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수현과 처음 인사를 나눈 재림은 손이 빠르고 솜씨가 좋은 영원 덕분에 거한 저녁식사를 한 후 내내 말이 없던 수현과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영원, 기분이 좋아 보이는 가인과 함께 디저트를 먹으며 담소를 나눴다.
두 시간 후.
시끌벅적했던 거실은 어느새 어색한 정적이 흐르는 중이었다.
조금 전 약속이 있다며 눈치껏 빠져준 영원과 영원이 잡아끈 수현이 집으로 돌아간 후 재림과 가인, 단 둘만이 남겨진 거였다.
난생처음 마주한 상황에 가인은 어쩔 줄을 몰랐다. 반면 거실 창밖을 내다보던 재림은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유로 가인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가인 씨가 왜 저를 천사에 비유했나 했더니 가인 씨 주변이 온통 천사였네요.”
“네?”
어리둥절한 가인에 재림이 천진난만한 눈웃음을 보였다.
“아까 정원을 가로질러오는데 곳곳에 아기천사동상이 많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다른 세상에 온 줄 알고.”
“공 선생님은 표현을 참 예쁘게 하시네요. 진솔하면서도 뭔가 따뜻해요.”
재림의 말을 이해한 가인이 그제야 한결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에이, 너무 승화시켰네요. 병 주고 약 준다…… 뭐 대략 그런 의미겠죠.”
자신도 알고 있다는 듯 코끝을 찡그리는 재림의 얼굴이 마치 반성문을 채우려 연필을 굴리는 아이 같았다.
“정원 천사들은 생전 어머니가 들여놓은 동상들이에요.”
“아, 그렇군요.”
“동생을 잃어버린 후 매해 어린이날에 하나씩 사 오셨어요. 동생이 돌아오는 해이 기를 소망하시면서…….”
“의미가 깊은 아기천사들이네요.”
뭔가 숙연해진 분위기에 두 사람은 잠시 잠깐 말이 없었다. 하지만 가인은 지나간 이야기로 재림과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보통은 퇴근 후 체육관에 갔어요. 오래전부터 취미로 복싱을 하고 있거든요.”
“복싱으로 스트레스를 푸시나 봐요?”
“뭐, 그런 면도 있죠.”
“그럼 주말에는 뭐 하셨어요?”
연이어 근황을 물어오는 가인에 재림이 넌지시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그의 모든 것이 궁금한 듯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때마침 창문 너머로 쌍둥이 아기천사가 대화를 엿듣기 위해 들고 있던 나팔을 내려놓고는 바짝 귀를 붙인 것이 재림 눈에 포착됐다.
“주말에는 강원도에 있었어요.”
“강원도라면, 바닷가요?”
“네. 정확히는 바닷속에 있었죠.”
“스킨스쿠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저는 바다를 사랑하거든요.”
순간 한참 대화를 엿듣고 있던 아기천사와 가인의 눈이 마주쳤다. 천사의 시선에도 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다를 사랑한다는 재림의 한마디가 미묘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 탓이었다.
“레저스포츠도 즐기시나 봐요. 취미가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그런가요? 근데 이번에는 해양쓰레기만 줍다 왔어요. 날씨가 좋지 않아서.”
“아, 좋은 일 하고 오셨네요.”
“인간이 오염시켰으니 되돌리는 것도 인간의 몫이죠.”
생각보다 더 능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재림을 가인이 지그시 바라봤다.
잔인하리만큼 큰 아픔을 간직하고도 저렇게 밝을 수 있는 동력이 혹 바다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 순간이었다.
“기회가 되면 저도 가보고 싶네요. 바닷속이 어떤 세상인지.”
“지금은 추워서 좀 그렇고…… 내년에 따뜻해지면 꼭 한 번 배워보세요.”
함께 가자는 말 대신 배워보라는 재림의 말에 가인이 애써 미소를 보였다.
창밖에서는 쌍둥이 아기천사들이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서운한 속내를 숨긴 채 미소 짓는 가인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지금 기분은 어때요? 좀 안정됐나요?”
힐끗 가인을 살핀 재림이 물었다.
“네.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지금은 괜찮다고 느껴도 혼자 있으면 느낌이 다를 수도 있어요.”
“저를 노린 게 아니고 금전을 노렸던 도둑이라 걱정하시는 것만큼 무섭진 않아요.”
말끝에 입가를 올리는 가인의 얼굴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재림이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일에 차분하게 대응하는 가인 씨 보면서 내심 놀랐어요. 저라면 집으로 다시 들어올 생각조차 못했을 텐데…….”
“저도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물러서면 왠지 도둑이 좋아할 것 같더라고요.”
“왜요?”
“집을 못 쓰게 만들 만큼 오래 머물렀던 걸로 봐서는 평소 절 가볍게 봤다는 의미니까요. 아마 제가 이 집을 팔 거라 생각했을 거예요.”
가인은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정도만 재림이 알고 있다고 여겼기에 어렵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진실이 빠진 두 사람의 대화는 어딘가 모르게 벽이 세워져 있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재림이 나섰다.
“사실 가인 씨 집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영원 씨가 현장을 담은 영상을 제게 보내줬어요. 가인 씨가 너무 걱정된다고.”
“…….”
생각지 못한 실토에 머리를 쓸어 올리던 가인의 손가락이 부르르 떨려왔다.
