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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그곳은 천국이었다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by 해달

“그 문제는 회의 후 다시 결정하죠. 아, 그리고 연쇄살인사건과의 연관성은 처음 추측대로 수사에 혼란을 주기 위한 페이크였습니다. 이런 말씀드리긴 뭐 하지만 연쇄살인범이 노린 게 아니라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되네요.”



한시름 덜었다는 양 경사 얼굴이 조명 아래 두드러지자 가인이 빤히 그를 바라봤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에 매의 눈보다 예리한 눈빛, 거무튀튀한 수염자국이 결코 수더분한 인상은 아니었다.



“그분, 그러니까 나재희 씨는 절대 저를 죽이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수사는 여기서 종결해 주세요.”



수사종결을 원하는 가인은 진심이었다. 그런 가인을 양 경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수사를 종결하면 보호받으실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제게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 경찰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드리죠.”



단호한 가인에 잠시 침묵했던 양 경사가 고개를 들었다.



“나재희 씨는 이가인 씨를 가상 살해한 인물입니다. 그건 분명 이가인 씨를 증오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그런데 왜 이가인 씨는 본인 생명을 방관하는 겁니까?”



경사가 물었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지만 그는 혹 가인이 죽음을 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중견기업 손녀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는 부와 명예를 가졌음에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제껏 언론을 통해 보았던 이가인과 실제의 그녀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양 경사의 속내를 읽었는지 가인이 이제껏 보인 적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생명을 방관하는 게 아니라 그분은 절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입니다.”

“왜 그렇게 자신하시죠?”

“자신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 나재희 씨가 절 죽이려 했다면 가상이 아니라 그때 절 죽였을 겁니다.”

“그 현장이 예고였다고 생각진 않으십니까?”

“네.”



가인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그녀의 눈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분은 수현이도 범인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로서 죄책감을 가진 거예요. 그분도 제가 수현이 실종에 관련이 없다는 걸 알고 계시거든요. 단지, 그날 수현이를 만난 절 원망하시는 것뿐이에요. 마지막일지 몰랐던 수현이를 눈에 담은 게 저니까요.”



한결 밝아진 가인에 양 경사가 우려스러운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수사종결에 관해서는 말을 아꼈다.



“저는 수현이가 분명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요.”



가인이 수현에 대한 믿음을 보인 바로 그때였다.


바람 한 점 새어들 수 없는 협소한 조사실에서 차분했던 가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가인이 느끼기에 분명 볼을 스친 바람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사가 종결되면 연락 부탁드릴게요.”



가방을 든 가인이 일어섰다. 양 경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이가인 씨.”

“네?”



양 경사가 일어선 가인을 올려다봤다.



“이가인 씨는 나수현 씨가 정말 살아있다고 믿으십니까?”

“실종은 사라진 거지, 소멸한 게 아니니까요.”



가인의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실종자는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있다고 믿으면 살아있는 거고 죽었다고 믿으면 죽은 겁니다.”



연이은 가인의 설명에 양 경사가 일어섰다. 순간 방금 전까지도 눈에 띄지 않았던 그녀의 반짝이는 십자가 목걸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수사가 종결되면 연락드리죠.”



***



공사가 끝나자 3주간의 호텔생활을 정리한 가인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괜찮을 거라 여겼던 그녀의 마음은 집안으로 들어서자 금세 긴장감에 휩싸였다.


엉망이 된 저택을 복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가며 노력했지만 사건 이전과 똑같은 향수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가인으로서는 인내심을 가져야 할 시간이었다. 동생 서인을 기다리기 위해서는.


거실 벽면에 걸린 가족사진을 바라보는 가인 옆으로 영원이 다가왔다.



“와! 전보다 사진이 훨씬 커졌네?! 이 정도면 벽지도 필요 없겠는데?”



괜한 너스레를 떠는 영원에 가인이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복구되긴 했지만 범죄현장이기도 했던 만큼 영원은 가인 혼자 들여보내는 대신 수현까지 대동하며 들이닥쳤다.


잠시 후, 집안을 둘러본 영원과 수현이 저녁식사 준비를 위해 마트로 향했다. 끈질긴 영원의 설득으로 집들이 겸 공재림을 초대한 거였다.


혼자 남은 가인의 얼굴은 금세 굳어있었다.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 침대에서 벌어진 가상 살인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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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 침대, 벽지, 화장대, 전등까지…… 모든 것을 바꿨음에도 바꿀 수 없는 게 있었다.


