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를 새로 다듬은 글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무엇을 먹을까?
tv를 보다 보면 유언장 쓰기, 관속 체험 등의 독특한 콘텐츠를 접할 때가 있다. 그런데 나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내 생애 '마지막 식사'에 더 관심이 일곤 했었다.
음식은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켜 준다. 때로는 잊지 못할 추억까지 남겨준다. 난 아직도 라면 냄새를 맡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새벽 일찍 출근하는 아버지께서 종종 드시던 라면.
‘후루룩 후루룩’
완벽히 배합된 면과 국물은 아버지의 들숨과 만나 천상의 소리를 자아낸다. 동그랗게 오므린 입술은 꼬불한 면발을 잘 다려가며, 빠르게 끌어올린다.
‘후루룩 후룩-쪽!’
마지막 순간, 격렬한 손인사와 같은 흔들림을 끝으로 면발은 사라진다. 하지만, 라면의 여운은 가득 차 부유하는 향만큼 그칠 줄 모른다. 단칸방을 채운 쇠고기면 향,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분연히 일어나 한 입만! 을 외쳤을 거다.
10대 시절,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친구들은 '용수철 돈가스'를 기억할 것이다. 마진 따위는 잊은 듯한 두툼한 고기, 무한 제공 고봉밥, 밥공기에 담긴 수프, 케첩과 마요네즈를 버무린 양배추 샐러드와 방울토마토까지.
내 별명을 딴 돈가스가 한철 장사인 줄 알았다면, 매일 한 끼 꼬박 먹을 걸 그랬다. 지금도 돈가스를 접할 때면, 어머니와 친구들의 미소부터 떠오른다.
부대찌개, 홍어무침, 호두과자는 설날과 추석이 생각나는 음식이다. 명절 때면 우리 제수씨가 챙겨 오는데, 하나같이 맛이 일품이라 갈비찜, 잡채, 전 등의 전통 강자들을 꺾은 지 오래다. 또, 어머니와 와이프가 종종 선보이는 반숙 계란장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진다. 흰밥 위의 계란장을 반으로 가르면 치즈 같은 노른자가 흘러나오는데, 그 위에 송송 썰린 파가 듬뿍 들어간, 달고 짠 국물을 끼얹어 한술 뜨면 세상 행복하다.
때로는, 좋지 않은 기억을 안겨줬던 음식도 있다. 막 성인이 된 후,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먹었던 알탕이 바로 그렇다. 대학교 진학을 먼 곳으로 하게 된 친구와의 송별회 때, 복받친 감정에 눈물 섞인 술을 마구 마셔대다, 처음으로 오바이트의 기억을 안겨준 음식이었다. 호박죽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는 음식이다. 생전 즐기시던 음식이었는데, 마지막에는 한술도 뜨지 못하고 황망히 돌아가셨다. 밥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호박죽이 가끔 생각난다.
그럼,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며, 레시피를 떠올려본다. 김치보다 많은 양의 돼지고기 앞다리를 넣고, 오래된 양은 냄비에 고아내듯 한참을 끓인다. 돼지고기는 비계 반, 살코기 반의 비율이어야, 씹는 식감도 좋고 국물이 고소해진다. 김치 숨이 죽어 김치죽의 모양새가 나올 즈음 불을 끈다. 숟가락을 든다. 흰밥을 한입 먹고 찌개를 떠먹어도 되고, 찌개를 흰밥 위에 얹어 같이 떠먹어도 된다.
냄비 속 네 개의 숟가락은 움직임이 사뭇 달랐다. 나와 동생은 거침없이 고기를 뜨는 숟가락이었다. 다른 한 개의 숟가락은 모든 것을 쓸어 담던 숟가락이었고, 남은 한 개의 숟가락은 고기를 뜨는 숟가락을 도와주던 숟가락이었다. 한 냄비에 담긴 '사랑'을 함께 떠먹던 그때가 사무치게 그립다.
난 어린 시절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하였다. 청년 시절부터, 꿈과 현실의 벽에 큰 좌절감을 느꼈던 아버지는 주사가 있었다. 순박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화풀이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고성과 살림이 부서지는 소음은 일상이었다. 서너 시간의 분풀이가 끝나면, 착한 어머니는 아버지의 끼니를 정성스레 차려주시곤 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온 어머니는 이리저리 찌그러진 양은 냄비 같았다. 여기저기 찌그러진 투박한 양은 냄비, 오랜 풍파에도 끝끝내 버티며, 맛있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담아내던 고마운 존재.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던가? 우리 아이들도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퍽 좋아한다. 양은 냄비 하나에 숟가락 네 개를 놓는 것도 닮아있다. 달라진 점은, 각자의 국그릇을 사용한다는 것, 아이들이 좋아하는 고기는 국자에 듬뿍 담겨 전달된다는 것, 김치찌개가 아니어도 우린 이미 충분히 화목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매일 음식을 먹으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음식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다. 돼지고기 김치찌개의 고기를 덜어주던 숟가락을 우리 서로 쥐어보자. 꽉 쥐어보자. 그 숟가락만 놓지 않는다면, 마지막 음식은 무엇이 됐든, 우리의 허기를 따뜻이 채워줄 것이다.
* 초고에 댓글, 응원하기 해주셨던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이 글은 당선작은 아니지만, 정이 붙은 글이라 새로이 다듬어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