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호텔.
두툼한 흰 가운을 걸친 가인이 욕실을 나왔다. 말리고 나온 머리가 찰랑거리며 물에 빠진 쥐새끼 같았던 몰골이 이제야 제 모습을 찾은 듯했다.
한결 풀린 피로에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든 가인이 전경이 보이는 유리창 앞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지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폭풍 같은 시간이었다.
가만히 전경을 바라보던 가인이 조용히 맥주를 삼켰다. 그녀에게는 잠이 올 리 없는 밤이었다.
“하루가 이렇게 끝날 줄이야…….”
가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제는 그녀가 오래도록 되새기고 싶던 재림과의 추억이 깃든 하루였다.
그런데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라 했던가? 그토록 좋았던 하루가 한순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 되어버렸다.
해가 뜰 무렵인지 호텔 밖 도로에는 꽤 많은 차량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가인이 천천히 어제 일을 곱씹었다.
경찰은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면 비공개수사를 결정했다. 따라서 오늘 뉴스에는 가인의 저택에 도둑이 들었다는 짤막한 기사만 보도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사실 가인은 그것조차 원치 않았었다. 그러나 집 앞에 이미 두 대의 경찰차가 서있었던 데다 당분간 끊임없이 드나들 형사들의 노출에 무조건 숨긴다는 건 오히려 일을 크게 만들 뿐이었다.
“내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 누굴까?”
가인이 생각에 잠겼다. 물론 호시탐탐 재산을 노리는 친인척들을 가인은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교통사고로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 되지 않아 친할아버지였던 이강수 회장마저 세상을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그들은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가족’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형성된 관계인만큼 친인척들의 접근은 매우 친근하고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중학교 때 캐나다로 유학을 떠난 가인에게 있어 그들은 낯선 주변인이나 다름없었다.
살갑게 다가온 친인척들은 그녀를 돕겠다는 명목 하에 회사 내 자리를 요구했다. 그런 가운데 엄청난 스펙의 맞선남들 사진을 가인 앞에 들이밀기도 했었다.
갑작스러운 부모의 부재에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해 사회경험이 전무한 가인이 꽤나 위태로워 보였는지 회사일보다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휴양을 권유하는 먼 친척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살가운 가족의 손길에 가인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 속내가 뻔히 보였던 탓이었다.
회사를 매각하게 된 과정 가운데 그녀에게 달라붙는 거머리들의 퇴치도 이유 중 하나였다. 성장가치가 충분한 미래유통을 매각했다는 사실에 여전히 이를 갈고 있을 게 뻔할 테니.
그럼에도 가인은 이번 사건이 친인척들의 짓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물론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녀가 죽기를 바라고 있을 터였다. 행여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서를 남길까 매사 노심초사하고 있는 무리들이니까.
가인은 그런 무리들이 만천하에 공개될 범죄현장 따위를 만들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고작 이런 방식으로 쉽게 속내를 드러낼 순진한 사냥꾼들이 아니었으니.
상상 이상의 거액을 탐내는 탐욕가들은 대게 일을 크게 벌이지 않는다. 다만 완전범죄를 위해 사고를 위장한 완벽한 사건을 모의할 뿐.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불시의 사고,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방식이며 가장 손쉬운 위장이 교통사고다.
평생 쉼 없이 일해도 만져보지 못할 현금을 쥐어주면 기꺼이 전과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사방에 깔려있으니.
고의적인 교통사고가 아닌 것으로 판결이 나면 설령 피해자가 사망했다 하더라도 형량이 가벼운 이 나라의 악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게다가 피해자 유족이 합의를 할 경우 형량은 더더욱 줄어든다.
이미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갖기 위해 악법을 이용하고 가져본 적이 없는 자들은 가져보기 위해 기꺼이 인생의 일부를 헌납한다.
언제나 그래왔듯 돈이 법 위에 있는 세상이니까.
가인은 그 법을 ‘악법’이라 여기고 있었다. 순기능 보다 역기능이 앞선 법은 모두 악법이라 불리는 게 맞았다.
다만 정황상 벌써부터 겁을 줄 친인척 어른들은 아니라는 게 가인의 생각이었다.
그녀가 유서를 쓰고 변호사에게 공증을 받는 날에서야 그들의 움직임이 바빠질 테니. 친인척들이 범인일 리 없었다.
탐욕가들이 용의 선상에서 빠지자 다음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대상은 연쇄살인범이었다. 하지만 이내 어처구니없는 웃음과 함께 가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흉내 낸 것 치고는 너무 어설펐어.”
가인이 연쇄살인마가 범인이 아니라고 여긴 건 살해방법이었다.
