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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나라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by 해달 Mar 01. 2025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유입되던 찰나, 사무실 내에 퍼지는 상큼한 유자향이 코를 찔렀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수현이 내려놓은 유자차였다. 찻잔을 내려놓은 수현이 곧 홍나라와 마주 앉았다. 나라가 도착하기 전 가인이 지시한 일이었다.



“오느라 추웠을 텐데 마시면 따뜻할 거야.”



찻잔을 든 가인이 나라의 눈치를 살폈다. 한눈에도 좋아하지 않는 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감사합니다.”



찻잔을 든 홍나라가 빨간 립스틱으로 덮인 입술을 잔에 밀착했다. 하지만 찻잔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사이 가인은 살짝 흘러내린 나라의 흰 니트 소매 사이로 선명한 문신의 일부를 목격했다.



“어떻게, 학업은 적성에 잘 맞니?”

“뭐 그럭저럭요.”

“내년이면 벌써 본과 3학년이지?”

“네.”

“이제 실습 나갈 텐데 잘 따라갈 수 있겠어?”



차분한 가인의 안부에 살짝 지루해 보이는 나라 얼굴에서 간신히 하품을 참고 있는 게 읽혔다.



“네. 머리 쓰는 건 뭐든 자신 있어요.”



5년 전만 해도 적당한 수줍음과 최선을 다하겠다는…… 노력이 필요한 자신을 받아들였던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의 나라는 과거의 그 어떤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불현듯 가인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나라는 그때가 진짜일까? 아니면 지금이 진짜일까……?’



“그런데, 왜 보자고 하셨어요?”



빨리 벗어나고 싶은지 나라가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져갔다. 물어오는 나라에 침묵하던 수현이 나섰다.



“의사면허 취득 후 네가 전공의로 뭘 하고 싶은지 대표님께서 궁금해하셔.”



수현의 말투는 몹시 무미건조했다. 나라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만큼이나.



“그런 건 전화로 물어보셔도 되는데. 면허 따고 전공은 피부과 생각하고 있어요.”

“…….”



예상치 못한 의외의 대답에 양손에 깍지를 끼고 있던 가인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처음 가인이 나라에게 제안했던 전공은 흉부외과였기 때문이었다.



“피부과? 왜?”

“일단 개업할 수 있으니까 돈이 되고 밤 새 가며 수술할 일 없으니까 편하잖아요.”



홀가분한 말투가 나라는 진작 가인의 제안을 잊은 듯했다.


가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상대의 호의와 배려를 권리로 착각한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그런 착오를 대비해 가인이 에둘러 충고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떤 경우든 권리 앞에 의무가 선행되어야 비로소 그 권리가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은 비단 나라뿐 아니라 모든 인간사회에서 적용되는 원칙과 질서였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인간은 그 원칙과 질서를 망각했다.


지금 눈앞의 나라처럼.


나라는 무표정한 가인의 얼굴에 스쳐간 찰나의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만약 그 미소를 보았더라면 나라의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 생각, 잘 들었어. 그런데…….”



가인이 말끝을 흐리자 호기심이 일었는지 게슴츠레한 나라의 시선이 가인을 향했다. 찰나의 틈새를 타고 적막한 공기가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가인이 오늘 홍나라를 불러들인 건 배은망덕한 그녀를 질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네가 클럽에 너무 자주 간다고 하던데, 사실이니?”



순간 하품을 참느라 찔끔 눈물이 고여 있던 나라의 눈빛이 돌변했다.


나라는 당황한 게 아니었다. 화가 난 거였다.



“그 소문의 근원지가 어디죠?”

“사실을 말해주면 나도 사실대로 말할 게.”

“스트레스 받을 때 가끔 친구들과 가요. 저도 풀고 살아야 숨을 쉬죠.”



공감한다는 듯 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조한 수현의 눈빛은 가인만큼 너그럽지 못했지만.



“가끔 간다…… 가서는 주로 뭘 해?”

“뭘, 하냐고요? 풉! 푸하하하!”



실소가 터진 나라의 웃음소리가 사무실 가득 울려 퍼졌다. 수현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나라를 바라봤다.



“아, 죄송해요. 질문이 너무 웃겨서 그만…….”



간신히 웃음을 참는 나라에 수현이 그만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나라는 그런 수현의 눈빛을 무시했다.


나라에게 수현은 그저 한낱 비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야 당연히…… 춤추죠. 그게 제 삶의 유일한 낙인걸요.”

“춤. 그렇구나.”

“그럼 이제 대표님도 말씀해 주세요. 소문의 근원지.”

“여기, 나수현 씨.”



가인의 눈짓에 일순간 어이없어하는 나라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하아, 참 할 일이 없으신가 봐요. 뭐 재단 비서가 딱히 맡은 일도 없겠지만.”

“맞아. 그래서 너 만나려고 퇴근 후 매일 밤 집에 찾아갔는데 매일 없더라.”

“폰은 뒀다 뭐 하세요?”

“대표님이 네가 어떻게 사는지 둘러보고 챙겨주라고 하셨거든”



수현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는지 나라가 웃었다. 결단코 비웃음이었다.



