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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를 거쳐 간 러시아 문학 거장 푸시킨의 흔적

푸시킨 문학의 밑거름이 된 오데사 생활

by 타이준

세계가 사랑하는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


앞서 나는 오데사가 예술가들의 도시라고 말했었다. 과거 오데사에는 많은 예술가가 살거나 거쳐 간 곳이다. 오데사 옆으로는 몰도바, 루마니아가 접해있고 남쪽의 흑해로 나가면 터키와 캅카스 산맥과도 연결된다. 지리적으로 오데사는 외국으로 나가는 거점이다. 그래서 세계 각지의 사람과 문물들이 모여들었고 이는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오데사 출신의 많은 예술가가 있지만 그중에서 푸시킨에 대해서 소개하고 싶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전 세계가 사랑하는 러시아 출신의 작가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라는 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그리고 일이 잘 안 풀리거나 화가 날 때 지금도 자주 인용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작가 푸시킨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생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주로 활동하였는데 어떻게 그가 오데사에 왔는지 오데사에서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알아보겠다.

푸시킨 박물관 입구의 그의 동상이다. 곱슬머리와 구레나룻이 인상적이다.

푸시킨이 오데사에 와서 실제로 머무르던 아파트가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다. 그는 1823년부터 1824년 일 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머물렀다. 푸시킨이 오데사에서 오랜 시간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푸시킨은 아주 큰 존재로 기억되는 거 같다.


공무원 푸시킨이 작가 푸시킨으로 거듭난 오데사


박물관 안쪽에는 실제 푸시킨이 사용하던 물건, 편지,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어쩌다가 푸시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으로 와서 1년 정도 머무르게 되었을까? 푸시킨은 러시아의 귀족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재능이 많아 상류층에서 주목받는 청년이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귀족들처럼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는데 그는 공직생활에 큰 흥미가 없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국가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푸시킨은 어느 날 러시아 제국과 농노 제도를 비판하는 투서를 썼다. 그래서 푸시킨은 정부로부터 문책성 좌천을 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가 좌천되어서 머물던 곳이 바로 오데사였다. 과거부터 자유무역항으로 서유럽의 문물 유입이 활발했던 이곳에서 푸시킨은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1년 남짓의 짧은 오데사 생활이었지만 공무원 푸시킨이 불세출의 작가 푸시킨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오데사 사교계의 스타 푸시킨 : 푸시킨의 깔끔하지 못했던 사생활


푸시킨이 사용하던 트럼프 카드와 동전이다. 푸시킨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주목받는 유명인사였기에 푸시킨의 오데사 전근은 오데사의 사교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푸시킨을 만나기 위해 오데사를 찾아왔다. 그러면서 그는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다양한 신분의 여성들과 염문설을 퍼트리고 다녔다. 위의 카드와 동전으로 알 수 있듯 그는 도박도 좋아하였는데 많은 재산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풍족하게 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푸시킨은 성격이 불같았고 호전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와 별개로 싸움 실력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고 한다. 문학적으로는 위대한 작가였지만 사생활로는 그렇게 깔끔하지 못했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했던 푸시킨 :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해 죽음을 맞이한다


푸시킨과 그의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의 그림이다. 나탈리야 곤차로바와의 결혼 생활은 그의 건전하지 못한 사생활의 절정이자 푸시킨이 죽게 된 원인이 되었다. 나탈리야 곤차로바는 푸시킨과 교제하던 당시 18살이었는데 이미 어린 나이에 결혼해 남편과 사별했던 여인이었다. 곤차로바는 미인이지만 뒷소문이 무성했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사교계에서 유명했고 남성 편력이 좋지 못하다는 소문이 많았다. 그래서 푸시킨의 친척들이 결혼을 극구 반대했지만 푸시킨은 곤차로바와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곤차로바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곤차로바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무성했고 급기야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황제 니콜라이 1세와의 염문설까지 돌았다. 푸시킨은 이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곤차로바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익명의 투서를 받게 되었다. 이른 본 푸시킨의 분노는 폭발하여 당시 곤차로바와 염문설이 있던 프랑스의 장교 당테스를 찾아가서 일대일 결투를 신청하였다. 그 결투에서 푸시킨은 급소에 총을 맞고 사망하고 만다. 인기작가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나탈리야 곤차로바는 푸시킨 사망 이후 군인이었던 란스코이와 재혼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그녀를 비난했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숨을 거두었을 때도 장례식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 돌을 던지며 비난했다고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간 것 그리움이 되리라


알렉산드르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살아생전 참고 인내하며 미래를 바라겠다는 시를 썼던 푸시킨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죽게 된 그의 삶을 보니 이 시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 이후 누군가 화를 참으라는 의미로 이 글귀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쓴웃음이 나오곤 한다.


작가의 고난은 곧 좋은 작품의 밑거름이 되었다 : 과연 작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할까?


박물관에는 푸시킨에 대한 자료와 사진 그림들이 정말 많이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여기서 남긴 흔적은 꽤 많았다. 푸시킨은 이곳에서 일을 하다 1825년 정부로부터 사면받아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게 되었다. 비록 사면받고 수도로 복귀하였지만, 정부로부터 위험인물로 찍혀있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당했고 그가 만든 작품 모두가 검열받았다. 시간이 지나 정부의 감시가 느슨해지자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그의 대표작인 `스페이드의 여왕` , `대위의 딸` 등의 작품이 탄생하였다.


러시아의 작가 `표트르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로 유배 가지 않았다면 그의 대표작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푸시킨도 마찬가지로 오데사로 좌천되지 않았었다면 그의 대표작들 특히 `대위의 딸`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작가 처지에서는 기억하기도 싫은 고난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나 그 고통의 순간이 위대한 작품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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