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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광부' 아니 '차붐'의 나라입니까?

Take Seven: 옛날 옛적 서부에서

by 간지훈
영화 '국제시장' 속 파독광부


“Is this Tscha Bum’s country?(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축구천재 호나우두 다음으로 필드 플레이어 중 가장 빼어난 활약을 펼쳤던 독일의 에이스 미하엘 발락은 파라과이와의 16강전을 치르기 위해 제주국제공항에 입국하면서 아직도 밈으로 회자되는 이러한 인터뷰 첫 마디를 남겼다. 서독 무대를 떠난 지 어언 십여 년이 흘렀는데도 서독 출신도 아니고 차붐의 활약상을 동독에서 TV로나 겨우 지켜봤을 푸른 눈의 남자에게서 거침없이 자신의 우상이라며 지목되는, 대한민국을 넘어 20세기 아시아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로 누구의 이견도 없이 꼽히는 차붐 아니 차범근의 이야기다.


서독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전편에서 다룬 ‘6분 해트트릭’의 기적 이후 차범근은 공군으로 입대하게 되는데 당시 공군의 복무기간은 무려 35개월로 육군의 30개월 보다 5개월이나 길었다. 지금이야 20대 초반의 황금같은 시기 중 무려 3년을 군에서 썩힐 수 없으니 어떻게든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돕기 위해 다양한 루트로 군면제의 길이 제공되지만, 애초에 해외 진출이라는 선택지가 없던 당시 군 복무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군인팀은 누구나 따르는 무난한 길이었다.


여기서 1970년대 한국의 후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데, 군복무 기간이 길어 우수 선수 영입에 난항을 겪던 주영복 공군참모총장이 육군과 같은 30개월을 채우면 의가사 전역 시켜주는 조건으로 차범근 영입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 고려대 재학 시절 교련과목 이수로 3개월 단축 혜택을 받은 차범근은 27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1978년 12월, 우리 나이로 스물 일곱을 눈 앞에 둔 뒤늦은 나이로 독일 분데스리가 SV 다름슈타트 98에 입단한다.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고 혈혈단신 독일로 향한 차범근은 Vfl 보훔과의 분데스리가 데뷔전에서 독일 축구전문지 키커 평점 3점(키커의 평점은 낮을수록 좋다)의 좋은 평가를 받고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른다. 하지만 5개월 단축 복무가 국내에서 논란이 되면서 차범근은 독일 땅을 밟은 지 11일 만에 돌아오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다.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고도 당시만 해도 복무 중 획득한 금메달은 만기 전역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기에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차범근은 1979년 5월 31일까지 남은 복무기간을 다 채우고 나서야 ‘자유의 몸’이 된다. SV 다름슈타트와의 계약도 파기되었지만 1경기를 치러 ‘프로 선수’로 분류되는 통에 K리그 출범 전이었던 국내 아마추어 경기에 전혀 출전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 훈련만 해야 했다. 그리고 그 해 6월 17일에서야 서독 땅을 다시 밟고 7월 15일 다름슈타트 보다 훨씬 강팀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입단 테스트를 치른 뒤 다음날 마침내 정식 선수 계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인 분데스리가 데뷔를 앞둔다.


그리고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1979년 8월 11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분데스리가 1979-80시즌 개막전부터 선발 출장해 데뷔하자마자 분데스리가 1라운드 베스트11에 선정된 차붐은 리그에서만 12골을 터트리며 프랑크푸르트 팀 내 득점 1위에 오른다. 이 때 차범근은 중앙공격수도 아니었고 11개의 도움을 올린 오른쪽 윙이었다. 들어보지도 못한 아시아의 미지의 나라에서 온, 입단 테스트를 거쳐 저렴한 맛에 로또 긁어보는 심정으로 영입한 무시당하던 그 선수가 라운드 베스트11에 8번 뽑히더니 결국 키커 선정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까지 뽑히게 된 것이다. 키커의 라이벌인 푸스발 보헤와 슈포르트 빌트도 시즌 베스트11에 차붐의 이름을 빼놓지 않았다. 푸스발 보헤의 선수 평가에서 차범근은 전체 2위였고, 빌트 자이퉁 평가에서는 전체 3위였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클럽 사상 최초의 UEFA컵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다.


