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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온 세상 불행이 마치 나만 공격하는 것 같았지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by 해달

“송미호 씨가 지명수배자라는 건 알고 계셨습니까?”

“지명수배자요? 하!”



전혀 몰랐다는 듯 황당한 표정과 함께 수현이 어이없는 웃음을 보였다.



“전혀 모르고 계셨군요.”

“돈 말고는 딱히 오고 간 대화가 없어서요.”

“지명수배자는 웬만해선 일을 벌이지 않는데, 송미호 씨는 왜 찜질방에서 절도를 했을까요?”

“예전에 비해 받은 돈이 적었으니까요. 부족하다고 느꼈겠죠.”



질의에 또박또박 응대하는 수현을 성 경사가 가만히 응시했다. 속내를 꿰뚫으려 했으나 가인만큼이나 감정을 잘 숨기는 나수현이었다.



“언제까지 돈을 줄 생각이셨습니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툰 거고요.”

“그렇군요.”



소매를 걷은 수현이 보란 듯 시계를 들여다봤다.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어느새 2시간이 지난 후였다.



“형사님.”

“네.”

“절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란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협조했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협조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결단코 전, 그날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똑 부러지게 방어하는 수현에 성 경사가 의미 모를 미소를 보였다.



“나수현 씨를 지목해 수사 중인 건 아닙니다. 송미호 씨를 찾고 있는 데다 수사망을 좁히기에는 아직 밝혀진 게 없어서요. 송미호 씨만 찾으면 다 밝혀질 테니 그때까지만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경사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실종 5일째인데 찾을 가능성이 있긴 한 건가요?”

“그럼요. 실종사건이지만 송미호 씨 스스로 잠적했을 수도 있고 만약 납치된 거라면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전 가봐도 되는 거죠?”

“네.”



성 경사가 일어서자 수현이 일어났다.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오늘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수현이 경찰서를 걸어 나왔다. 물론 홀가분할 리 없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자꾸만 수현을 건드렸다. 마치 송미호 실종사건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관여시킨 느낌이었다.


모든 정황이 그녀를 향하게끔.


무려 5일째 행방이 묘연한 송미호도 수현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왕 사라진 거 끝까지 수사망을 잘 피해 다니다 얌전히 늙어갔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두 번 다시 눈앞에 나타나지만 않는다면.


왜 송미호가 잡히지 않았으면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현은 굳이 그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


경찰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수현이 계단에 발을 디딘 찰나, 불현듯 그녀 머릿속에 송미호와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근데 왜, 삼백이야?”

“미처 다, 쓰지 못할 것 같아서.”」



멈춰 선 수현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



종로경찰서.


양 경사는 생각에 잠긴 가인을 기다려주는 중이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몹시 꺼리는 탓에 양 경사는 사무실책상 앞이 아닌 조사실로 가인을 데려왔다. 하지만 단출한 조명 아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그래서 조금은 섬뜩하기까지 한 이가인과 적막 속에 있자니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인으로서는 아려오는 과거였다. 사진 속 인물의 눈빛을 똑바로 대면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이유였다.


이혼 후 가인이 수현을 만났을 때는 발목을 덮는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12월이었다.


그 사이 단발이었던 수현의 머리는 어깨를 덮고 있었고 다소 심플했던 옷차림은 러블리한 원피스로 바뀌어 있었다. 영국인 남자친구가 생긴 거였다.


갑작스레 찾아온 가인에 수현은 남자친구와의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그녀를 만났다. 가인이 남자친구에 관해 묻자 수현은 평소 친구로 지내던 이웃집 청년이자 22살 동갑내기와 연애 중이라고 했다.



“남자친구가 잘해주니?”

“네 남편만큼은 아니겠지만 딱 22살다운 포용력이 있어.”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 궁금해.”

“음…… 되게 솔직한데 배려가 있어. 근데 또 그 배려가 과하거나 가식적이지 않아. 딱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만큼만 배려해.”

“뭔가 좀 어려운데? 더 쉽게 얘기해 줘.”



궁금해하는 가인에 수현이 미소를 머금었다.



“진솔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아. 그 친구는 절대 가식적으로 친절하거나 함부로 약속을 하지 않거든. 그게 처음에는 좀 차가워 보이기도 했는데 사귀고 보니까 너무 편해. 늘 한결같으니까 나한테 소홀해졌다거나 변했다는 느낌이 조금도 없어.”



상체를 기울여 수현의 얘기에 집중했던 가인이 물 잔을 들어 올렸다. 오랜만에 만난 수현이 왜 이렇게 예뻐졌나 싶었다.


그녀는 진짜 ‘사랑’을 받고 있는 거였다.


자신과는 다르게.



“22살 치고는 가치관이 괜찮네.”

“응. 좀 오그라들기는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망설이다 활짝 웃은 수현이 말을 이었다.



“내 앞에 수호천사가 나타난 것 같은 기분이야.”



