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아니요. 이전, 그러니까 일주일 전에 만났습니다. 제 집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더라고요.”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눴습니까?”
“생활비를 달라고 해서 다퉜습니다. 2년 전부터 갑자기 엄마라고 나타나서는 돈을 뜯어가고 있었거든요.”
생모와의 일화를 전하는 수현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모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생모가 나타나 돈을 뜯어갔다면 적잖게 분노가 쌓였을 법도 한데 수현은 그것조차 초월한 듯했다.
성 경사는 그제야 통화 당시 수현이 단호했던 이유를 눈치챘다.
그녀에게 ‘엄마’라는 단어는 태어나 처음 들어본 낱말처럼 낯설고 어색했던 거였다. 나수현은 송미호에게 어떤 감정이 형성될 만큼 모녀관계로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감정 없는 수현의 그 태도가 현 정황과 맞물려 의심을 증폭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음날 회사 경비실을 통해 현금 삼백만 원을 전달했습니다.”
폰을 꺼낸 수현이 앱을 열어 현금을 인출한 내역이 담긴 은행 계좌를 경사 앞에 내밀었다.
“저는 송미호 씨가 실종된 당일 밤, 집밖으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cctv 확인해 보세요.”
수현이 내민 증거에 성 경사는 딱히 말이 없었다.
그는 수현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경사의 눈빛은 너그럽지 않았다.
신고를 받고 찜질방에 도착한 경찰은 송미호가 지명수배자임을 확인한 후 곧장 그녀의 행적을 추적했다.
송미호가 몸담았던 사기조직 일당은 3년 전 대부분 검거되었으나 송미호는 그녀가 자주 드나들었던 카지노에서도 종적을 감추며 끝내 검거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성 경사는 그간 송미호가 어떻게 은신해 왔는지 그 비밀을 알아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되자 버렸던 딸을 찾아가 뻔뻔하게도 돈을 뜯어먹고 살고 있던 거였다.
수현의 입장에서는 분명 화가 날 일이었을 터였다.
송미호가 실종된 지금, 2년 간 돈을 뜯긴 수현의 입장이 몹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
같은 시각 종로경찰서.
한참 동안 사진을 들여다본 가인이 고개를 들었다.
“한 사람은 알겠는데, 다른 한 분은 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솔직한 가인의 대답에 양 경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사진 속 인물을 알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경사의 뉘앙스가 담담했던 가인의 신경을 건드렸다. 물론 내색하진 않았지만.
“네. 이분은…….”
살짝 머뭇거린 가인이 말을 이었다.
“캐나다 유학시절, 제 친구 아버지세요.”
어렵게 말은 이은 가인이 많은 감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로서는 결코 꺼내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좋았던 추억이자 동시에 시리도록 아픈 추억이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자신으로 인해 친구가 유괴 살해된데 이어 동생까지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던 가인이 선택한 도피처는 유학이었다.
그런 가인의 심경을 눈치챈 모친 도미연은 홀로 유학을 가겠다는 가인의 결심을 선뜻 받아들였다. 때로는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이 고통뿐인 과거를 지나가게 만들기도 했으니까.
그러자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했던 이태진도 아내의 설득에 따라 결국 딸의 홀로 유학을 허락했다. 무조건 반대만 하기에는 위태로워 보였던 가인이었다.
그렇게 혼자 비행기에 몸을 실은 가인은 낯선 캐나다 땅에 발을 디뎠다.
물론 그곳에서의 삶도 한국과 별반 다르진 않았다. 일찍 영어 교습을 받았던 탓에 가인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들을 사귀는 데 있어서는 좀처럼 간단하지가 않았다.
아이들은 표정이 어두운 가인에게 나름 호기심을 가졌지만 가까이 다가오진 않았다. 그녀에게서 밝은 에너지가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낀 거였다. 그렇게 타국에서도 점점 혼자가 된 가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인에게 한 여학생이 다가왔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온 가인을 눈여겨보고 있던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아이가 처음 가인에게 말을 걸어온 건 평일 하교 길이었다.
“저기, 혹시 한국에서 왔니?”
낯선 타국에서 한국말이 들리자 땅바닥에 시선이 꽂혔던 가인의 고개가 돌아섰다.
“어? 어.”
그녀에게 말을 걸어온 여학생은 마치 코알라를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통통한 볼에 오밀조밀한 눈 코 입이 무척 귀여운 인상이었다.
키는 가인보다 작았지만 그녀를 포용하는 깊은 눈빛은 가인보다 훨씬 커 보였고 그렇게 두 사람은 친구가 됐다.
가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그녀의 이름은 나수현이었다.
수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3살 터울의 언니 그리고 엄마와 함께 캐나다에 와서 살고 있다고 했다. 가인과 같은 유학생 신분이었다.
