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그림을 그리듯 후회 없이 살아라
사실 조금 막무가내로 이야기하자면 스무 살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몸뚱아리만 어른인 아이였다. 그땐 솔직히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몰랐고 당연히 내가 무엇을 알아나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정규 교육을 받았지만, 그리고 대학이란 델 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였고, 사회 경험도 아예 없었다. 그런 아이가 뭘 알겠는가?
-둘째딸이 그린 그림(마치 스무 살의 내 모습 같다)
우리 사회 특성상 액티비티 기회가 없고 사회 참여 활동도 전혀 주어지지 않으니 내가 가진 것이라곤 학교에 대한 기억, 그리고 가족과의 생활이 남긴 유산 정도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대책 없이 큰 것이다.
나는 교회를 다닌 덕분에 기타를 좀 칠 줄 알았고, 피아노도 약간 다룰 줄 알았다. 이는 순전히 독학이었는데 음악에 아주 조금 재능이 있기도 했던 것 같다.
대학교 2학년이 됐을 때 남자 학우들은 하나둘 군에 입대했고 나는 군 입대를 미루고 있었는데 그때 조그마한 주점에서 통기타 가수 생활이란 걸 시작했다. 나름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박수를 쳐 주고 휘파람을 불어주고 말 그대로 음악 감상이란 행위를 나를 통해 한다고 느꼈을 때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매니저는 내가 노래를 끝내고 내려올 때마다 '오늘 좋았어.' 라며 어깨를 쳐 주었고 시급도 쏠쏠한 편이어서 나는 그 생활에 익숙해졌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안내자가 되어 주지 않았다. 스무 살 이후의 나는 그렇게 홀로 내던져 졌고 이는 마치 드넓은 바다에 버려진 먹다 남은 콜라 캔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나는 어디론가 쓸려가 버려져도 이상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제대 후 친구들은 하나둘씩 취업이란 걸 해서 떠났고, 그때도 나는 홀로 남겨진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무리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채 뒤쳐져 있거나 독립돼 있거나 버려져 있는 존재처럼 굴었다. 그게 편했을 수도 있고 천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나를 변모시킨 것은 독서였다. 어느 순간 손에 잡게 된 책이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고 안내자였으며 스승이 되어 주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거기에서 위로를 얻으며 삶의 방향을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몇 년이 흐르자 진정한 성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해야 할 일 목록 같은 것이 정립되자 나는 머뭇거림이라곤 없이 그것들을 하나하나 실행해 나갔다. 여자친구를 만났고 틈틈이 운동을 했고 계속해서 책을 읽어나갔다.
스물다섯 혹은 스물여섯 즈음에 결정을 내렸다. 작가가 되기로. 로고스(말, 이성, 통로)!! 그것이 내 영혼을 뜨겁게 타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고, 지금까지 그 꿈은 진행형이다. 나는 계속해서 읽고 계속해서 쓰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갈수록 남은 길이 더 깊고 멀고 높다는 것을 체감한다. 그것은 고독하고 힘들고 두려우며 불안한 길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가 알려고만 한다면 언젠가는 발견하고야 마는 생의 본질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감상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으리라마는 나는 감사 외에는 떠올릴 단어가 없다. 내가 우연히 책을 만나고 표지를 열어 단어에 매료되고 그것에 사로잡혀 산 지 20년이 흘렀다.
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썼고 몇 권은 출판되고 몇 권은 출판을 애타게 준비 중이다.
스무 살의 나에게 돌아가 몸뚱아리만 어른인 애송이 시절의 나를 마주 한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모든 게 잘 될 것 같아. 네가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너의 인생은 아마도 어느 정돈 길 테고 너는 어렵지만 그 가운데서 좋은 몇몇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그들과 함께 네 인생을 개척해 나가라. 너는 건강하고 크게 모자라지는 않는 웬만큼의 지능을 소유한 데다 성실하니 나머지는 신께 맡기고 용기있게 전진하자. 솔직히 약간 끔찍할 만큼 고통과 좌절이 널 기다리고 있긴 한데 어쩌랴! 그게 이 빌어먹을 인생이란 것인데 말이야. 넌 그 안에서 종종 행복할 테고 기쁨을 맛볼 수도 있을 거고 때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 거야. 그러니 나아가라. 순간을 즐기며!
솔직히 다시 돌아가라면, 싫을 것 같아. 난 너무 힘들게 살아왔고 내게 주어진 책임을 한 번도 마다하지 않았지. 그건 아주 조금은 무겁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하고 간절히 기도할 때도 있었잖아. 하지만 지름길이나 예비 통로 같은 건 없어. 어차피 우린 끝없는 길을 걸어야 할 운명이고 그 누구도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어!
스무 살의 나여, 그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젊고, 절망과 불안으로 점점이 직조된 희망이 가득하고 수많은 타인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나여, 꿋꿋이 너의 길을 걸어라. 생의 마지막에 '열심히 걸었노라. 후회 없이 달렸노라. 이제는 쉼이 내 영혼을 구원하리.'라고 말할 그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