양 볼이 발그레한 수현에 미소를 보인 가인이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밖에서는 여전한 함박눈이 무서운 속도로 세상을 하얗게 점령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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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수현이 길게 뻗은 손으로 가인의 팔을 건드렸다.



“이제 네 얘기도 좀 해봐. 결혼해 보니까 어때? 연애 때보다 더 좋아?”



호기심이 가득한 수현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나, 헤어졌어. 한 달 전에.”

“뭐?”



잠시 당황했던 수현이 이내 가인의 손을 감쌌다.



“미안. 난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내 얘기만 했네…….”

“아니야. 우중충한 내 사정보다 훨씬 좋았어. 덕분에 밥도 맛있었고.”



가인은 짤막하게 헤어진 이유를 밝히며 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한국에 돌아갈 거라 말했다.



“정말? 아주 가는 거야?”

“응. 너는 여기 계속 있을 거지?”

“나도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는데, 남자친구가 같이 한국에 가재.”

“남자친구가?”

“응. 나를 더 잘 이해하려면 한국 문화를 알아야 한다면서 졸업하고 바로 가자고 하더라고.”



순간 갑작스러운 바람에 눈보라가 휘날리며 식당 유리창이 흔들거렸다.



“벌써 결혼까지 생각하는 거야?”

“난 아닌데, 그 친구는 빨리 하고 싶은가 봐.”



아니라고는 했지만 수현도 싫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그렇구나. 어머! 내 정신 좀 봐.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



시계를 들여다본 가인이 서둘러 외투와 가방을 챙겼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눈도 많이 오잖아.”

“아니야. 나 때문에 약속도 깼다며. 가서 남자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



가인과 수현이 식당을 나온 건 오후 5시경이었다. 종일 내리는 눈에 일찍 해가 사라진 바깥세상은 마치 한밤중인 양 어두웠고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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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은 다음을 기약하며 식당 앞에서 수현을 보낸 후 택시에 올라탔다.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오늘따라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온 세상 불행이 마치 자신에게만 공격한 것 같은…… 뭔가 억울한 마음이었다.



“나도, 그런 사람 만나고 싶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가인의 한국말을 캐나다인 운전사는 알아듣지 못했다.



*



다음날.


일찍 호텔을 나온 가인이 거주 중인 토론토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요란한 벨소리와 함께 전화를 받은 가인은 결국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했다. 어젯밤, 수현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였다.


최초 신고자는 수현의 남자친구였으나 가인에게 소식을 전한 건 수현의 언니였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고 있던 수현이 남자친구와 통화 후 연락이 끊긴 거였다.


수현은 남자친구와 그의 집에서 영화를 보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그런데 불과 2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2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자 남자친구가 수현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계속 전화를 받지 않던 수현의 핸드폰은 23번째 통화시도 끝에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전화를 받은 수현은 거친 숨소리만 내쉬더니 꺼져가는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건넨 후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그녀의 첫마디는 어눌한 발음으로 남자친구인 제임슨의 이름을 부른 거였다.


그러나 문제가 된 건 두 번째였다.



“가…… 가…… kills…….”



순간 누군가가 낚아챈 듯 폰은 꺼졌고 이후 수현도, 수현의 폰도 종적을 감췄다.


실종신고 후 경찰은 밤을 새 가며 주변 일대를 수색했다. 하지만 무릎까지 쌓인 눈과 격해지는 눈보라에 제대로 된 수색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눈발이 잦아든 아침에야 경찰은 다시 수색을 시작했고 몇 시간 후, 밴쿠버 시내에서 멀지 않은 주택가 근처에 버려진 수현의 차량을 발견했다. 동시에 공원 쓰레기통에서 훼손된 그녀의 빈지갑과 혈흔이 묻은 찢어진 옷가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경찰은 귀가 중이던 수현이 강도를 만났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가인은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출석해 전날 수현과의 만남을 진술하는 동시에 자신의 알리바이도 증명했다. 또한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면서까지 가인은 껄끄러운 경찰과 함께 수현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수현은 실종자 명단에서 그 이름을 지우지 못했다.



*



새 해와 함께 토론토로 돌아간 가인은 슬픔 가운데서도 수현이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가인을 찾아왔다. 처음 대면한 수현의 아버지와 그 가족이었다.


가인은 그들에게서 받았던 이전의 따뜻한 눈빛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수현의 가족은 가인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수현과 남자친구 제임스의 마지막 통화 중 수현이 남긴 음성 때문이었다.


가인은 사라진 수현을 애타게 찾고 있는 가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향한 매서운 눈빛은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때 가인은 난생처음 누명을 쓴다는 게 이런 기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수현의 아버지는 가인을 처음 보자마자 마치 딸을 죽인 살인자인 양 그녀를 노려봤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증오의 눈빛이었다.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인은 어쩔 수 없이 경찰을 불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때 경찰에 연행되던 수현의 아버지가 가인을 향해 말했다.



“난 반드시 내 딸을 데려간 범인을 찾아내 죽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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