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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이분들이 누군지 기억하시겠습니까?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by 해달

속초에 내려오기 전, 재림은 이가인 가택침입사건 수사와 더불어 공사가 한창인 그녀의 집을 가인 몰래 다녀왔다.


다행히 수사에 진전은 있는 듯했다. 과거 누군가 가인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건을 경찰이 찾아낸 거였다. 물론 확인이 필요한 절차였다. 하지만 가인에게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게 재림의 생각이었다.


되돌릴 수 없는 참담한 시간을 떠올린다는 건 그녀뿐 아니라 재림에게도 호흡이 가빠지는 일이었으니까. 가인 또한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녹록지만은 않을 게 분명했다.


가인의 집을 찾았을 때 내부 인테리어공사는 거의 마무리 작업 중이었다.


문제의 담벼락 쪽문은 헐어버린 후 모두 시멘트로 채워 넣었고 주방 뒷문 또한 잠금장치를 설치했다. 조만간 가구를 들이고 복원시킨 가족사진이 거실에 걸리면 모든 것이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터였다.


단, 현장을 목격한 이가인의 기억만이 되돌아갈 수 없을 뿐.


처참히 찢겨나간 옷을 모두 버리고 간간이 쇼핑을 하며 새 옷을 구입했다고 전해온 가인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차분한 가인에 재림도 그 속을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에 대한 역설적 반응일 거라 짐작만 했을 뿐. 감정을 감추는 게 익숙한 가인에게 어쩌면 두려움은 더더욱 들키고 싶지 않은 약점이라 여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거 가인의 양친이 사망했을 당시, 가인은 딱 한 번 눈물을 보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일각에서는 냉혈하고 독하다느니 유산에 눈이 멀었다느니 하며 수군거렸다. ‘감정의 결’뿐만 아니라 그 표현마저도 대중의 잣대에 평가받아야 하는…… 그녀는 말 그대로 ‘비운의 상속녀’였다.


재림은 가인이 이미 그때부터 감정을 숨기기로 다짐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하여 그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다만 몇 년째 그녀가 꾹꾹 욱여넣고 있는 포화상태의 감정들을 언젠가는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인내는 분명 인간을 성장시킨다.


그러나 성장하지 못한 인내는 시한폭탄이다.



“이런 곳에서 이가인 생각이라니…… 영 안 어울리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 재림이 물길을 갈라 보트 위로 이동하려는 찰나였다.



“형! 공형!”



재림의 성을 따 공형이라 부르는 팀원 이석현이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감기기운 있다면서 왜 나왔어?”

“헉헉…… 그게…….”



잠깐 숨을 고른 석현이 소식을 건넸다.



“조승남 말이야. 공개 자백했어!”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평온한 11월. 토요일이었다.


일찍 운동을 마친 수현이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이 순간만큼은 눈앞에 최고급 안심 스테이크를 갖다 놓아도 물맛을 따라갈 순 없을 듯했다.


수현은 그 물맛의 짜릿함을 즐겼다. 스물일곱 그녀 인생에 몇 안 되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번 주말, 수현은 자유를 얻었다. 협박이랍시고 송미호가 지목한 배불뚝이가 오늘은 오피스텔에 발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황금 같은 주말에 운동으로 잡념을 없앤 수현은 그녀가 즐겨보는 액션영화, 좋아하는 치즈김치볶음밥 그리고 공들이고 있는 실험에 열중하며 온전히 자신을 위한 주말을 보낼 계획이었다.


유난히 요란한 폰 벨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는.


따르르르르 따르르르르


발신번호를 확인한 수현이 순간 고민했다. 출처를 모르는 서울 지역번호였다.


따르르르르 따르르르르



“네.”



수현이 전화를 받자 한 남자가 대뜸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나수현 씨 되십니까?”

“누구시죠?”

“중랑경찰서 형사과 강력 2팀 성진호 경사입니다.”

“…….”



경찰 전화에 경직된 수현의 입이 떨어지지 않으며 정적이 흘렀다.


대답이 없자 성 경사가 말을 이었다.



“여보세요? 듣고 계신가요?”

“……네. 무슨, 일이시죠?”

“송미호 씨가 모친 맞습니까?”



물어오는 경찰에 질끈 눈을 감았던 수현이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떴다. 한 번도 엄마였던 적이 없는 여자를 모친이라고 해야 하는 혈연관계가 수현은 몹시 못마땅했다.



“모친은 아니지만 절 낳은 분은 맞습니다.”



단호히 선을 긋는 수현에 잠시 멈칫했던 성 경사가 용건을 전달했다.



“잠깐 서로 와주셔야겠습니다.”

“제가요? 왜요?”

“송미호 씨가 찜질방에서 손님들의 소지품을 훔쳤습니다.”

