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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내가 얼마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고 있는데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by 해달

“보아하니 돈도 많아 보이던데, 너한테 하나도 안 쓰는 거야? 어떻게 흔한 목걸이 하나가 없어? 너 설마, 책잡혔니?”



수현이 대답 없이 찬장에서 위스키를 꺼내 들었다.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가 술을 마시는 경우는 딱 두 가지였다.


배불뚝이가 오피스텔에 오는 날, 그리고 송미호가 들이닥치는 날.


아무리 멘탈이 강하다지만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상대할 수 없는 수현이었다. 그녀는 이가인이 아니었다.


수현이 입에 댄 술병을 기울이자 왈칵 쏟아지는 씁쓰름한 알코올이 그녀의 입안에 맴돌고 있던 독설을 잡아끌며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왜 말이 없어? 주는 거 하나 없이 그놈이 너 협박하디?”



무슨 영문인지 잔뜩 화가 오른 송미호가 다가오자 수현이 손을 뻗었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러자 멈칫한 송미호가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데?”

“아니, 젊은 년 데리고 즐겼으면 대가가 있어야지. 명품 살 줄 모르면 돈이라도 뿌리든가.”

“…….”

“혹시, 돈으로 받았어?”

“하! 하하. 하하하하!”



분수처럼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고개를 꺾은 수현이 애써 큰 소리로 웃었다. 눈꺼풀이 뜨거워지는 게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허무한 감정이었다. 그런 수현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송미호가 이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명품 대신 돈을 받았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정색한 수현이 송미호를 노려봤다.



“내 뒷조사하면 끝이 좋지 않을 텐데, 왜 그랬어?”

“네가 고분고분하질 않잖아! 그러니 뭐라도 잡고 있어야 네가 얌전히 굴지.”

“하! 잡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나가.”



지갑에서 오만 원 권 몇 장을 꺼내든 수현이 바닥에 내던졌다. 지낼 곳도 없을 만큼 수중에 현금이 바닥나 찾아왔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었다. 돈이 흩어지자 눈이 번뜩인 송미호가 냉큼 허리를 숙여 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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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회사 경비실, 알지?!”

“…….”

“좀 많이 넣어놓으면 내 얼굴 6개월마다 안 봐도 되잖아. 이렇게 질색하면서.”

“그래서, 얼마를 원하는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눈알을 굴려가며 얼마를 뜯어낼지 계산중인 나름 신중한 송미호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지 몹시 들뜬 얼굴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중이었다.



“……6천?”

“그 정도면 얼마나 내 앞에 안 나타날 건데?”

“일 년. 뭐, 고정적으로 준다면야 영원히 안 나타날 수도 있고.”



다시 술병을 집어든 수현이 병을 기울였다. 평소에는 구토를 유발하던 술맛이 오늘은 혀끝에 착착 감기는 게 마치 수현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같았다.



“만약, 내가 거절하면?”

“뭐?”



잔뜩 부풀어있던 송미호의 얼굴이 이내 앙칼진 구미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난 너한테 안 매달려. 바로 그 아저씨 찾아가지. 보니까 그 집 사모님도 한 성깔 하게 생겼던데.”



조용히 뚜껑을 닫은 수현이 차분히 찬장 안에 술병을 넣었다. 배불뚝이 직업이 뭔지도 모르고 나불대는 시끄러운 잡음에 살짝 미간을 찡그린 후였다.



“삼백. 그 이상은 기대하지 마.”

“뭐? 삼백? 너 미쳤어?!”

“미치긴. 내가 얼마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고 있는데.”

“이제까지 2천은 줬잖아! 6천 주기 싫으면 2천이라도 보내.”

“누가 보면 돈 맡겨 놓은 줄 알겠네.”

“기어이 네년 더러운 짓거리가 만천하에 드러나야 정신 차리지?!”

“흥! 마음대로 해보시지.”



따가운 송미호의 눈총에도 수현은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순간 송미호가 반색했다.



“참! 재벌가 손녀 이가인이 네 상사였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탁! 송미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든 수현이 그녀의 양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아아! 이년이! 이거 안 놔?!”

“다시는 그 더러운 입에서 대표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알겠어?!”



당장이라도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수현의 뒤집힌 눈빛에 송미호가 발톱을 넣었다.



“아! 아, 알겠다고. 그러니까 이것 좀 놔!”



겁먹은 송미호에 그제야 손을 내린 수현이 뒤돌아섰다.



“삼백이야. 나가.”



못내 아쉬운 듯 소파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챙긴 송미호가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근데 왜, 삼백이야?”



뭔가 억울했는지 꼬리를 내리면서도 되묻는 생모의 음성에 수현이 돌아섰다.



“……미처 다 쓰지 못할 것 같아서.”



송미호는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은 채 곧장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가인과 재림, 수현은 서로 다른 시간 속 같은 아침을 맞이했다.



***



과학수사대가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평창동 가인의 저택에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모여들긴 했지만 철저한 비공개수사 및 취재 불허로 저택에 도둑이 들었었다는 사실 말고는 어떤 것도 기사화되지 못했다.


1차 현장 감식결과, 경찰은 도둑을 가장한 원한관계를 가진 인물을 범인으로 추정했다. 만약 그 시각 가인이 집에 머물렀다면 끔찍한 가상 살인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만큼 경찰 또한 이번 사건을 단순범죄로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다만 연쇄살인과 관련해서는 다소 거리를 두는 모양새였다.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한 범인의 수작이라는 게 경찰 측 시각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하겠다는 기본방침에는 변함이 없음을 밝혀왔다.


