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퇴원수속을 마친 재림과 가인, 영원이 병원을 나섰다. 재림은 가장 먼저 가인을 호텔에 데려다주었고 재림을 대신해 영원이 가인과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영원이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재림 차에 올라탔다.
“가인 씨는 좀 어떤가요?”
“많이 안정되긴 했지만 범인을 찾기 전까지 안심하진 못할 거예요.”
“그렇겠죠.”
“참! 가인이한테는 공 선생님이 아는 게 없다고 했어요. 선생님이 다 알고 계실까 봐 걱정하더라고요.”
“네. 근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요?”
안개가 자욱한 숲 속에 놓인 것 같은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집, 그것도 침대 위에서 처참히 살해된 자신을 본 당사자라면 가인이 아닌 그 누구라도 공포에 휩싸였을 터였다.
그럼에도 여리게만 보였던 가인의 행보는 꽤 담대했다. 사건 다음날 그녀는 교회를 갔고 월요일 정상출근을 했으며 일정 및 직원들 경조사까지 챙겨가며 담담히 경찰조사에 협조하고 있었으니까. 가인은 늘 그래왔듯 감정을 숨긴 채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재단 관련 모든 자금 내역은 투명했고 평소 인맥 쌓기에 취미가 없는 그녀는 이런 원한이 쌓일 만큼 친밀한 관계가 없었다.
다만 영원이 우려하는 건 그녀가 가인을 알기 전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가인의 남동생이 실종되었다는 것과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누구나 알고 있는 표면적 사실 말고는 영원이 가인의 과거를 들여다볼 방법은 없었다.
그런 영원의 우려에 재림 또한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다.
수현이 촬영해 둔 현장 영상을 본 재림은 결코 가벼이 넘길 사안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비규환이 된 집안은 차치하더라도 가인의 방 침실 위에 남긴 흔적은 범인이 왜 가인의 저택을 침입했는지, 그 목적을 뚜렷이 했으니까.
영상을 본 직후 재림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누군가 그녀가 죽기를 바라고 있다.’
시동을 거는 재림에 생각에 잠겼던 영원이 대답했다.
“추측이지만 재단설립 이전에 쌓인 앙금이 아닌가 싶어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말끝을 흐린 재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범인은 실행에 옮길 겁니다.”
***
일주일 후.
현장조사가 끝난 가인의 저택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거실 바닥을 시작으로 벽, 주방 및 가구까지…… 훼손된 모든 것을 복구하는 공사였다.
다만 돼지 피가 낭자한 살인예고장과 영원의 권유에도 가인은 내부 cctv를 설치하지 않았다. 집안에서조차 누군가의 시선에 감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영 내키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건 범인을 잡지 못한 가운데서도 가인이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그녀는 딱히 불안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인에게 유일하게 달라진 게 있었다. 바로 재림과 거리를 둔 거였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았다. 잘 숨겨둔 불안한 감정을 행여 들킬까 싶어서였다.
재림 또한 무슨 영문인지 딱히 가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근래 굵직했던 사건사고들에 대한 중간수사 결과가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한 듯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배우 지경하 살인사건에 대한 용의자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경찰은 지 씨 빌라에 침입해 명품 및 현금을 훔쳐 달아난 배 씨를 유력한 살해용의자로 지목했으나 결국 살해 증거를 찾지 못했다.
캐스팅을 가로챘다는 이유로 폭행 및 협박을 사주했던 배우 문 씨와 이를 사주받아 지 씨 집에 침입한 배 씨는 현재 각각 폭행교사와 절도죄로 구속 수감된 채 재판을 준비 중이었다.
이에 대해 경찰은 여전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 중이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 이렇다 할 진전이나 확보한 증거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직접 단상 앞에 선 서울경찰청장이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살인마의 세 번째 피해자인 악플러 최 씨의 죽음 이후 아직까지 새로운 사건은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살해 장소가 평창동에서 신정동으로 옮겨간 만큼 서울시내 어디서든 네 번째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시민들의 공포는 나날이 커지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용의자 확보, 독극물 성분분석, 살해동기 등 수사에 이렇다 할 진전이 없자 무능한 경찰이라는 여론이 확산되며 신뢰가 바닥을 치자 경찰청장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청장은 연쇄살인범의 동선을 추적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입장문으로 서두를 열었다.
범인은 cctv 카메라의 사각지대를 매우 명확히 알고 있으며 일부는 cctv를 해킹, 조작한 흔적도 확인됐다고 했다.
또한 시신을 훼손한 것 말고는 범행 현장에 일체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범인은 매우 치밀하며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장은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된 세 피해자들의 주변인물 및 연관성을 면밀히 조사했지만 접점이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카메라 앞에 선 그는 매우 솔직했다.