“저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전 송미호 씨와 아무 연관 없는 사람입니다.”



역시나 수현은 단호했다. 자신이 보내준 삼백만 원을 그새 다 써버리고는 절도도 모자라 합의를 위해 뻔뻔히 불러대는 송미호의 만행에 대한 응징이었다.


지명수배 중이었으니 분명 형량이나 줄이자는 심보일 터였다. 그런데 이어진 성 경사의 말에 수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게…… 송미호 씨가 실종됐습니다.”



***



종로경찰서에 도착한 가인이 주차 후 차량에서 내렸다.


평일이라면 수현과 함께 왔을 곳이었다. 아니, 평일이 아니더라도 수현을 불러냈을 터였다. 경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가인으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발걸음이었으니.


그럼에도 아침 일찍 걸려온 경찰 전화에 가인은 직접 차를 몰았다. 수현에게 비밀이 없다시피 한 가인이었지만 수현이 알아서 결코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 가인은 오늘 일을 비밀로 하기로 했다.


오전 중으로 출석을 요구한 경찰에 가인은 대략적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경찰은 행동이 수상한 한 남자가 cctv에 찍혔다고 전해왔다.


물론 처음부터 그 남자를 용의자로 간주한 건 아니라고 했다.


경찰은 그간 딱히 의심을 살만한 인물이 없어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런데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사건 당일 밤, 반찬가게 옆 대로변을 지나는 검은 모자의 남자를 주시하라는 쪽지를 받았으며 제보에 따라 cctv를 확인한 경찰은 영상 속 남자를 가인의 가택 무단침입 및 절도 용의자로 간주했다고 했다.


근거를 묻는 가인에 경찰은 그간의 수사과정을 짤막히 설명했다.


추적결과, 검은 모자와 검은 마스크로 철저히 얼굴을 가린 탓에 남자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동네주민은 아닌 것으로 확인했다고 했다.


그런데 사각지대로 사라졌던 남자가 밤 11시가 가까워지자 대로변 cctv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경찰은 그가 번화가 거리 한복판에서 택시에 탑승한 사실을 알아냈다고 했다.


비록 복장은 달랐으나 마른 체구에 검은 운동화, 왼손 검지에 낀 굵은 반지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한 거였다.


경찰은 그가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 밤을 새우며 평창동 일대 모든 cctv를 확인했지만 결국 가인 집에 침입한 단서를 찾지 못한 채 매우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했다.


만약 범인을 찾지 못한 가운데 가인이 살해되기라도 한다면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임을 인지하고 있던 까닭이었다.


그런 가운데 남자가 탑승했던 택시 번호판을 추적해 기사 진술을 확보한 경찰은 그가 과천의 한 아파트 앞에서 하차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택시기사 진술에 의하면 남자의 나이는 대략 60대 전후로 말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며 택시요금은 얼마를 더 얹어주고 내렸다고 했다.


경찰은 먼저 남자의 신원을 확보했다. 하지만 정황만 있을 뿐, 어떤 근거도 없이 남자를 체포하거나 소환할 수 없어 대신 가인에게 출석을 요구한 거였다.


설명을 들은 가인은 곧장 경찰서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경찰이 용의자 신분을 밝히기 전, 가인이 먼저 알아챈 거였다.


그 남자의 정체를…….


가인은 살짝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경찰이 남자를 찾아내기 전 자신이 먼저 기억해 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일인 데다 비운의 상속녀란 꼬리표가 붙었을 만큼 순탄치 못했던 그녀의 20대는 미처 그 부분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하지만 예상이 맞는다면 이제부터라도 신경 써야 할 일임에는 분명했다.



“후-.”



짧은 호흡을 내쉰 가인이 무거운 발걸음과 함께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다.



*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강력팀 양민호 경사가 가인 앞에 두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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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분들이 누군지 기억하시겠습니까?”



사진을 지목하며 물어오는 양 경사에 가인이 사진을 들여다봤다.


한 장은 50대 전후의 푸근한 인상에 기품 있어 뵈는 중년남자의 증명사진이었다. 미소를 머금은 입매가 털털하면서도 바다를 품은 것 같은 U자형 곡선이었다.


반면 또 한 장의 사진은 쳐진 눈꺼풀 사이로 담긴 날카로운 눈빛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다소 어두운 사진이었다. 게다가 안면 가득 파고든 깊은 주름들이 굵직하게 선을 그어놓은 탓에 인상이 표독스럽고 거칠어 보이기까지 했다.


남자는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흑백의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한 눈에도 자신을 전혀 관리하지 못한 채 풍파의 세월을 감당한 노인의 얼굴이었다. 어림잡아 70대 이상은 되어 보이는.


첫 번째 사진은 가인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사진은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인물이었다.


곧 고개를 든 가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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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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