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 전공의, 수련의, 의대 교수 등 소위 의사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 이들의 집단 행동을 보고 경악했다. 이는 매우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자, 민감한 이야기이리라. 그러나 내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정부의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고 비합리적인 의사 결정, 정책 결정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 문제의 본질, 의대 정원 확대 사안의 본질은 공공성이며, 이번 사태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우리사회 엘리트, 특권층의 너무나 천박한 생각, 공통의식, 집단이기주의라고 생각한다.
의사라는 사람들의 특권의식, 집단 이기주의
엘리트, 특권층의 이기주의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들의 신념은 능력주의에 기반한다. 한 마디로 이것이다. '나의 능력으로 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 한 문장이 능력주의의 핵심 개념이다. 능력주의는 모든 것을 '능력의 결과'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나의 돈, 부, 직업, 명예, 권력 등이 전부 나의 노력, 나의 능력의 결과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내가 언론사 시험을 칠 때, 경쟁률은 보통 50대 1, 100대 1을 넘었다. 누군 붙고, 누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합격했으나, 불합격한 경쟁자들이 나보다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동시에 나의 능력이 그들 불합격자들보다 현저하게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험이란 제도는 그런 것이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주긴 하나 공정하다는 근거는 빈약한 것이다.
인생이란, 우리 생각보다 행운이란 요소가 크게 작동하는 게임이다. 사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는가, 하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받게 될 임금의 50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연구가 있다. 같은 '나'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독일에서 태어나는 것과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운명을 가져다주는 요소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 못지않게 누구의 자녀로 태어나는가, 즉 나의 부모 혹은 혈통 또한 나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삶이란 출발부터 볼공평하다. 시작점부터, 탄생 시점부터 행운이란 요소가 따라붙는다. 능력주의란 그저 가짜 신화에 불과하다, 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보기엔 불공평한 요소가 너무 많고 너무 깊이 우리 삶에 개입된다.
사람들이 보통 능력주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하는 입시 역시 다르지 않다. 서울대 신입생들의 절반 가까이가 서울 내 특정 구 출신이란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이 누구의 자녀인가, 그의 부모의 능력이 어떠한가, 에 실질적으로 좌우되는 것이 입시라고 말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전교 1등 한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시길 바라시나요, 아니면 전교 30등 의사에게 진료 받기 원하나요?"
이 한 마디에 '뜨악' 했다.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하며 내세운 논리들은 내 마음을 전혀 흔들지 못했다. 왜일까? 그들의 주장은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공공성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어떤 의사가 전교 1등을 했건, 서울대를 나왔건,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나의 질병을 낫게 해주길 바랄 뿐이다.
천박한 엘리트주의, 특권층 마인드는 사회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지금 우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인간은 늘 사람들을 분류하고, 계급을 나누고, 자신의 본질이 아니라 자신의 계급, 직업, 혈통 등으로 자신을 말하려 하는 본능을 보였다. 그러니, 내가 의사다, 나 서울대 나왔어, 나 누구야, 라고 말하며 거들먹거리는 것은 인간 본능의 영역이다. 이러한 본능을 제어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겸손함을 갖고 타인과 협력하고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은 매우 수준 높은 도덕의 영역이다.
우리사회는 해방 후 경쟁사회였으나, 더 이상은 이러한 경쟁만으로 사회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우리는 도덕과 윤리, 공공성, 연대, 타인과의 협력이란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능력주의가 아니라 협력, 공존을 가르쳐야 한다. 나의 능력만큼이나 타인의 능력을 인정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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