에는 국군 대표가 빠져있는데 이승만 정부는 미군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면서 휴전 협상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면서 미군이 철수하여 남침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을 반면교사 삼아 1953년 10월 1일을 전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현재까지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눈앞에 뒀던 통일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요원한 실정이다.
THE LONG AND WINDING ROAD
이런 전쟁 형국에 월드컵이라니 출전 자체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나 스위스까지 가는 길부터 멀고도 험한 여정이었다. 김윤기 단장과 ‘한국 축구 최초의 영웅’ 김용식 감독 체제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간 선수단은 월드컵 본선을 불과 6일 앞둔 1954년 6월 10일에서야 부산에서 미군 수송기를 얻어 타고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으로 향한다. 그러나 스위스행 비행기 티켓 마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엉망진창의 행정력으로 도쿄-태국 방콕-인도 콜카타-파키스탄 카라치-이탈리아 로마-취리히로 이어지는 세계 일주 투어 같은 일정으로 월드컵을 향해야 했다.
이마저도 비행기 표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1진, 2진이 나누어 출발했고 심지어 2진은 좌석이 모자라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온 영국인 신혼부부가 “월드컵에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며 축구종주국 답게 양보해 준 덕에 겨우 스위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결국 비행시간만 48시간에 녹초가 된 상태로 6월 17일 헝가리와의 조별 예선 첫 경기를 불과 10시간 앞둔 16일 밤에야 취리히공항에 도착하는 촌극이 연출되었다.
이 글 서두에 언급했듯 월드컵 참가국 16개국 중 가장 늦게 입국한 대한민국은 단복조차 제대로 구할 수 없어 대한축구협회 임원이, 아는 양장점에서 외상으로 급하게 맞췄고 그마저도 질이 좋지 않아 기자들의 조롱거리가 된 것이다. 홍덕영은 “당시 스위스 사람들은 우리의 축구 실력이나 축구 기술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우리 현대사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저 한국전쟁의 당사자로만 봤다”고 회상했다.
남들은 월드컵 개막 한 달 전부터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적응 훈련을 갖는데 훈련은커녕 시차 적응도 제대로 안 됐고 취리히에 도착해서도 부랴부랴 숙소를 구하느라 진땀을 뺀 세계 최빈국의 첫 월드컵 도전기. 심지어 첫 상대는 ‘매직 마자르’라 불린, 한국이 전쟁이 한참이던 2년 전 헬싱키올림픽을 제패한 우승 후보 1순위 헝가리. 축구 전문가들은 헝가리의 ‘20-0’ 승리를 예상했다.
0-9로 참패하고도 찬사를 받았다?
1954년 6월 17일 현지 시간으로 오후 6시, 스위스 취리히의 하드텀스타디움에서 역사적인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경기의 막이 올랐다. 헝가리에는 ‘1950년대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페렌츠 푸스카스를 비롯해 유럽 축구의 스타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김용식 감독이 내린 작전은 단 하나. “들어가서 수비만 해라!” 세계 최강의 공격력을 갖춘 헝가리는 경기 초반부터 상대를 몰아붙이는 게 전매특허로 전반 10분 만에 2골 이상 터트리는 것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러나 한국축구 국가대표팀은 하프라인 조차 넘지 않고 전반 12분을 죽을힘을 다해 버텨냈다. 되려 경기가 풀리지 않은 헝가리 선수들 사이 마찰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푸스카스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 경기에서 푸스카스의 슈팅을 수십 차례 온몸으로 막아낸 홍덕영은 “푸스카스가 찬 공은 마치 대포알 같아서 막으면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느낄 정도였다. 크로스바에 공이 맞으면 골대가 한참 동안 흔들렸다”고 회고했다. 전반 12분 푸스카스의 첫 골을 시작으로 스위스월드컵 득점왕 산도르 코츠시스에 해트트릭을 내줬다. 전반에만 0-4,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대로 0-20 혹은 그 이상은 되지 않을 모양새였다. 경기장을 메운 1만 3000여명의 관중들은 되려 한국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후반은 더 참혹했다. 시차 적응도 안 되었으니 갈수록 체력이 고갈된 탓이다. 당시에는 골키퍼를 제외하면 선수교체 규정도 없어 뛸 대로 뛰다 지쳐 쓰러진 선수들이 실려 나가 나중에는 달랑 7명이 싸워야 했다. 결국 0-9라는 월드컵 역사에 남는 참패를 당했는데 되려 박수를 받은 쪽은 한국이었다. 헝가리의 명장 셰베시 구스타브는 “한국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고 추켜세웠다. 이날 경기를 중계하던 영국 BBC의 중계진도 “한국 대표팀은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라의 선수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있다”고 극찬했다.
9골이나 얻어맞았음에도 이날 한국 축구대표팀에서 가장 인상적인 선수는 수문장 홍덕영이었다. “슈팅 30개까지 세다가 그 뒤로는 그것도 그만두었다”는 홍덕영이 기록한 이 날의 세이브는 최소 36개. “경기가 끝나고 버스에 올랐는데 어떤 노인이 손자를 안은 채 창문을 두드렸다. 사인을 해 달라는 것이었지” 한국의 사연을 접한 유럽의 축구팬들은 한국의 숙소를 찾아 현금은 물론이고 통조림, 소시지 등 먹을거리와 청바지, 점퍼, 시계 등 입을 거리까지 잔뜩 두고 갔다고 한다.
3일 뒤 치른 조별 예선 2차전 터키전에서 한국은 2진 선수들을 출전시켰다. 헝가리전에서 1진 선수들이 녹초가 된 탓도 있겠지만 언제 또 월드컵에서 뛰어보겠냐는 김용식 감독의 배려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대회 이후 한국이 월드컵 무대를 다시 밟는 건 32년 후에나 벌어졌다. 헝가리전에서는 수비만을 지시했던 김용식은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며 “그래야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고 선수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1진 선수들로만 경기를 치러도 쉽지 않았을 터키를 상대로 2진 선수들로 골을 기대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페네르바체의 레전드 부르한 사르군에 해트트릭을 허용하며 0-7의 또 한 번의 참패. 두 경기 동안 16골을 얻어맞으며 2패. 이것이 대한민국 월드컵 도전사의 첫 페이지의 결과물이었다. 김용식 감독이 바랐던 첫 골은 그로부터 32년이나 흘러 박창선의 발끝에서야 만들어진다.
70년 전 한국에 세계 축구의 벽을 느끼게 한 푸스카스의 이름이 우리 언론에 오랜만에 언급된 것은 2020년, 손흥민이 1년 중 가장 멋진 골을 터트린 주인공에 선사하는 ‘푸스카스상’을 받았을 때였다. 한국전쟁으로만 기억되던 나라에서 이제 한국은 유럽 축구팬들에게 ‘차붐의 나라’를 거쳐 ‘소니의 나라’로 회자 되고 있다. 헝가리혁명으로 붕괴되어 다시는 ‘매직 마자르’ 시절의 위용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헝가리에 비해 월드컵 4강을 비롯해 찬란한 역사를 쌓아 올리는 우리 축구사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모든 역사의 시작에는 후진적인 체육행정과 정보력,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정신력과 투혼, 긍지와 자부심만은 ‘월드클래스’였던 1954년의 기적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