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깊이 묻어두었던 12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던 가인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적막이 공기를 타고 내려와 그녀의 두 발을 묶어버렸다. 적막을 깨지 않으면 마치 취조실 같은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뚝뚝한 얼굴로 뚫어져라 가인을 응시하는 양 경사의 눈빛도 그녀를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그제야 가인은 자신이 경찰서에 있고 마주 앉은 존재가 형사라는 것을 자각했다.
“하하…… 하하…….”
별안간 가인의 호흡이 가빠졌다.
눈앞의 양 경사가 어릴 적, 가인의 집에 들이닥쳤던 괴물로 보이기 시작한 거였다.
“이가인 씨, 이가인 씨! 괜찮으십니까?”
식은땀을 흘리며 호흡이 불안정해진 가인에 당황한 양 경사가 벌떡 일어섰다.
가인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녀 또한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극복해야 하는 내면 깊이 뿌리내린 막연한 공포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한 공포와 마주 서야만 했다. 하지만 가인은 매번 대면을 회피하며 숨기에만 급급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녀는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두 주먹을 꼭 쥔 채 겁에 질려 눈도 뜨지 못한 모양새가 딱 그러했다.
“혀, 형사님, 저…… 여, 여기…… 나가고 싶어요.”
“잠시만요.”
양 경사가 황급히 문을 열었다. 반쯤 눈이 뜨인 가인의 눈에 출입구가 보였다. 저 문을 나가 경찰서를 벗어나면 공포와 대면하지 않은 채 숨을 수 있었다.
“하하…… 하하…….”
후들거리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준 가인이 테이블 위에 손을 얹으며 일어선 찰나였다.
“엄마가 널 지킬 거야. 그러니까 숨지 않아도 돼.”
어디선가 나긋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린 시절 괴물이 잡으러 왔다며 이불속에서 꼼짝하지 못했던 가인에게 다정히 속삭이던 엄마의 음성이었다.
처음이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숨을 곳을 찾는 가인을 찾아온 건.
순간 가빴던 가인의 호흡이 질주하던 심장박동의 압박을 풀었다.
“119 불러드릴까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양 경사에 고개를 저은 가인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자리에 앉았다. 호흡이 안정된 가인 앞에 양 경사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따듯한 물입니다. 마셔보세요.”
“감사합니다.”
양손으로 컵을 감싼 가인이 힐끗 양 경사를 살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근심 가득한 눈빛의 그는 더 이상 괴물이 아니었다.
“……죄송해요.”
“아닙니다. 오늘은 댁에 가서 쉬시고 다음에 다시 얘기하죠.”
일어나려는 양 경사를 가인이 막아섰다.
“아닙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과거를 떠올린다는 게…… 제게는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과 똑같아서요.”
차분해진 가인에 잠시 망설이던 양 경사가 자리에 앉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인을 예의주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과거를 떠올리는 게 악몽이라는 그녀의 말을 양 경사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세상에 알려진 가족사만으로도 공공연히 ‘비운의 상속녀’라 불리고 있는 이가인이었으니까.
그런 가운데 12년 전 친구가 실종되는 일까지 겪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가인의 20대는 만신창이었을 터였다.
가인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좀처럼 감정이 없어 보였던 얼굴에 뭔가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단호한 눈빛이 스며든 순간이었다.
“이 사진 속 인물은 이가인 씨 친구, 나수현의 부친 나재희 씨가 맞습니다.”
“12년 전 저를 보던 눈빛은 아니지만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가인이 사진 속 나재희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를 찾아와 당장이라도 목을 조일 듯한 12년 전 그때의 눈빛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가인은 사진 속 수현의 부친, 나재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딸을 잃어버렸고 가인은 유일한 친구를 잃어버렸다.
“그럼 이분은 누구신가요?”
잠시 후, 두 번째 사진으로 시선을 옮긴 가인이 물었다. 물어오는 가인에 목소리를 가다듬은 양 경사가 사진 속 인물을 한번 쳐다보고는 가인을 바라봤다.
“두 번째 사진 속 인물은 나재희 씨. 65세. 과천에 거주하며 잘 나가는 사업가였지만 현재는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
놀란 가인의 두 눈이 양 경사를 향했다.
언뜻 봐도 7,80대는 되어 보이는 깊은 주름과 광대가 돌출된 바짝 마른 얼굴, 수북이 내려앉은 흰머리가 도무지 65세라는 게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인이 놀란 건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나재희 씨라고 하셨나요?”