당시의 분데스리가는 현재 분데스리가의 위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일례로 키커 시즌 평점에서 차범근은 공격수 3위를 기록했는데 1위인 칼 하인츠 루메니게는 차범근의 데뷔 시즌인 1980, 81년 2년 연속 발롱도르 수상자고 2위인 케빈 키건은 1978, 79년 발롱도르 2년 연속 수상자였다. 즉 당시 4년 연속 발롱도르를 거머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 죄다 분데스리가 공격수였는데 그 한 자리를 유럽에서는 철저히 무명이었던 차범근이 꿰찬 것이다. 키커 랑리스테 WK-1(월드클래스, 포지션 1위)도 차범근의 차지였다. 키커 랑리스테 월드클래스는 등급을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2년 연속 분데스리가 득점왕이었던 유프 하인케스조차 단 한 번도 받지 못했고 앞에 언급한 발락이나 월드컵 역대 최다 득점자인 미로슬라프 클로제도 단 한 번 밖에 받지 못할 정도다.


이해가 쉽도록 손흥민의 시점에 대비해 보면, 한국에서만 뛰다 군 문제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개인 훈련만 하던 손흥민이 스물 일곱의 뒤늦은 나이에(당시 축구 선수의 스물 일곱은 현재 30대도 넘은 나이였을 것이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입단 테스트를 받고 공짜로 입단하여, 입단하자마자 주전 윙으로 팀 내 득점과 도움 1위를 죄다 달성하고 FC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와 레알 마드리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공격수 최고 평점 1, 2위를 다투다 시즌 베스트11에 선정되면서 팀에 최초의 유로파리그(심지어 차붐 때의 UEFA컵은 지금의 유로파리그보다 훨씬 강팀들이 즐비한 대회였다)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것이다. 지난날 서독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의 출현이었다.


‘광부의 나라’에서 ‘차붐의 나라’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지만 1960년대 린든 존슨 정부의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의 실패와 소련과의 냉전 속에 우주개발·군비경쟁,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인한 재정 악화 등 악재가 겹치면서 더 이상 제3세계에 대한 무상원조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미국의 원조를 믿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 빈약한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발전으로 회복하려 했던 박정희 정부에도 이는 치명적이었는데,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서구사회의 지원이 필요했고 이에 등장한 대체자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며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절실했던 서독이었다.


외화획득뿐 아니라 심각한 실업 문제 타개를 위해서도 파독은 필수적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수출 위주의 경제성장을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해 경공업 중심으로 산업시스템 자체를 전환시켰다. 따라서 대대로 농업으로 먹고 살던 농촌이 붕괴됐으며 죄다 서울로, 서울로 향하는 이농현상이 본격화됐다. 쏟아지는 농촌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서울의 인프라에서는 도시빈민이 속출하는 부작용이 이어졌고 범죄율이 급등하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야기되었다. 결국 지금의 우리가 힘든 육체노동 일자리에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듯이 반 세기 전에는 우리의 부모가 저마다 ‘저먼 드림’을 꿈꾸며 서독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63년 파독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000여 명이 지원할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나오듯 당시로서는 초 엘리트였던 대졸자도 상당수 있었다. 3년 계약의 파독광부들에게는 매월 160달러의, 당시 국내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높은 보수가 약속되었기에 어마어마한 지원자가 밀려든 것이다. 2008년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977년까지 파견된 광부는 7936명에 달했고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는 무려 11000명이 넘어섰다.