한편 다시 경찰서에 불려 간 가인은 근래 금전 및 건물, 혹은 재단과 관련해 다툼이 있었거나 앙심을 품을 만한 인물이 있었는지 물어오는 경찰에 짐작 가는 이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살짝 난감을 표한 경찰은 잠시 후, 마치 태엽을 감듯 시간을 돌려 그녀를 먼 과거 속으로 이동시켰다.



“과거 이가인 씨나 부모님, 혹은 미래유통과 관련해 원한을 가질 만한 인물은 없었습니까?”

“……부모님이요?”

“네. 아주 오래전부터 쌓인 앙금이 종종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잘 생각해 보시죠.”



경찰의 냉정한 눈빛이 가인을 향했다. 올바른 수사방향을 위해 경찰로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가인의 과거였다.


가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시절을 떠올린다는 건 그녀에게 고문과도 같은 고통이었지만 만약 범인을 찾지 못한다면 가인이 처한 현실 또한 고문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


경찰은 침묵했고 가만히 눈을 감은 가인은 곧, 모든 게 산산조각 났던 과거 속으로 들어갔다.


5년, 10년, 15년…… 시간이 지날수록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가인의 얼굴에 점차 고통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헉헉…… 헉헉…….”

“괜찮으십니까? 이가인 씨!”

“……네. 저는…… 괜찮…….”



쿵!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진 가인이 실신하자 경찰이 곧장 그녀를 병원으로 이송했다.



**



3시간 후.


겨우 안정을 찾은 가인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의사는 그녀가 피로누적과 함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일시적 쇼크가 온 것으로 진단했다. 되돌릴 수 없는 좋은 기억만 떠올려도 가슴이 아릴 지난 과거에 애써 나쁜 기억을 떠올리려 했던 게 강한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한 거였다.


주치의 진단에 경찰은 난감해했다. 가상 살인이 실제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정황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힘겨워하는 가인을 닦달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회의 끝에 경찰은 일부 친인척을 비롯해 재단관련자 및 종종 가인 집에 드나들었던 영원과 수현을 불러 급한 대로 조사를 마쳤다.



*



저녁때가 되어서야 눈을 뜬 가인 앞에 가장 먼저 보인 건 재림이었다.



“잘 잤어요?”



차분히 물어오는 재림에 가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마음이 평온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너그러운 미소까지…… 모든 게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가인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병원에 왔다는 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가상 살인사건 다음날, 기사가 보도된 후 가인에게 연락을 해온 재림에 그녀는 단순 도둑이라 일축하며 재림을 안심시켰다. 행여 범인이 잡히더라도 재림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재림이 병실에 있는 지금, 가인의 두 눈이 커진 이유였다.



“아니, 어떻게…….”



가인이 당황한 사이 병실 문이 열리며 영원이 들어왔다.



“내가 불렀어. 도영이한테 연락처 물어봐서.”

“과로로 쓰러졌다는 전화받고 제가 오겠다고 우겼어요. 혹시, 제가 불편한가요?”



어리둥절한 가인과 근심 가득한 눈으로 가인을 바라보는 영원에 분위기를 살피던 재림이 나섰다.



“아니요. 와주셔서 고마워요.”

“거봐! 내가 부르길 잘했지?!”



기세등등해진 영원이 마침 몸을 일으킨 가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이제 퇴원해도 될 것 같아.”

“그런 소리 마! 호텔에 혼자 있느니 여기가 낫지. 너 그러다 또 쓰러진다!”



보호자인 양 으름장을 놓는 영원에 미소를 보인 가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데, 수현이는 어디 갔어?”



함께 경찰서에 갔던 수현이 보이지 않자 가인이 물었다.



“공 선생님 오시고 내가 집으로 보냈어. 너 때문에 그런지 걱정이 많아 보이더라고.”

“……잘했어.”



이불을 걷어내며 가인이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렸다.



“퇴원해야겠어. 수속처리 좀 해줄래?”

“정말, 괜찮겠어?”

“응. 여기보단 호텔이 심적으로 더 편해.”



퇴원을 서두르는 가인에 재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좀 더 있으라는 말도 괜찮겠냐는 말도 굳이 묻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주치의만 한 번 더 보고 가요. 퇴원수속은 제가 할게요.”



재림이 병실을 나가자 지켜보고 있던 영원이 설레발을 쳤다.



“공 선생님, 보통 아니야.”

“뭐가?”

“전화해서 너 쓰러졌다니까 진짜 무슨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였다니까. 당장 오겠다고.”

“그랬어?”



뜻밖이었으나 가인은 침착했다. 노숙자와 유기견에게 보였던 그의 정성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렇다니까. 오라 마라 할 틈이 없었어. 근데 너 안정시키겠다고 정작 네 앞에서는 세상 침착하잖아. 진짜 멋있다!”



가인에게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한 만큼 영원은 가인을 위해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근데, 공 선생님한테 어디까지 얘기했어?”

“경찰서에서 쓰러졌다고만 했어. 범인 찾는 게 쉽지 않아서 애 좀 먹고 있다고.”

“구체적인 얘기는 안 한 거지?”



재차 물어오는 가인에 영원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전에 없던 초조한 눈빛이 가인은 범인을 잡는 것보다 그녀 집에서 벌어진 가상 살인을 재림이 알고 있을까 우려하는 듯했다.



“걱정 마. 꺼내지도 않았지만 물어오지도 않았으니까.”

“고마워. 신경 써줘서…….”

“뭘 그런 걸 가지고. 아무튼 범인이나 빨리 잡혔으면 좋겠다!”

“……그러게.”

“이거 해결되면 공 선생님과 진지하게 잘해봐. 이제 그 집에 너 혼자는 위험해.”

“…….”



생각이 많아진 듯 가인은 말이 없었고 영원은 조용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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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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