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열흘 후.
갑작스러운 양 경사 전화에 사무실을 벗어난 수현이 서둘러 종로경찰서로 향했다. 마침 점심시간과 맞물린 게 타이밍이 좋았다.
열흘 전, 수현은 중랑구가 아닌 종로경찰서 양민호 경사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평창동 도로가 인근 야산에서 길고양이가 물어온 불에 탄 엄지손가락 일부가 환경미화원에게 발견되어 근래 신고 된 실종자를 중심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사건과 관련해 협조를 구하는 양 경사에 수현은 어쩔 수 없이 유전자검사를 한 후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잠시 후, 수현과 양 경사가 투박한 사무용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연락이 늦으셨네요.”
“중간에 조사가 길어지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일주일이면 유전자검사결과가 나온다고 장담했던 그는 의외로 담담했다.
“결과는 나왔나요?”
수현이 묻자 살짝 구겨진 하얀 종이컵에 담긴 물을 마신 양 경사가 입을 열었다.
“수사결과 엄지손가락은 송미호 씨의 신체 일부가 맞았습니다. 물론 나수현 씨와 유전자도 일치했고요.”
“…….”
수현은 기분이 이상했다.
송미호에 대한 애증이나 두 번 다시 생모를 볼 수 없다는 절절한 그리움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세상 가운데 이제는 정말 혼자라는 것을 체감하는 중이었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도 모를 새까맣게 타버린 엄지손가락만이 그녀에게 유일한 가족이 존재했었음을 증명할 뿐.
모친 사망에도 수현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양 경사가 그사이 수집된 증거와 더불어 수사가 진전되었음을 알렸다.
그는 피 묻은 니트 일부가 종량제 봉투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발견한 그린우드 오피스텔 주민의 신고로 증거물을 수거했으며 조사결과, 봉투 안에 들어있던 흰 니트는 송미호의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동시에 종량제 봉투 안에 피 묻은 옷가지와 함께 재가루가 담겨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까지 발견된 증거로 미루어 범인은 송미호 씨를 폭행 살해한 후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을 불태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양 경사는 암묵적으로 송미호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명시했다. 또한 중랑경찰서 성 경사와 마찬가지로 수현을 의심하는 경계의 눈빛도 여실히 드러냈다.
“누군지…… 참 대담하네요.”
“혹 송미호 씨 주변에 원한을 품을 만한 인물이 있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그 여자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조차 전 모릅니다. 다만…….”
잠시 말끝을 흐린 수현이 어렵게 입을 뗐다.
“원한을 품을 만한 인물이라면 한 명 알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죠?”
“……저요.”
잠시 후, 경찰서를 나온 수현이 쿵쿵거리며 거친 발걸음을 내디뎠다.
돈 삼백을 다 쓰지 못할 거라고 퍼부었던 악담이 실제 현실이 되었다는 게 수현은 신경에 거슬렸다.
하지만 지금은 저주가 되어버린 생모와의 마지막 대화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이가인에게 송미호의 죽음을 알려야 하는 ‘때’가 온 거였다. 서둘러야 했다.
***
몇 시간 전 가인과 함께 교회 예배를 마친 재림이 그녀와 점심식사를 한 후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가인이 제안한 첫 데이트 장소는 놀랍게도 교회였다. 그런 가인에 토를 달지 않은 재림은 낯선 얼굴로 교회에 들어섰다. 그리고 교회를 벗어날 때까지 그는 거의 말이 없었다. 평소와 다른 재림에 가인이 내심 눈치를 살핀 이유였다.
‘혹시 불쾌했나……?’
가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종교가 없다는 그를 교회로 데려간 건 전도목적이 아닌 축복을 내린 신 앞에 함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물론 사전에 재림에게도 충분히 설명한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이 순간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가 교회에 가자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셨어요?”
찻잔을 내려놓은 재림에 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조금 재미없는 여자네. 뭐, 그런 생각이었어요.”
“실망, 하셨어요?”
“아니요. 가인 씨가 재밌는 사람이라서 만나는 게 아니라는 의미예요. 또 오늘은 같이 감사기도하고 싶다고 미리 말했었잖아요.”
담담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재림에 가인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재림이 힐끗 가인을 살폈다. 사실 그는 가인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근데, 가인 씨는 정말 신이 존재한다고 믿나요?”
“네.”
단호한 가인의 대답에 재림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전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신은 없다고 부정했는데, 가인 씨는 저와 반대네요.”
“전 부모님을 잃은 후 더 매달렸어요. 그 이유를 찾아야 했거든요.”
“그래서, 찾았나요?”
“……조금요.”
카페 유리창 밖으로 주말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게 보였다.
가인은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을 잃은 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가인 또한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신과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그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유를 찾았다니 대단하네요.”
“한때는 공 선생님도 신을 믿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요?”
“글쎄요, 저 같은 경우는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 손에 반강제적으로 끌려간 케이스라…… 처음에는 절, 그다음은 성당, 기도원 그리고 교회였거든요.”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는지 재림이 쓴웃음을 보였다. 반면 처음 듣는 그의 과거에 가인은 귀를 기울였다.