기억.


문득 가인의 머릿속에 얼마 전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된 악플러 최호준이 떠올랐다. ‘이블데드’라는 닉네임답게 죽음과 관련한 악플을 주로 남겼던 인물이었다.



-일가족 올킬! 이가인, 다음은 누구?

-이가인과 친해지면 제 명에 못 삼. 후덜덜!

-이가인 사주 : 단명의 귀신!



그가 남긴 악플은 구구절절하지 않았다. 그저 가인이 ‘죽음의 기운’을 갖고 있다는 반복적이고도 임팩트 강한 어조로 그녀를 흑화 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썼을 뿐.


가인이 가상 살인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서둘러 마무리하려는 이유였다.


만약 범인 나재희의 정체가 언론에 드러난다면 12년 전 실종된 나수현과 함께 가인의 이름이 거론될 게 뻔했으니까…….


자칫 최호준이 남기고 간 악플을 대중이 정말 믿을까 싶은 깊은 두려움이었다.



“…….”



물끄러미 침대를 바라보던 가인이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웠다.



“나는…… 살해당했다.”



오른손으로 심장을 어루만지는 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선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마치 돌을 던지는 아이에 화도 내지 못한 채 머리만 긁적거리는 동물원 원숭이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가인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



저녁 7시.


초인종 소리와 함께 인터폰 화면 가득 얼굴을 들이댄 재림이 곧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후…… 웅장하네.”



대문에서 현관까지 이어진 드넓은 정원을 보고서야 재림은 가인이 기업가 손녀였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초겨울로 접어드는 11월 말이라 그런지 나무들 대부분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었다. 그런 가운데 특이한 광경이 그의 눈에 띄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두 아기천사의 분수 동상이었다. 천사가 물병을 기울여 흘려보내는 물을 그 아래 그릇을 받친 천사가 커다란 항아리에 붓는 형상이었다.


그러나 재림은 곧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천국에 온 듯 정원 곳곳에 놓인 크고 작은 아기천사 동상들이 저마다 다른 형태로 재림을 환영하고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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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아기천사, 잠든 아기천사, 하프를 켜는 아기천사, 찬송가를 부르는 아기천사,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아기천사 등등 언뜻 보아도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아기천사동상들이 정원을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하얀 날개에 평온한 얼굴이었다. 동상 옆으로는 둥근 공 모양의 은은한 무드 조명이 마치 천국의 길을 잃지 않도록 땅을 밝히는 중이었다.



“어쩐지…….”



재림은 그제야 자신을 수호천사에 비유한 가인의 동심을 이해했다. 이런 세상을 매일 맞이하는 그녀에게 천사라는 존재가 얼마나 익숙했을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재림마저도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동화 같은 정원을 지나 그가 현관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인이었다.


먼저 환한 웃음을 보인 건 재림이었다. 재림은 인사 대신 밝은 얼굴과 함께 꽃다발을 들어 보였다. 담담하려 애썼던 가인의 입가가 눈앞의 꽃처럼 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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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이 가인 품에 꽃다발을 안겼다.



“역시 꽃은 주인을 만나야 생기가 돋네요.”

“……감사해요. 아, 밖에서 이럴 게 아니라 얼른 들어오세요.”



가인이 앞서자 살짝 긴장한 재림이 처음으로 그녀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



정원에서 이미 짐작했지만 가인의 거대한 성은 재림의 상상을 초월한 세상이었다.


범상치 않은 엔티크 한 거실 소파와 장식장, 고가의 각종 소품들이 과거와 현재의 절묘하고 화려한 앙상블을 연출하며 처음부터 시선을 압도했다.


그런 재림의 눈에 띈 건 단연 거실 벽에 걸린 대형 가족사진이었다.



“가인 씨가 어머니를 참 많이 닮았네요. 어머니가 무척 미인이세요.”

“어릴 땐 아빠 닮았다는 얘길 더 많이 들었는데 커서는 엄마를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버님도 닮았어요. 당차고 차분한 리더십이.”



뚫어져라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는 재림에 가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복잡하게 뒤엉킨 긴장감이 사라지며 일순간 안식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가인에게 공재림이란 그런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가인은 브레이크 없는 감정의 속도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제어가 되지 않으면 어딘가에 충돌해야만 멈출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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