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잠시 후, 방을 구경하고 싶다는 재림에 가인은 그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열 평 남짓의 꽤 넓은 공간에 심플한 가구 배치가 안정감이 있는 방이었다. 그런 가운데 침대 맡 벽에 걸린 원목 십자가와 서랍장 위로 가인의 가족, 반려묘, 그리고 가인의 친구로 보이는 한 여자와 함께 식당에서 찍은 각각의 사진들이 그의 눈에 띄었다.
“뭘 상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단조롭죠?”
“상상한 건 없어요. 다만 방주인과 분위기가 닮아서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네요.”
재림은 액자 속 사진들을 꽤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곧 방을 나왔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외투를 챙긴 재림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그 짐, 12년이나 감당했으면 됐어요. 이제 그만 친구 보내주세요.”
“…….”
예상치 못한 재림의 조언에 가인이 멈칫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친구도 분명 그걸 원할 거예요. 그래야 악연이 된 그 가족과의 인연도 매듭지을 수 있어요.”
“…….”
“아마 그 친구는 누구도 잃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친구는 12년 전 과거로 돌려보내고 이제부터는 가인 씨가 결백하다는 것을 당당히 내세우세요.”
악연이 된 인연.
재림의 표현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수현으로 맺어진 인연이 수현으로 악연이 되어버린 잔혹한 관계.
“참! 증거가 없더라도 경찰이 그분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릴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두 번 다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니까요. 그분과 가인 씨 모두를 위해서요.”
“경찰과 상의한 후 가장 좋은 방법을 강구해 볼게요.”
“그래요. 오늘 꺼내기 쉽지 않은 얘기 해줘서 고마워요.”
재림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오려는 가인을 재림이 막아섰다.
“나오지 마세요. 밖에 천사들이 많아서 심심하지 않거든요.”
“아…… 네.”
“오늘은 뭔가 더 가까워진 느낌이네요. 진지하게 만나봅시다! 그럼 이만.”
당황해 멈춰 선 가인을 뒤로한 채 재림이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가인은 12년 전 식당에서 수현과 함께 찍은 사진 앞에 섰다. 사진 속 그녀들은 22살 풋풋했던 시절답게 하나같이 생기 넘치는 웃음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아. 난 네 아버지 이해할 수 있어. 내 동생을 데려간 유괴범을 찾았다면 나도 그랬을 테니까…….”
가인은 자신을 변호하며 흥분한 재림도, 살인자로 낙인찍어 그녀를 괴롭힌 수현의 가족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입장’이란 그런 것이었다.
어느 편에 서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도 될 수 있는 우리의 모습…… 인간이 간사한 이유였다.
‘입장’이라는 편향된 시선으로 인해 인간이 객관적이기는 쉽지 않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죄를 짓는다.
‘입장’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신이 드디어 내게 축복을 주신 것 같아. 그래서 나 이제…… 너 보내주려고. 응원해 줄 거지?”
캐나다에서 방황하던 가인을 처음 교회로 이끈 건 수현이었다. 그녀는 모든 감정을 삼키기만 하는 가인에게 신의 존재를 알려주었고 가인은 비로소 그 앞에서 감정을 드러냈다.
수현과 작별인사를 한 가인이 뒤돌아섰다.
돌아선 그녀 뒤로 변함없이 웃고 있는 수현이 멀어지는 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
대문 밖을 나선 재림이 담벼락을 따라 가인의 집 주변을 둘러봤다.
공사는 잘 마무리되어 있었다. 문제의 쪽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결코 낮지 않았던 담벼락은 한 층 더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벽을 이루고 있었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부담스러울 만큼 고요한 적막이 어둠을 지배한 가운데 딱딱한 재림의 구두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탁! 차량에 올라탄 재림이 시동을 걸기 전 생각에 잠겼다.
가인에게 사귀자는 말을 에둘러 전한 재림은 타이밍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지지부진하게 감정을 끌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고 여긴 탓이었다. 뻔한 걸 좋아하지 않는 가인에게 의사를 묻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가인의 저택에 들어선 순간부터 대문 밖을 나올 때까지…… 그는 최선을 다했다.
밤 10시 46분. 시간을 확인한 재림이 재킷 속 폰을 꺼냈다. 곧 연결음이 들렸다.
-“…….”
“나 선생님.”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나재희에 재림이 나지막이 그의 호칭을 불렀다.
-“지금, 어디에 있나?”
“이가인 집 앞이요. 이제 막 나왔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지? 이가인말이야.”
“……왜 그러셨어요?”
재림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깊은 탄식이 서려있었다.