“네. 두 사진은 같은 인물입니다. 사진을 찍은 시기는 약 10년 이상 차이가 있지만요.”
순간 두 번째 사진을 들고 있던 가인의 손이 파르르 떨리며 사진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친 소름이 그녀를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이 사진을…… 왜 저한테 보여주시는 거죠?”
“두 번째 사진은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받은 사진입니다.”
“……익명의 제보자가 이 사진을 보냈다고요?”
“네. 저희가 퀵으로 받은 봉투 안에는 이 사진과 함께 cctv속 검은 모자를 쓴 남자를 추적하라는 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정황이었다. 가인의 집에 몰래 침입해 끔찍한 가상 살인을 저지른 괴한이 cctv속 검은 모자, 즉 나재희라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두 사진 속 인물이 동일인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12년 전 푸근했던 풍채는 어느새 깡마른 독거노인이 되어있었고, 새까맣던 검은 머리는 세월의 풍파를 한 번에 맞은 듯 흰 눈이 덮여있었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그의 얼굴이었다.
바다를 품은 미소와 선하기 그지없었던 눈매는 어느새 독사의 눈빛과 삐뚤어진 입꼬리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흰머리만큼이나 얼굴을 점령한 불규칙한 주름들은 사나워진 남자의 인상을 더욱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분이 제 집을 그렇게 만든 괴한이란 말씀이신가요?”
“아직 단정할 순 없습니다. 이가인 씨 가택에 침입했다거나 그곳에서 나왔다는 증거가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익명의 제보자는 그분을 범인으로 지목했다는 건가요?”
“제보자가 어떤 사건과 연관 지어 나재희 씨를 지목한 건 아닙니다. 검은 모자 신분을 확인한 후 저희 측에서 조사한 결과, 이가인 씨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걸 알아낸 거죠.”
증거가 없어 단정할 수 없다는 경찰의 입장을 가인도 이해했다. 그럼에도 나재희가 범인이라는 사실에는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고 있었다.
딸의 실종 후 12년이라는 시간 동안 가인에 대한 그의 의심은 확신이 됐고 확신은 결국 실행으로 옮겨졌다.
가인이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막상 범인의 정체를 알고 나니 더 엉켜버린 실타래 때문이었다.
별안간 사라진 딸에 누구에게든 그 책임을 묻고자 하는 마음은 가인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가인 역시 동생 서인이 실종되었을 때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었던 것처럼.
하지만 실종된 친구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물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비통함을 느껴다. 비록 가상이었지만 12년 전 예고대로 나재희는 나름대로의 범인을 찾아 처리한 거였다.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수현이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 이상 12년 간 엉켜버린 실타래는 풀리지 않을 터였다. 영원히.
생각에 잠긴 가운데 가인의 머릿속에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다.
익명의 제보자.
“그 익명의 제보자는 혹시 찾아보셨나요?”
“안 그래도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신분 노출이 싫었는지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배달 기사님도 모른다고 하시던가요?”
“기사 역시도 공원 벤치에 놓인 봉투를 갖고 왔더라고요.”
“혹시, 형사님 앞으로 도착한 서류였습니까?”
“네. 제 이름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이가인 씨 사건과 관련 있다는 촉이 있었죠. 제가 담당하고 있다는 걸 제보자는 이미 알고 있던 거니까요.”
완벽하게 신분을 숨긴 인물을 찾아낸다는 건 가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추적이 용이한 경찰이 찾지 못한 인물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돕고 있다는 생각에 가인은 불안하지 않았다.
“일단 정황만으로 나재희 씨를 소환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저희 측에서 나 씨를 예의주시할 예정입니다.”
“아니,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분명 가인에게는 안심이 될 만한 소식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왜 그러시죠?”
“아시겠지만 제게도 어릴 적 잃어버린 동생이 있어요. 그래서 그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인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 양 경사가 멈칫했다.
유출되지 않은 27년 전 수사기록에 의하면 가인의 남동생 이서인은 누나인 가인의 부주의로 인해 잃어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12년 전 실종된 나수현 또한 실종 전 함께 있던 상대가 이가인이었다.
물론 두 실종사건을 연관 지을 필요는 없었다. 결이 완전히 다른 사건이었으니까.
그런데 나재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인의 한마디가 그녀를 차갑게만 보던 양 경사를 당황하게 했다.
그의 눈에 평생을 자책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가인이 보인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