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고작 그런 이유였나요? 날 싫어하는 이유가.”
“…….”
“좀 유치하네요. 영원이가 많이 힘들겠어요. 받아주느라.”
가인은 마치 신선한 생크림을 가득 채운 촉촉한 롤케이크처럼 부드러운 말투로 일침을 날렸다. 부드러움 속, 그렇지 못한 비아냥이 도영을 더 자극한 순간이었다.
“아니요. 복지재단을 설립했다는 기사를 본 날부터 싫어했어요. 이가인 씨.”
“이유가 무척 궁금해지네요. 영원이 아니면 엮일 일 없는 인연인데…….”
“나도 그러길 바랐는데 불행하게도 엮였더라고요. 하필 악연으로.”
말끝에 웃는 도영의 얼굴은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그의 도발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가인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우리가 대체, 어떤 악연으로 엮였다는 거죠?”
“안성식. 미래유통 안산 물류센터 운송팀장.”
“그런데요?”
“11년 전 돌아가신 제 아버지예요. 운반차량 끼임 사고로 인해.”
찻잔을 들어 허브 향을 음미한 가인이 차분히 잔을 내려놓았다.
11년 전이라면 그녀의 부친 이태진이 회사를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안성식의 아들 안도영이 여전히 품고 있는 앙금이라면 당시 사고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물론 가인은 그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가인이 잠시 미래유통을 맡았던 6개월 이전에 일어난 사고인 데다 보고 받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도영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 일을 언급했다는 건 필시 도의적인 책임을 지라는 압박이었다.
가인이 잠시 고민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부친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 책임을 감당하자는 것이 고민의 결론이었다.
“부친께서 세탁소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 보네요.”
“망해서 취업하셨죠. 하필 미래유통으로.”
“저는 몰랐던 일입니다. 한데 보상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모양이군요.”
“보상? 하! 하하. 하하하하!”
느닷없는 도영의 실소에 일순간 잠잠해진 카페 안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윗세대에서 벌어진 일을 마치 연대보증처럼 책임지라고 하는 막되 먹은 모양새가 되레 우스꽝스러운 도영이었다. 하지만 돈 문제가 걸려있으니 망나니 같은 부끄러움쯤이야 잠깐이라고 여길 만도 했다.
돈이 우상이 되어버린 세상에 안도영 또한 고인이 된 부친을 이용해 한몫 챙기려는 뻔하디 뻔한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
그러나 보상 전, 가인은 경박스러운 저 웃음의 의미를 꼭 알아야겠다는 다짐이었다.
31살이지만 철부지 아이 같은 도영을 인내와 사랑으로 용서하더라도 기싸움에서까지 저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정색한 도영이 그녀를 노려봤다.
“역시 부전여전이네. 어쩜 저렇게 이태진 사장과 똑같은 말을 하지? 그 사고가 거기서 몇 번째 인지는 알아요?”
“원하는 게, 뭐죠?”
“원하는 거 없어요. 모든 건 ‘때’라는 게 있는데, 그 ‘때’가 지났거든.”
“보상을 더 해주면 그 응어리가 좀 풀리겠어요?”
“아니요. 난 이가인 씨 가문을 평생 저주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지금 충분히 보상받고 있어요.”
가인 일가를 향한 거침없고 노골적인 도영의 공격에도 가인은 차분함을 유지했다.
고작 이 정도에 흥분하기에는 발바닥을 찌르는 험난한 돌길을 끝없이 걸어온 그녀였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내 앞에서 지난 일을 꺼내는 거죠?”
“기억하라고요. 안성식이라는 이름.”
말끝이 흐려지며 살짝 뭉개지는 도영의 음성이 가인의 귓가에 들려왔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니 가인은 자신에 대한 도영의 광기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부친의 사고로 세상에 악을 품은 출구 없는 응어리가 가여워 보이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어떤 일은 간혹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다.
가인이 그렇듯 안도영 또한 그런 것뿐이었다. 단지 표현방식이 동일하지 않을 뿐.
“기억할게요. 안성식 팀장님.”
숙연한 얼굴로 기억하겠다는 가인에도 믿지 않는 양 도영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보자고 한건, 그쪽이 재림 형과 만나지 않았으면 해서요.”
도영의 입에서 별안간 공재림이 언급되자 인내와 사랑으로 차분함을 유지했던 가인의 눈빛이 돌변했다.
“두 사람 진짜 안 어울려요. 재림 형이 너무 아깝거든요.”
“그건 안도영 씨가 관여할 영역 아니라는 거, 잘 알 텐데요?”
남의 연애사에, 그것도 감히 재림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려는 불청객은 잘 참아왔던 가인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난 관여해도 돼요. 자격이 있거든.”
은근 말을 놓아가며 독기 어린 눈빛을 쏘아대는 도영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가인을 연신 자극했다.
가인은 그녀가 합정동에서 목격한 도영을 영원에게 얘기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자격’이라는 명분을 주었다고 여겼다. 자신의 연애사에 끼어들었으니 그 또한 가인의 연애사에 끼어들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안도영 씨와 공 선생님은 길이 달라요. 단지 친한 사이라고 함부로 상대 인생에 훈수 둘 자격이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아까 말했잖아요. 재림 형이 아깝다고.”
“안도영 씨가 나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해요?”
“이가인 씨는 나름 감춘다고 노력하는데,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그럴 리가요.”
“혼자만 세상 무거운 짐 다 짊어진 듯한 그 얼굴이 개역겹다고.”
도영의 거친 말투에 가인에게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눈에도 한심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러자 단숨에 이를 알아본 도영이 마치 흥이 난 듯 조롱 섞인 비웃음을 보였다.
