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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리듬을 살리는 '단문'

말소리튜닝 38

by 신미이

옛시조와 현대시를 읊어 보면서 느끼셨겠지만, 우리말은 3음보나 4음보로 말할 때 듣기가 좋습니다.

그런 3음보나 4음보는 문장이 짧을 때 살아 있습니다. 문장이 짧다는 건 단문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할 때마다 어떻게 음보까지 의식하면서 말할 수 있을까요?

맞아요. 어렵습니다. 습관이 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원고나 대본을 써서 그걸 보면서 말을 할 때가 있잖아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인사말이 있습니다. 기관의 장이라면 대표의 자격으로 인사말을 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원고를 사전에 준비합니다. 그리고 그 인사말 원고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하지요.

대규모 행사나 회의를 진행하는 사회자도 사전에 시나리오를 준비합니다. 실수 없이 진행을 원활하게 하려면 반드시 시나리오가 필요합니다.

TV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들도 대본을 보고 말합니다. 뉴스에서 리포트를 하는 기자들도 대본, 즉 기사 원고를 보고 말합니다. 애드리브로 할 때보다 정제된 말을 할 수 있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할 목적으로 사전에 '글'을 준비할 때는 음보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글'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런 '글'은 문어체가 아니라 구어체로 쓰는 게 상식입니다. 그래서 글쓰기가 아니라, '말 쓰기'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글쓰기가 아니라 '말 쓰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음보를 생각하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말 쓰기'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그리고 '말 쓰기'를 할 때 '음보'를 어떻게 고려하라는 것일까요?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혀 짧은 소리로 고생하셨던 수학 선생님 C을 다시 소환해 보겠습니다. (참고:말소리튜닝 19)

C는 교장이 된 후 공식적인 인사말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원고를 준비합니다.

C가 쓴 초안을 보고, 제가 피드백을 드렸습니다.

전후를 비교해 보세요.


입학식 인사말 원고에서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초안

"사랑하는 신입생 여러분!

오늘은 초등학교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중학교 첫걸음을 시작하는 특별한 날입니다."

피드백 후

"사랑하는 신입생 여러분!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초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중학생으로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아래도 입학식 인사말 원고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초안

"우리 학교는 지성, 인성, 감성, 건강을 조화롭게 갖춘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 교직원이 열정적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피드백 후

"우리 학교는 학생들을 이렇게 키우고 있습니다.


첫째, 학업에 열중하는 학생입니다.

둘째, 예의 바른 학생입니다.

셋째, 친구를 배려할 줄 아는 학생입니다.

넷째,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건강한 학생입니다.


학부모님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잘 지도하겠습니다."


피드백 전후를 비교해 보세요.


첫 번째 차이는 문장의 길이입니다.

초안은 길게 한 문장으로 된 것을, 피드백 후에는 짧게 단문으로 나눴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문장의 배열입니다.

초안은 책 속의 텍스트처럼 길게 수평으로 배열했지만, 피드백 후에는 수직으로 배열했습니다.

눈으로 보기가 더 편합니다. 또 줄이 바뀔 때마다 한숨 돌릴 여유도 생깁니다.


진짜로 3음보 4음보로 읽히는지 볼까요?


"사랑하는/ 신입생 여러분!/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초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중학생으로/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우리 학교는/ 학생들을/ 이렇게 키우고 있습니다./


첫째,/ 학업에 열중하는 학생입니다./

둘째,/ 예의 바른 학생입니다./

셋째,/ 친구를 배려할 줄 아는 학생입니다./

넷째,/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건강한 학생입니다./


학부모님들/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잘 지도하겠습니다."/


음보가 살아있지요?

그래서 우리말 리듬을 살리려면 단문으로 말해야 합니다.

단문으로 말하려면, 주어와 서술어의 거리가 짧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주어와 서술어의 거리가 짧아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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