이제껏 보도된 바, 연쇄살인마는 늘 주사기로 독을 주입해 대상을 살해하고 있었다. 고로 가인의 저택에서 일어난 가상 살인사건이 만약 연쇄살인범의 예고장이라면 가슴에 꽂힌 칼이 아닌 주사기가 꽂혀있어야 했다. 가인이 깊이 고려할 대상이 아니라고 여긴 이유였다.
‘틀림없이 아니야.’
캔맥주를 비우자 침대로 걸어간 가인이 머리맡 쿠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자 그녀는 곧장 재림을 떠올렸다.
사실 가인은 재림을 보내기 전, 그에게 집을 소개해줄까 잠깐 고민했었다. 매번 집 앞까지 와서는 그냥 보내는 게 늘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망설인 자신을 칭찬했다. 만약 재림이 그 현장을 목격했다면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없었을 테니까.
“다행이야. 정말…….”
안도의 숨을 내쉰 가인이 폰을 집어 들었다.
***
오피스텔.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우린 피가 섞인 가족이야. 내가 늙고 병들면 너한테 부양의무가 있다는 거, 몰라?”
마치 비웃듯 송미호가 일침을 날렸다. 누가 들어도 모녀간의 대화가 아니었다.
수현과 송미호는 거래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 가운데 수현은 화가 나있었다. 저 여자가 날을 잘 잡았다는 생각이었다. 때문에 밤새 신경전을 벌이며 근본 없는 갑질에 응징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그녀는 무척 피곤했다. 무려 2주 만에 느낀 본능적 수면 욕구가 아직 남아있던 거였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리고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마. 다음은 없어.”
피로를 느낀 수현이 뒤늦게 재킷을 벗었다. 빨리 나가라는 송미호를 향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치 자신의 집인 양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꼬고 앉은 송미호에게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너, 나이 많은 아저씨랑 불륜관계지?”
“…….”
잠시 멈칫했던 수현이 재킷을 조용히 식탁 의자에 걸쳤다. 송미호를 만난 이후 가장 차분한 순간이었다.
“어설프긴. 그런 식으로 사기를 치니까 꼬리가 잡히지. 난 지금이라도 당신, 신고할 수 있어.”
“무뚝뚝하긴 해도 네가 나를 닮아서 얼굴은 좀 봐줄만하지.”
지명수배 중인 생모를 신고할 수 있다는 협박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현은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미치도록…….
5년 전, 가인이 처음 수현의 부모님이라며 내민 사진을 본 순간 수현은 숨이 멎을 뻔했다.
쌍꺼풀 진 눈매 끝이 살짝 올라간 여우 같은 눈에 작지만 뾰족한 코, 얇은 입술에 입꼬리가 일자로 뻗은 입모양까지…… 놀랍도록 닮은 송미호와 수현의 외모 때문이었다. 굳이 부친과의 닮은꼴이라면 그저 약간의 곱슬을 띄고 있는 모발과 까무잡잡한 피부색정도였을 뿐.
그때 수현은 깨달았다. 축복받지 못한 자신의 운명에 신이 저주를 내렸거나 혹은 사악한 악마가 장난질을 쳤음을.
사진을 본 이후 수현은 심각하게 성형수술을 고려하기도 했었다. 심지어 수술예약에 수술대 위에 눕기까지 했었으니.
그런데 마취 직전, 수현은 병원을 뛰쳐나왔다. 어렴풋 친할머니의 앳된 시절과 똑같다던 동네 어르신 말씀을 기억해 낸 탓이었다.
‘나는 송미호가 아니라 친할머니를 닮은 거야.’
병원을 나온 수현이 거울을 보며 자신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년 전, 처음 송미호가 수현을 찾아왔을 때 수현은 아주 자그마한 기대를 걸었었다.
지난날 자식을 버린 것에 대해 혹시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아니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진 않을까 싶은…….
수현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핏줄이라는 그리움이 송미호의 등장으로 인해 불쑥 고개를 든 거였다. 그러나 소수점만 한 그녀의 기대는 첫마디부터 산산조각이 났다.
“너, 돈 좀 있지?”
25년 만에 딸을 찾은 생모의 목적을 알아버린 순간, 수현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마구 때렸다. 이런 여자에게 잠깐이나마 그리움을 느꼈던 자신에 대한 증오였다.
차라리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남겨두었을지도 모를 막연한 연민…… 어쩌면 애증이었다.
그런 딸에게 송미호는 작은 감정의 여운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수현은 깨달았다.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게 지난날을 곱씹으며 수현이 침묵하는 사이 소파에서 일어난 송미호가 곳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사실상 가져갈만한 게 있는지 대놓고 도둑질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송미호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6개월 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살림살이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희번덕거리는 송미호의 눈빛이 수현을 향했다.
값나가는 액세서리나 명품, 값비싼 그림 하나 없는 형편이라면 수현에게 돈이라도 더 뜯어내야겠다는 심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