이가인 저택에 침입해 그런 현장을 남겨놓은 건 위험천만한 도발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다며 재림을 비롯해 김기준까지 나서며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나재희를 말렸다. 그럼에도 그는 가인을 향한 참을 수 없는 증오의 감정을 기어이 행동으로 옮겼다.
-“내 딸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야. 그런데도 모른 척, 본인 삶을 살고 있잖아.”
“정말, 이가인이 범인이라고 확신하세요?”
-“설령 내 딸 수현이가 강도를 만났다고 해도 분명 이가인은 함께 있었을 거야.”
확신에 찬 나재희에 재림은 어떤 말도 보태지 않았다. 그는 나수현 실종사건에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다만 중요한 단서라면 12년 전 당시, 통화가 끊기기 직전 수현이 남자친구에게 남긴 말이었다.
‘kills’
분명 수현은 자신을 실종자로 만든 범인을 지목했다. 하지만 문제는 주어였다.
수현이 남긴 ‘가’라는 음절은 범인을 특정할 수 없는 다양한 가설을 성립시켰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에 이어지는 답을 찾아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반면 이가인은 나재희의 심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스스로 왜 살인자라고 낙인찍혔는지 나름 이유를 생각한 모양새였다.
누명을 쓴 것도 모자라 자신의 집에서 가상 살인까지 당했으니 억울하고 격분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가인은 분노 대신 나재희를 포용하고 있었다.
“선생님 존재, 이가인이 모두 알아버렸습니다. 경찰도요.”
-“뭐? 아니, 어떻게 알았지? 절대 알아낼 수 없게끔 몇 번이나 동선을 확인했는데…….”
정체가 들켰다는 재림에 나재희는 무척 당황한 듯했다.
“이제 평창동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세요. 마음이 앞서면 일을 그르칩니다.”
재림은 단호했다. 곧 나재희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지푸라기 같은 한 가닥 희망이 사라진다는 게 그는 몹시 두려웠을 터였다. 그 희망을 접는 순간 아버지가 딸의 죽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까……. 무려 12년간 그가 사력을 다해 실종된 딸을 찾아다닌 이유였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올라온 이가인 기사를 보게 되었고 그는 결국 모든 분노를 분출해 버리며 정체를 드러냈다.
재림의 말대로 마음이 앞서 일을 망친 거였다.
“흑흑…….”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통화 너머 버티고 버텼던 한 남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재림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마음은 그가 온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직접 경험한 인생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은 그가 온전히 느낄 수 없는 아픔이었다. 일찍 부모를 잃은 재림의 아픔을 나재희가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다만 그들은 서로가 가진 아픔의 크기를 저울질하지 않았다.
방황하던 재림에게 차분히 건넨 오 목사의 말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진 짐이 가장 무거운 법이니까.
“아직 아무것도 결론지어진 건 없으니 마음 약하게 갖지 마세요.”
-“……차라리 기다리고 있다 죽여 버릴걸 그랬어.”
“절대 그런 생각 마세요. 그건 수현이를 위한 게 아니에요.”
-“딸자식 하나 찾아내지 못한 게 무슨 부모라고……. 난 수현이를 볼 자격도 없어.”
“자책하지 마세요.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 제가 책임지고 반드시 진실을 밝혀낼 겁니다.”
한 가닥 희망을 잃을까 두려움에 휩싸인 나재희를 재림이 붙잡았다.
결코 쉽지 않은 12년 전의 진실이었다. 분명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다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절망과 자책이 뒤섞인 흐느낌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공 선생이…… 복수할 생각이야?”
“만약 선생님 추측이 사실이라면요.”
-“안 돼! 내 딸 일이고 반드시 우리 수현이를 찾은 후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거야.”
“선생님은 이미 정체가 드러나서 안 됩니다.”
-“그럼 공 선생은? 자네 인생은 어쩌고 이런 일까지 감당하려고 그래?! 난 남은 인생 감옥에서 썩어도 되는 나이야. 하지만 공 선생은…….”
“선생님.”
흥분한 나재희에 재림이 침착한 목소리로 그를 가라앉혔다.
“이가인을 죽이는 건 복수가 아닙니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재림이 동승석에 폰을 내려놓았다.
한 뼘 가량 차창을 내리자 차가운 바람에 그의 옷깃과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러나 전방을 주시한 그의 눈빛은 옷깃을 건드리는 바람보다 매섭고 차가웠다.
종로경찰서 양민호 경사에게 나재희 사진과 함께 쪽지를 보낸 익명의 제보자는 바로 재림이었다.
그는 가인의 저택에서 일어난 가상 살인현장을 본 후 곧장 경찰에게 제보했다. 나재희를 보호하고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밤 11시 07분. 차창을 올린 재림이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