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태되기 싫다면 다르게 생각하라(1)
창작자에게 가장 위험한 말 중 하나는 무엇일까?
이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모든 것을 '원래 그렇다'라는 틀에 가두고 상상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상상력의 가장 큰 적 중 하나는 고정관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상황(A)을 보고 A밖에 떠올리지 못한다면, 당신의 글은 평생 A만 반복하게 된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기존의 사고를 비틀고, 익숙함을 낯설게 볼 때 탄생한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창작의 세계에서도 "주제 A에 대해선 당연히 A만 써야 한다"는 말과 마주하게 된다.
나 또한 창작품을 나누는 모임을 하다 보면 이런 경험을 종종 한다. 피드백을 주고받는 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A라는 주제를 보고 반드시 A만 써야 한다고 고집한다. A를 보고 A 말고 'ㄱ'을 떠올리는 해석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A와 ㄱ은 각각 영어와 한글의 첫 글자다. 나는 '처음'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변주해 보려는 창작적 시도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해석이 낯설고 불편한 모양이었다.
이렇듯 마치 창작이 아니라 정답을 맞히는 논술 문제처럼 창작품을 다루는 사람을 보면 깜짝 놀라곤 한다. 픽션은 논문이 아니다. 창작은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 가능성을 지평을 넓히는 과정이다.
웹소설은 독자와의 감정 교류와 상상의 확장을 위한 예술이다. 그런데 "그렇게 쓰면 안 된다", "설정은 이렇게만 해야 한다" 같은 말은 상상력의 뿌리를 잘라내는 도끼질과 같다
클리셰를 활용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틀고 섞고 뒤집어보려는 시도에서 진짜 '창작'이 시작된다.
비단 웹소설뿐만이 아니다. 감성 에세이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특별함을 끄집어내는 힘은 바로 '다르게 보는 감각'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라테'라는 말에 누군가는 부드러운 커피의 풍미를 떠올리겠지만, 또 누군가는 전남자친구와의 이별, 혹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주말 아침을 기억해 낼 수도 있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각자 다른 해석을 떠올리는 힘이 바로 창작의 시작점이다. '그 장면(사물)이 당신에겐 무엇처럼 보였는가?'라는 질문에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시는 더 극단적이다. 같은 단어와 사물을 쓰면서도 전혀 새로운 울림을 주는 것이 시의 본질이다. '강'을 보고 누군가는 '생명'을, 또 누군가는 '엄마'를, 혹은 '외계의 강'을 떠올릴 수도 있다. 동일한 개념에서 전혀 다른 상을 떠올리는 이 유연함이야말로 창작자의 자질이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를 '개념적 고착(conceptual fixation)'이라 부른다. 한 번 학습된 사고방식이나 해결 방법에 익숙해지면, 새로운 관점이나 창의적 해결책을 떠올리기 어려워지는 현상이다. 아이디어는 언제나 무(無)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존 개념을 엮고 비트는 '재조합의 기술'에서 비롯된다.
창작자에게 중요한 건 '많이 아는 것'보다 '다르게 보는 능력'이다. 정보는 넘쳐나고, 기술은 AI가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은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어떤 이는 전형적인 비극을 쓰고, 어떤 이는 반전 로맨스를 만든다. 이것이 창작의 힘이며, '상상력'은 결국 그렇게 확장된다.
사람은 자기 수준만큼 상상하고 해석한다. A를 보고도 B, C, 혹은 Z까지 상상해 내는 사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해석의 유연성'을 가진 사람이다.
반대로, 매번 A를 보면 A만 떠오른다면, 그건 결국 A밖에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건, 상상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틀 밖으로 내보내는 연습이 부족한 것이다.
창작이란 결국, 세상의 틀을 믿지 않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누군가 말했듯, '지금 여기의 상식은 과거의 혁신'이었다. 지금은 낯설고 미친 상상처럼 보일지라도, 그 발상이 내일의 트렌드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창작자는 항상 질문해야 한다.
"꼭 이렇게 써야 할까?"
"다르게는 못 할까?"
그 질문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