“전문의 따고 개업할 때까지만 후원해 주세요. 그다음부터는 제가 알아서 살아갈게요.”



미리 선을 긋는 나라에 가인이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긴 생각은 필요 없었다. 지금은 가인이 필요하지만 미래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였으니까.


나라가 일어섰다.



“내가 그 많은 보육원아이들 가운에 왜 너를 후원하고 있는지, 아니?”

“제가 똑똑하다는 걸 아셨으니까요. 제가 빛나야 대표님이 빛나잖아요. 그래야 제 성공사례에 대표님 이름이 빠지지 않을 테니까요.”



일어나 한마디 하려는 수현을 가인이 눈짓으로 막아섰다.



“지금 대표님은 아무 소득이 없어 보이겠지만 제가 의사로 성공해 명성을 날리면 그땐 서로가 윈윈 되는 거예요.”



가인이 일어나자 수현이 따라 일어섰다.



“오늘 만나길 정말 잘한 것 같아. 바쁜 시간 내줘서 고맙다.”

“실습 나가면 더 바빠져서 여기 못 올 거예요. 미리 알고 계시라고요.”

“더 이상 너 부르는 일, 없을 거야.”



상관없다는 듯 짧은 목례를 한 나라가 성큼성큼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참고 있던 수현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가인을 바라봤다.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뭐라도 따끔하게 혼을 내셨어야죠.”

“내가 혼냈으면 나라가 진심으로 깨달았을까?”

“그래도 저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지금 쟤 클럽에서…….”

“쉿! 누가 들으면 나라 앞길 망쳐.”



가인이 수현을 막아섰다. 웬만해서는 회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가인이었다.



“어릴 시절 버려졌다는 결핍이 너무 커서 그럴 거야.”

“환경이 똑같다고 모두 같은 가치관을 갖고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나라를 포용하는 가인에 수현이 단호하게 반박했다. 수현 또한 홍나라처럼 버림받은 보육원 출신 아이였으니까.


나라와 똑같이 가인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성장한 수현은 은인과도 같은 가인에게 나라와는 다른 보답을 했다.


수현 역시 버려졌다는 결핍을 극복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수현은 나라처럼 결핍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나라를 감싼 가인을 수현이 이 순간만큼은 이해하지 않은 이유였다.



“네 말도 맞아. 환경보다 중요한 게 사고와 선택이니까.”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물어오는 수현에 책상에 앉은 가인이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신중한 결정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사실 가인이 나라를 부른 건 그녀가 클럽에서 마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다만 어투나 눈빛으로 미루어 아직 심각한 중독은 아닌 듯했다.


가인은 내심 오늘 홍나라가 사실을 실토하고 도와달라는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라는 되레 거리를 두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자.”



***



청명한 하늘 아래 끝이 없을 것 같은 푸른 바다가 재림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약한 파도가 출렁이며 잠수복 차림의 그의 발목을 건드렸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토요일을 맞아 강원도 속초에 내려온 재림은 잠수 전 바다에 발을 담그고는 눈앞의 전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어릴 적부터 배워 수영을 곧잘 하던 재림에게 처음 스킨스쿠버를 권유한 건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였다.


재림의 아버지는 과거 절망에 빠져있던 아들에게 스킨스쿠버를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바닷속 세상에서는 혼란이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 아버지 권유에 스킨스쿠버를 베운 재림은 점차 지상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뎠고 자격증까지 취득하며 바닷속에서 평온과 안식을 느꼈다.


하지만 바다 깊이 머무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자 강사는 그에게 경고를 해왔다.


바닷속에서 찾은 안식에 집착하는 순간 그 바다도 육지와 다를 게 없다는…… 무엇이든 집착과 생명을 맞바꾸지 말라는 뜻깊은 충고였다.


과거 강사의 충고가 불현듯 재림의 머릿속을 스쳤다. 최근 집착이 심각해진 탓이었다. 재림이 일부러 시간을 내가며 속초에 내려온 이유이기도 했다.


재림 옆에는 그와 똑같이 잠수복 차림의 건장한 남자 세 명과 여자 두 명이 함께 서있었다. 시간과 뜻이 맞아 모인 팀원들이었다.


재림은 2년 전부터 바닷속 시간의 일부를 해양쓰레기를 줍는 데 소비하고 있었다.


처음 제안을 함과 동시에 압박을 준 건 안도영이었다. 남의 세계에 쓰레기를 버리며 수많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면서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인간은 되지 말자는 다소 직설적인 일침이었다.


앞장선 도영의 속내는 거창한 환경지킴이가 아니었다.


그에게 쓰레기는 곧, 인간을 지칭하는 거였다. 도영은 해양쓰레기를 주우며 쓰레기보다 못한 인간들을 수거해 소각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고 했다. 다소 섬뜩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한 거친 분노가 있는 그였기에 재림은 도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재림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해양뿐 아니라 지구 곳곳은 현재 몸살을 앓고 있다.


지구가 오염된 게 아니었다. 인간이 오염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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