재림이 사건의 내막을 다 알고 있었다는 혼란과 거짓말을 들킨 무안함이 그녀를 움츠리게 한 거였다.
“영원이가 공 선생님께 괜한 걱정거리를 안겼네요. 현장은 그랬지만 보시다시피 지금은 괜찮아요. 담벼락 쪽문도 없앴고 담도 높였고요.”
또다시 어색한 웃음을 보인 가인이 이내 정색했다.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어떤 감정을 드러내야 할지 알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런 가인의 복잡한 속을 꿰뚫었는지 재림이 뜻밖의 말을 건네 왔다.
“굳이 제 앞에서까지 괜찮지 않아도 돼요. 충분히 강한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요.”
재림의 한마디에 순간 가인의 정신이 번쩍 뜨였다.
“……공 선생님 앞에서 감정을 들켰는데도 마음이 편한 걸 보니, 오늘은 잘 잘 수 있겠네요.”
“거 봐요. 솔직하니까 보기 좋잖아요.”
“선생님을 알게 된 지 두 달이 채 안 됐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아요.”
“서로를 알아가는 건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관심이 중요한 거죠. 얼마나 진심인지, 그리고 얼마나 지속적인지…….”
공재림다운 대답에 가인이 볼록해진 광대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의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든 까닭이었다.
“참! 아까 전화로 수사가 종결될 거라고 한 것 같은데, 범인이 집힌 건가요?”
“범인을 잡은 건 아니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냈어요.”
“그런데 왜 범인을 잡지 않고 수사를 종결하죠?”
“제 집에 드나든 증거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증거가 없는데 범인 정체는 어떻게 알아냈어요?”
“익명의 제보자가 형사에게 사진과 쪽지를 보냈어요.”
“익명의 제보자요?”
“네. 그분 덕에 괴한의 정체를 알아냈죠.”
“혹시, 가인 씨가 아는 사람이던가요?”
재림이 조심스레 물었다. 몇 해 전 아직 매각하지 않았던 기업을 두고 전쟁터를 방불케 한 난투극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가설이었다.
경찰에서조차 이번 사건을 두고 원한이나 앙금이 쌓인 보복범죄로 간주했었으니까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했는데…… 아는 사람이었어요.”
“아니, 어떻게 아는 사람이 그런 짓을…… 대체 누구죠?”
“……캐나다에 있을 때 가장 친했던 친구 아버지였어요.”
“네?”
“그게…….”
잠깐 망설이던 가인이 곧, 12년 전 친구의 실종사건을 재림에게 털어놓았다.
재림은 듣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안타까운 눈빛만이 이따금씩 흔들렸을 뿐.
“그런데 왜 실종된 친구 아버지가 가인 씨를 찾아온 거죠? 그것도 12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그 친구 가족은 제가 친구를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왜죠?”
진지한 재림에게서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엿보이자 가인이 용기를 냈다.
“실종 당일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저였다는 것과 남자친구와의 통화에서…….”
잠시 말끝을 흐린 가인이 당시 친구의 마지막 음성통화를 재림에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실종된 친구 가족들은 그 ‘가’라는 단어가 가인 씨를 지목했다고 확신한 거군요.”
고개를 떨군 가인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림이 섣부른 결론을 피했다.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는…… 또 오해받을 수 있는 실종자의 마지막 힌트였다.
그사이 거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화가 날 법도 한데 가인은 그저 차분하기만 했다. 증명할 수 없는 누명을 쓴 채 12년이란 세월을 견딘 결과였다.
“물론 저 역시 추측일 뿐이고 딸을 찾지 못한 건 안타깝지만 마지막 통화만으로 가인 씨를 범인으로 확신한다는 건 억측이에요.”
간신히 고개를 든 가인에 어느 때보다 진지한 재림이 말을 이었다.
“가설이지만 실종된 친구가 말한 ‘가’는 ‘가이(guy)’ 즉, 어떤 놈이나 무리를 뜻한 것 같아요. 가인 씨 친구는 집으로 돌아가다 강도나 불량배들을 만난 게 분명해요.”
재림의 가설 때문이었을까……?
순간 잘 감긴 태엽 인형처럼 가인은 기운이 샘솟는 걸 느꼈다.
화려한 상패나 스포트라이트도, 지나친 대중의 관심도 필요 없었다. 그저 진실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의 시선이면 충분했다.
“딸을 찾지 못했으니 아버지로서는 누구에게라도 그 책임을 묻고 싶었을 거예요. 하지만 가인 씨에게 그 짐을 지우는 건 그분도, 또 실종된 딸을 위해서도 옳은 방법이 아니에요.”
제법 설득력 있는 재림의 말에 가인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공재림이 이 집과 무척 잘 어울린다는 한 가지 결과만을 도출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순간 재림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근데, 그동안 그런 오해를 받으면서도 왜 가만히 있었어요?!”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돌아가신 탓인지 더 이상은 절 괴롭히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12년 만의 등장이라…… 그럼 그동안은 딸을 찾느라 나타나지 않았을 테고, 결국 딸을 찾지 못하자 다시 가인 씨를 향한 증오가 폭발한 거군요. 딸을 실종자로 만든 범인이 가인 씨라고 여기는 이상.”
가인이 아무런 대답 없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해 그리고 낙인
그것도 무려 가장 친한 친구를 살해한 ‘살인자’
그녀를 향한 실종자 가족들의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