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1
소문대로 여름이 되기 전에 ‘주식회사 동영’은 정리해고자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이 발표되자 사원들은 먼저 자신의 이름부터 살폈다. 개 같은 세상…. 명단에 오른 사원들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소문은 비단 어제오늘 나돌던 게 아니었다. 음성 공장을 매각한다는 설이 나돌 때부터 떠돌던 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재작년부터 재벌급 제지회사와 대형 제약회사가 동일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본사 재정부에서 금융을 비롯한 자금 업무를 맡았던 백 차장이 회삿돈을 몰래 빼돌렸다가 발각되어 쇠고랑을 찬 뒤부터는 더 흉흉해졌다. 빼돌린 금액이 처음엔 이십팔억이라고 했으나 올해 들어와서는 어느새 일백억이 넘는다는 소문이었다. 몇 달 전에 시행된 구조조정은 정리해고를 위한 전조라고 할 수 있었다. 명예퇴직을 원하는 사원을 우대한다는 조건도 그것을 전제로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명단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15년 넘게 몸담았던 자리를 비우라니,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점보 롤이나 핸드타올, 냅킨, 미용티슈, 두루마리 화장지 등을 들고 할인 매장이나 기업체, 선물 코너 등을 땀 흘리며 동분서주하던 내 모습이 순간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를 제외한 사원들은 사실 구조조정이 발표되기 전부터 회사의 앞날을 점치면서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정리해고를 예상한 몇몇 사원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상사에게 빌붙어 더욱더 충견 노릇을 했고, 또 몇몇은 일찌감치 명예퇴직자로 위로금과 퇴직금 등을 받고 자리를 떴으며, 또 더러는 떠나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떠나고 싶어도 받아 주는 곳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을 맞았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후자에서도 후자에 속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나는 설마 그런 사달이 있었다고 창립된 지 40년이 넘은 제조회사가 문을 닫겠어, 하다가 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특히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맡은 일만 열심히 하라고, 공언하던 공 이사의 호언장담이 한 몫을 차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게시판에 공고가 나붙자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을 통감하며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50이 넘은 나이라면 경력사원은 몰라도 이력서 들고 눈치 보며 찾아다니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순간, 실직한 뒤 백수 신세로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추레한 내 몰골이 눈앞을 스쳤다. 듣기로는 음성에 있는 공장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판매실적을 놓고 그동안 암암리에 경쟁하던 영업1과 박 과장과의 싸움도 필요 없게 된 셈이었다. 그도 그것을 느낀 듯 사물을 정리하다가 내 눈과 마주치자 쿡, 하고 힘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와의 싸움은 끝났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더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으면 아내는 뭐라고 할까. 박 과장을 건너다보면서 책상에 망연히 앉아 있던 나는 잠시 아내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분명한 것은 머리 맞대고 어찌할까 앞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 성미에 악다구니를 써 가며 볶아댈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박 과장이 철야 농성하는 음성 공장의 생산직 사원들과 합류하기 위해 내려간다고 하자 나도 슬그머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럴까. 아침이면 장터같이 떠들썩하던 본사 사무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회사가 배려 차원에서 지급한 퇴직금과 위로금, 그리고 3개월분의 급료 등등,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 통장에 입금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 또한 법적으로 그어 놓은 하한선이기는 하지만….
과장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의자에 앉아 있던 영업2과의 심 대리가 자판기 커피를 홀짝거리며 물었다.
글쎄….
나는 대꾸를 미룬 채 사장실을 돌아다보았다. 불이 꺼진 사장실은 조용했다.
저는 내일 박 과장님과 함께 내려갈 거예요.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지 않습니까? 근데, 왜 자기들 마음대로 문을 닫는 겁니까?
그는 내가 손을 내밀자 자주 연락하겠다고 하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맞잡은 그의 손은 의외로 뜨겁고 힘이 있었다.
(다음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