수현의 짤막한 자기소개에 가인은 잠깐 그녀를 부러워했다.
교육청에서 제공한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녀로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가족의 부재가 그리울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인이 자신의 홀로 유학길을 후회한 건 아니었다. 다만 동생을 잃어버리기 전과 같은 마음으로 가족을 대면할 수 없었기에 괴로움 대신 외로움을 택했을 뿐.
친구가 된 수현은 매우 다정했고 가인을 친구 이상으로 챙겨주었다. 집으로 가인을 초대한 수현의 모친 또한 따뜻하게 가인을 받아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소위 베프가 됐고 몇 년 후, 가인은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먼 타국에서조차 과거에 붙잡혀 있던 그녀가 수현과 그 가족의 도움으로 현재를 살아낸 거였다.
당시 수현의 언니는 이미 다른 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중이었고 수현이 고등학교를 마치자 모친은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가인과 수현은 서로 다른 대학에 입학하며 만남의 횟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고 곧 다가올 엄청난 일들 또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년 후, 12살 연상의 한국남자와 결혼을 결심한 가인은 처음으로 수현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수현은 결혼을 축하하면서도 우려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연애 기간이 너무 짧은 데다 감정기복이 심한 가인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마냥 들떠있기만 한 가인을 걱정한 거였다. 하지만 확고했던 가인에 친구의 조언이 들어올 리 없었다.
가인은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라며 수현을 안심시켰다. 더불어 수현에게 결혼식 날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하객도 없이 교회에서 치르는 단출한 결혼식이었지만 하나뿐인 친구 수현의 축하를 받고자 함이었다.
가인의 부탁에 수현은 기꺼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며 유일한 하객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나 혼인신고 없이 이혼을 해버린 가인은 한 달간 유렵여행을 다녀온 후 다시 수현을 찾아갔다.
***
중랑경찰서.
의문의 전화를 받은 송미호는 중랑구에서 평창동 딸의 집 앞까지 택시를 타고 와서는 홀연히 사라졌다. 최근 송미호가 접촉한 인물 또한 나수현, 단 한 명뿐이었다.
수현은 자신이 버려진 것과 더불어 25년 만에 나타나 금전을 요구한 생모에 분명 엄청난 분노를 쌓아두고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그 또한 가족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비인격적인 추악함에 대한 분노였을 터였다.
긴 세월 쌓여 온 수현의 인내와 증오는 그녀가 당장 무슨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수현을 바라보는 성 경사의 눈빛이 너그럽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송미호는 새로 구입한 생필품을 찜질방 사물함에 그대로 둔 채 그곳을 나갔다. 만약 떠날 생각이었다면 모두 챙겨갔을 짐이었다.
영상 속의 송미호는 무척 들떠 있었다. 당시 찜질방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통화 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송미호로 인해 시끄럽다며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 의미인즉, 송미호는 곧 자신이 사라질 거라는 것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거였다.
“월요일 밤, 혹시 집에 혼자 계셨습니까?”
“네.”
수현이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복잡한 머릿속을 파고드는 신경통은 어쩔 수 없었다. 하필 그날 그 시각, 배불뚝이가 오피스텔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형사 앞에서 절대 들켜서는 안 될 알리바이였다.
“형사님, 저는 지금 참고인입니까? 아니면 용의자입니까?”
정색하며 물어오는 수현에 살짝 움찔한 성 경사가 헛기침을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은 참고인입니다. 해서 몇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성 경사가 다시 질의를 주도했다. 범인이거나 혹은 용의자가 될 수도 있는 참고인에게 끌려 다니는 순간 말린다는 것을 그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송미호 씨에게 빚이 있다거나 혹은 쫓긴다는 말 같은 건 못 들으셨습니까? 아니면 유난히 초조해 보였다든지요.”
“그 여자와 저는 서로를 살필 만큼 가깝지 않습니다.”
송미호와 관련한 어떤 질의도 의미 없음을 수현은 간결한 대답으로 일축했다.
수현의 반응에 성 경사가 질문을 바꿨다.
“그런데 왜 돈을 주셨습니까? 그것도 2년 동안이나.”
“제게 지옥을 선물해 준 보답이었어요.”
“모친, 아니 송미호 씨가 많이 원망스러웠겠네요.”
“아니요.”
차디찬 수현의 두 눈이 단호한 그녀의 대답에 힘을 실었다.
“그 여자가 절 지옥에 버려준 덕에 엄청난 동아줄이 내려왔고 전 지금 잘 살고 있는 걸요.”
수현의 대답에 성 경사는 공감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출생과 동시에 부모에게 버려진 수현이 어떤 고난을 거쳐 이가인 비서가 되었는지 그도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경사는 잘 살고 있다는 수현에게서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했다.
체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