정해본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1967년 서독 파견 간호사들이 보내 온 송금액이 한국 상품수출액의 35.9%, 무역외수입의 30.6%를 차지했다”며 “한국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게 도운 일등공신”이라고 주장했다. 이 수치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1960-70년대 파독근로자들이 베트남전쟁 참전군인과 함께 박정희 경제개발의 아이콘이나 다름없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광부의 나라’에서 발락의 입에서 나온 ‘차붐의 나라’가 된 것이 차범근의 활약이 얼마나 센세이션했는 가를 방증하는 셈이다. 와닿게 비유해 보자면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스포츠인 프로야구가 세계 최고의 리그라 오타니 쇼헤이, 애런 저지 등이 죄다 한국에서 뛰고 있는 메이저리그라 쳐보자. 그 때 우리에게 ‘외노자’의 이미지밖에 없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름 모를 선수가 갑자기 외국인 선수로 등장하여 홈런 50개를 쳐 대면서 한화 이글스를 가을 야구로 이끈 셈이다. 우리 역시 별 수 없이 방글라데시를 그 선수의 나라로 기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도 말이다.


손차박 논쟁이 놓치고 있는 것


축구팬들 사이에는 흔히 ‘손차박’ 논쟁이라는 게 있다. ‘펠마메’ 논쟁의 한국 버전이다. 축구계 GOAT(Greatest Of All Time)를 꼽는 데 펠레-디에고 마라도나-리오넬 메시를 놓고 논쟁하듯이, 한국 더 나아가 아시아 축구의 GOAT를 뽑는 데 손흥민-차범근-박지성을 두고 논쟁하는 것이다. 2022년 카타르월드컵 우승을 거머쥐면서 ‘펠마메’ 논쟁의 승자가 메시로 좁혀지고 있듯이, 카타르월드컵 16강 진출로 ‘손차박’ 논쟁의 해답도 손흥민으로 상당부분 좁혀지는 모양새다.


필자 역시 축구선수로서 획득한 업적과 숫자로 따질 경우 이제 손흥민이 GOAT가 아닌가 생각한다. 다만 차범근의 선구자로서의 압도적인 영향력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고도 덧붙인다. 이는 손흥민뿐 아니라 앞으로 수백년 동안 태어나고 볼을 찰 누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차범근이 언어와 협회의 도움, 경제력이 지원되는 상황에서 10대 후반부터 분데스리가 유스팀에서 육성되어 갓 스물이 됐을 때부터 유럽축구의 중심에서 뛰었다면 차범근의 비교대상은 손흥민-박지성이 아니라 요한 크루이프나 코임브라 지코 혹은 마라도나나 미셸 플라티니였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 차범근을 폄하하는 의견 중 하나는 분데스리가 진출 이후 멈춰버린 국가대표 이력과 월드컵 0골일 것이다. 그런데 차범근은 26세에서 멈춘 국가대표 경력만 가지고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과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아직 고등학교 교복도 벗지 못한 만 18세에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24세에 센추리클럽에 가입할 정도로 혹사에 가까운 일정을 치르면서 거둔 전리품들이다.


프랑크푸르트 매니저 우도 쿨록이 차범근을 만난 첫 자리에서 “한국에서도 축구를 하느냐”고 물을 정도로 철저하게 무시당했던 축구 대표팀에서 타의에 의해 사실상 은퇴하지 않고, 지금처럼 대표팀 차출이 자유롭고 비행 일정 등도 선진적이었다면 호날두의 A매치 214경기 132골이라는 전대미문의 대기록에 근접한 기록을 이미 1980년대에 세웠을 것이다. 차범근의 은퇴 이후 그 수준의 유럽 빅클럽에서 뛰는 한국 선수를 만나는 일은 17년이나 지나서야 박지성에게 이뤄졌다. 손흥민이 이강인 김민재 황희찬 등 뛰어난 여럿의 재능들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재능이라면, 차범근은 아예 황무지에서 유달리 혼자만 불뚝 솟아오른 ‘돌연변이’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차범근은 차범근이라는 개인으로만 뛴 것이 아니다. 수만 리 떨어진 타지에서 빈곤과 차별, 향수와 싸우며 버티던 한국인들에게 희망이자 쉴 곳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축구사뿐 아니라 한국사의 한 페이지에서도 차범근이 언급되는 까닭이다.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 광부들의 아픔을 안고 전투를 치르듯 경기를 뛰었다”(‘포포투’ 창간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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