“이가인 씨는 본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최소한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난. 그런데 가만 보니까 안도영 씨는 내면이 많이 꼬였네요. 누구나 갑작스럽게 가족을 잃을 수는 있지만 모두가 그렇게 꼬이지는 않는데, 안타까워요. 극복하지 못해서.”
“그건 극복하는 게 아니야. 받아들이는 거지. 그래야 남은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거든.”
“받아들인 게 이 정도라면 심각한 거 아닌가? 잃어버린 시간이 꽤 많겠네요. 안도영 씨는.”
가인은 누구에게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안도영 또한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서로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는 이유였다.
“역시, 재림 형이 왜 그렇게 이가인 씨를 좋아하는지 알겠네요.”
갑자기 태도를 바꾼 도영이 가인은 반갑지 않았다.
“안도영 씨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거, 영원이도 알고 있나요?”
“왜요? 모른다고 하면 가서 또 일러바치게?”
“난 영원이가 행복하길 원해요.”
“나보다 더할까?”
“안도영 씨. 양지로 나올 생각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음지로 끌어들이진 마세요.”
가인의 일침에 살짝 입꼬리를 올린 도영이 마치 곤충을 관찰하듯 빤히 가인을 바라봤다. 방금 전과 같은 독기는 사라졌지만 무척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재림 형이랑 잘해 봐요. 그리고 영원이가 아끼는 친구니까 충고하나 하자면.”
“하지 마세요. 필요 없으니까.”
“재림 형은 한 번 아니다 싶으면 무섭게 돌아서요. 천사가 악마로 바뀐 달까?”
도영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참! 그리고 나는 꼬인 게 아니라 사람을 분별할 줄 아는 것뿐이에요. 좀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그렇지.”
가인이 아무런 대꾸 없이 시선을 돌리자 정중히 허리를 굽힌 도영이 깍듯이 인사를 했다. 가인을 향한 꼬인 그의 마음을 방증하는 모습이었다. 가인 또한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대단한 분의 귀한 시간 잘 썼습니다. 그럼 이만.”
곧 카페를 나간 도영이 사라지자 긴장이 풀리며 두통이 몰려왔는지 관자놀이에 손을 올린 가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근래 들어 최악의 시간이었어.”
카페를 나온 가인이 곧장 차량에 올라탔다. 저녁에 잠깐 들르겠다는 수현의 메시지를 확인한 후였다.
***
밤 9시쯤 가인의 집에 온 수현은 기다리고 있던 그녀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현은 먼저 2년 전 자신의 삶에 생모가 등장했다는 사실과 함께 실종된 생모 송미호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동시에 경찰이 자신을 유력한 용의자로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 정도 정황으로는 널 의심한다 해도 경찰이 할 수 있는 건 없어. 무엇보다 넌 결백하니까.”
수현의 쉽지 않은 고백에 가인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경찰도 범인도 마치 어디선가 절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요.”
“시선은 의식하는 순간 굴복하는 거야. 나처럼…….”
진심 어린 조언에도 딱히 반응이 없자 가인은 혹 수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무죄를 입증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수현은 그제야 감사하다는 말로 약속에 화답했다. 수현이 가인에게 송미호의 존재를 밝힌 목적이 달성된 순간이었다.
자신에게는 없는 힘과 권력 그리고 재력.
그렇다고 해서 수현이 딱히 가인에게 고마움을 느낀 건 아니었다. 당연한 거였으니까.
“대표님은 공재림 선생님과 결혼하실 건가요?”
목적을 달성하자 수현이 화두를 돌렸다.
“알 수 없지. 결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공 선생님만 좋다고 하시면 결혼하시겠네요.”
“아직은 꿈같은 얘기야.”
“공 선생님께서 잘해주시나 봐요.”
“……뭐랄까? 좀 동화 같은 표현이지만 꼭 수호천사가 나타난 느낌이야.”
미소가 번진 가인과 달리 미세하게 입을 삐죽거린 수현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창가를 기웃거리던 아기천사들이 그녀 눈에 띄었다. 지상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내려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순진한 아이들.
하지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하얀 날개를 가진 냉정한 녀석들이기도 했다.
“결혼 후에도 평창동에 계실 거죠?”
“동생 기다려야지. 아마 공 선생님도 이해해 주실 거야.”
이미 재림과의 미래를 꿈꾸는 가인을 뒤로한 채 수현이 일어섰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수현이 현관으로 걸음을 옮기자 가인이 따라나섰다.
“수현아, 모친 장례 치러드려야지.”
“어차피 올 사람이 없어서요.”
“그래도 인사는 해. 후회 없으려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가까운 듯 먼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일단락됐다.
*
정원을 걸어 나오는 수현의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3년 전, 이 저택에 처음 발을 들인 수현은 웅장한 규모에 기가 눌리다 곧 가인이 외딴섬 가운데 표류하는 외톨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다행이라 여겼었다.
그 정도의 결핍은 있어야 신이 불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가인이 수현은 몹시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녀 기준, 이가인은 그런 행복을 누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제야 수현은 신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는 생각 했다.
그 중심에는 이가인에게 행복한 미래를 심어주고 있는 인물, 공재림이 있었다.
“신이 공평하다는 걸 증명하려면 이가인은 행복해서는 안 돼.”
정원 가운데 멈춰 선 수현 눈에 아기천사들이 보였다. 살벌하리만큼 매서운 눈빛이 천사들을 향한 순간이었다.
“입 다물어라. 박살 나고 싶지 않으면.”
수현의 협박에 흠칫 놀란 아기천사들이 저마다 입을 가렸다.
“그래도 다행이야. 상대가 공재림이라서.”
수현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재림이 수호천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가인 옆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거라는 사실 또한.
대문 밖을 벗어난 수현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순간 수현을 뒤따르는 그림자 사이로 거대한 날개를 가진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그림자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