“부친께서 보시기에 안정이 필요해 보였나 봐요.”
조심스레 의견을 전한 가인에 마침 그때가 떠오른 듯 재림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가 형사인 데다 절 돌볼 사람이 없다 보니 불안하셨나 봐요. 근데 가는 곳마다 적응을 못하겠더라고요.”
“분위기가 낯설어서요?”
“아니요. 한쪽에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라, 또 한쪽에서는 인내와 사랑으로 모든 걸 포용하라고 하는데…… 둘 다 수용이 안 되더라고요.”
마치 별 거 아닌 일이었던 양 전하는 재림의 가벼운 말투에 가인은 마음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게 들춰진 재림의 과거사였지만 아직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지 않은 듯했다.
“근데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갔던 교회는 목사님이 꽤 재밌으셔서 그나마 좀 오래 다녔어요. 교인이 한 3,40명쯤 되는 작은 동네 교회였는데 목사님이 어찌나 인간적이신지, 저와도 허물없이 지냈거든요.”
살짝 미소 띤 재림의 이야기에 가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교회가 오늘 처음이 아니었네요.”
“네. 그런데 그때 목사님의 말씀이 제게는 가장 훌륭한 설교였어요.”
“어떤 말씀을 하셨는데요?”
궁금해하는 가인에 목소리를 가다듬은 재림이 마치 목사 흉내를 내듯 손짓까지 해가며 그대로 재연했다.
“네가 왜 절이며 성당이며 교회를 떠도는지 아니? 너는 신에게 따지려고 온 건데 분노 가득한 네 마음을 덮으라고만 하니까 숨이 막히는 거야. 어디서든.”
목사의 설교를 전해 들은 가인이 감정을 숨긴 채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뭔가 대단한 명언을 기대했던 그녀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답이었다.
가인이 기대한 건 분노로 가득 찬 아이 마음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줄 탁월한 목사의 능력이었다.
“조금 특이한 목사님이시네요.”
“그런가요? 근데 전 그때 알았어요. 제가 어디를 가도 괴로웠던 이유를.”
“그래서, 신에게 따졌나요?”
“네. 목사님이 신 앞에서는 어떤 마음이든 정직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정직이 결여된 믿음은 가짜라고요.”
재림은 가인이 전혀 공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봤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의 공감을 얻기 위해 구구절절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니었으니까.
“신에게 따지기 위해 교회를 다녔다니, 뭔가 새롭네요. 어쨌든 잘 극복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지만요.”
“그런 셈이죠.”
“다음에는 공 선생님이 가보고 싶은 곳 추천해 주세요.”
“그럴까요? 그럼 생각해 볼게요.”
재림의 천진난만한 눈웃음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가인의 두 눈 속에 담겼다.
그녀의 눈은 겨울이었고 그의 눈은 봄이었다.
***
가인이 안도영을 만난 건 평일 어느 날, 아주 우연한 순간이었다.
홍나라에 이어 후원해 줄 만한 아이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 방문한 서울 근교의 빛찬보육원 앞이었다.
외부주차 후 보육원 입구를 막 들어서려던 가인과 마침 그곳을 걸어 나오던 도영은 서로를 알아보고도 웃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반가운 우연이 아닌 탓이었다.
똑같이 얼굴이 굳은 두 사람은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지는 보육원 앞에서 그렇게 모른 척 지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 후, 가인과 도영은 근처 카페 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할 얘기가 있다며 잠깐 시간을 내달라는 도영의 ‘아는 척’ 때문이었다.
함께 앉아 있긴 했지만 가인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도영과 완벽히 감정을 숨긴 가인의 얼굴이 사뭇 대조적이었다.
곧 따끈한 차가 테이블 위에 놓이자 가인이 먼저 입을 뗐다.
“안도영 씨가 빛찬보육원에는 어쩐 일이죠?”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곳입니다.”
“……그렇군요. 다음에는 영원이 통해서 단체로 방문해 보세요.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해 가면 아이들이 더 좋아하거든요.”
“노아복지재단 이름으로 후원을 하라고요? 누구 좋으라고요?”
다짜고짜 비아냥대는 도영에 가인이 마치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듯 그를 응시했다.
“여자친구가 복지재단에 근무하는데도 도영 씨는 참 묘한 시각을 갖고 있네요.”
“만난 김에 하나 물읍시다. 회사 판 돈으로 복지재단 왜 만들었습니까?”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말투에 형식적인 미소로 일관하던 가인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게, 무슨 말이죠?”
“복 받으려고? 아니면 명예? 업적? 이미지 세탁? 것도 아니면…… 죄 사함을 받기 위해?”
“…….”
가인이 즉답을 피한 채 눈을 치켜뜨며 도발하는 도영과 맞섰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적장에 날카로운 창을 들이댄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안도영 씨는 그런 목적으로 후원하시나 보죠?”
“영원이에게 내가 바람핀다는 식으로 이간질시켜놓은 게 그쪽 아닌가요? 함부로.”
잔뜩 날이 서있는 도영이었다. 그런 그를 가인이 용서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한 번쯤은 안도영이 따져올 거라 예상하긴 했었다.
이렇게 버릇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