시민들에게 괜한 설레발로 안심의 여지를 주었다가 자칫 네 번째 피해자가 발생하는 순간 그 책임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청장은 아직 용의자를 특정하지는 못했지만 점차 구체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범인은 단독범으로 행동이 민첩하며 신종 독극물을 이용해 살해하는 방식이 그 분야에 고도의 지식을 가진 전문가이자 범행을 위한 가면적 친화력이 높은 유형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들의 성별과 나이, 직업과 환경 등 공통점이 없는 점을 고려해 도출해 낸 결론이었다.
반면 살해수법이 매우 극단적이고 시신 훼손과 함께 표식을 남기는 것으로 보아 범인은 살인 자체를 즐기고 있으며 사이코패스 성향이 높은 지능형 연쇄살인범일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엄청난 수사 인력이 범인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재차 피력하며 여전히 대한민국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살인범에 대한 경고와 함께 낯선 사람의 접근을 경계하고 문단속을 철저히 해줄 것을 시민들에게 당부했다.
더불어 경찰에 대한 모든 비난은 그 책임을 지고 있는 자신이 받겠다는 말로 발표를 마쳤다.
‘이제 기사가 나오려나?’
컨디션 난조로 일찍 퇴근한 가인이 호텔 소파에 앉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중간수사 발표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가인의 얼굴은 무척 어두웠다. 감기기운이 있는 듯 약한 미열에 으슬으슬 몸을 떨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찍 잠을 청하는 대신 볼륨을 키운 뉴스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지명수배자 차진수가 필리핀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곧 보도될 터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가인은 지경하 사건도 연쇄살인범에 대한 수사 보고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차진수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녀는 온 신경이 곤두섰다.
“28년 간 잘도 숨어 살았네.”
가인이 중얼거리는 사이 아나운서의 입에서 차진수가 언급됐다.
28년 전 놀이공원에서 유치원생 이모 양을 유괴살해한 후 그 가족을 협박했던 세 용의자 가운데 하나였다.
유괴된 아이는 가인의 친구 이소원, 세 용의자는 차진수, 전유정, 배승원이었다.
당시 미래유통 손녀가 아닌 중학교 도덕교사 딸을 유괴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유괴범들은 자체 난투극을 벌였고 결국 전유정과 배승원을 살해한 차진수는 필리핀 밀항에 성공한 후 종적을 감추었다. 그렇게 꽁꽁 숨어버린 차진수를 경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무려 28년 만에 검거한 거였다.
tv 화면 속 차진수 사진이 공개되자 가인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공개된 사진 속 차진수는 그 옛날 6살 가인이 기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50대 중반이 넘어선 차진수의 몰골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포승줄에 묶인 채 송환된 그는 양쪽에서 그의 팔을 잡고 있는 형사들에 의지해 겨우 버티고 있는 듯했다.
헝클어진 흰 머리카락은 어느새 세월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술과 마약에 찌든 눈은 이미 초점을 잃지 오래돼 보였다.
20대의 건장했던 몸도 그새 삐쩍 마른 약골이 되어있었다. 돈을 잃고 필리핀 노름판에서도 쫓겨나 갈 곳이 없었던 듯 너덜너덜해진 옷가지가 그간의 생활을 짐작케 했다.
사실 8년 전, 가인은 차진수로부터 협박을 받았었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된 비운의 상속녀 기사로 전국이 떠들썩하자 필리핀에 있던 놈의 귀까지 들어간 거였다.
익명의 우편으로 전달된 차진수의 편지에는 28년 전 이소원 유괴사건과 관련해 진실을 은폐한 가인의 실체를 밝히겠다며 조용히 살고 싶다면 자신의 요구대로 따르라는 협박문이 쓰여 있었다.
놈의 요구는 단순했다.
「돈」
협박 편지를 받았을 당시 가인은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 일에 관해 상의할 그 누구도 곁에 남아있지 않았던 탓이었다.
가인은 결국 차진수가 꿈꿨던 한탕의 꿈을 이뤄주었다. 그런데 8년 만에 그 많은 돈을 다 잃은 차진수는 거지꼴이 되어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됐다.
차진수가 검거된 건 정말 잘된 일이었다. 28년 전 사건의 진실이 곧 밝혀질 테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사실이 가인을 불편하게 했다.
만약 차진수로부터 당시 이소원을 유괴범에게 데려온 장본인이 가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게 뻔했으니까.
조금씩 열이 오르는 가운데 가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음을 자각한 거였다.
그때였다. 아나운서에게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현재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인 차진수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노숙생활을 해왔으며 주기적인 호흡곤란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고 전해졌습니다.”
바짝 상체를 기울였던 가인이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작은 숨을 내쉬었다. 초조했던 가인의 얼굴은 어느새 감정을 숨긴 무표정한 얼굴로 변해있었다.
호텔방 안에는 그녀 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가인은 그 자신에게조차 감정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