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서울 근교를 오가며 가인과 만남을 이어온 재림이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일요일 오후, 교회 앞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온 가인을 태운 재림이 어디론가 차를 몰았다.
“오늘은 제가 정한 곳으로 갈 건데, 괜찮죠?”
“네. 지난번 약속했잖아요.”
“기대해도 좋아요.”
자신 있어하는 재림에 덩달아 가인의 기대도 한껏 부풀었다.
잠시 후 서울의 한 놀이공원 앞 주차장에 그의 차량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 다 왔어요.”
“…….”
멀지 않은 거리에 큼지막한 놀이공원 간판이 보이자 초점을 잃은 가인의 눈빛이 방황하기 시작했다. 금세 이마에 식은땀도 맺혔다. 그녀는 티슈를 꺼낼 새도 없이 급히 손으로 땀을 닦아냈다.
6살 가을소풍을 마지막으로 가인은 더 이상 놀이공원을 찾지 않았다. 그녀의 부친 이태진이 아이들을 위해 5년간 공들여 완성했던 꿈의 놀이공원도 폐쇄했다.
간혹 학교에서 놀이공원으로 소풍이라도 갈 양이면 도미연은 가인을 결석시켰다. 과거 어두운 기억에 괴로워하는 아이를 위한 특단의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처절한 노력에도 가인은 결국 범죄현장이 된 놀이공원의 악몽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문제는 공재림이었다.
28년 전 그녀의 과거를 알 리 없는 그는 놀이공원 입구부터 북적거리는 인파에 들떴는지 서둘러 주차할 곳을 찾는 중이었다.
“정적인 일상에는 가끔 텐션을 올려주는 자극이 활력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활동적인 취미를…… 즐기시나 봐요.”
요동치는 심장을 간신히 누른 가인이 힘겹게 입을 뗐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그녀였다.
그럼에도 가인은 모든 인내심을 끌어올려 버티는 중이었다. 지나간 과거로 재림을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제가 즐겨하는 액티비티는 외곽으로 나가야 해요. 패러글라이딩이나 집라인 같은 거라…… 지금은 시간도 부족하고 좀 위험하기도 해서 가인 씨와는 놀이동산이 딱 좋을 것 같더라고요. 다양한 놀이기구가 많으니까요.”
눈치 없이 마냥 신이 난 재림과 불쾌한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가인이었다.
가인의 얼굴은 마치 흡혈귀에게 피를 빨린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비 오듯 식은땀이 흥건함에도 복잡한 주차환경에 재림은 미처 가인을 돌아보지 못하는 중이었다.
‘난…… 할 수 없어.’
마른침을 삼킨 가인이 아직 풀지 않은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벨트가 풀리는 순간 맞닥뜨려야 할 악몽 같은 과거에 발을 들이지 않기 위함이었다.
“놀이동산…… 좋아…… 하세요?”
점점 호흡이 거칠어진 가인이 좌석 헤드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어릴 땐 자주 왔었는데 서른 넘어서는 처음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도착하고 보니까 다시 아이가 된 기분이네요.”
“…….”
“제가 가인 씨 덕에 텐션을 낮추니까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가끔씩 가인 씨 텐션을 올려주면 좋겠다 싶었어요. 어때요? 좋을 것 같지 않나요?”
“…….”
대답이 없자 그제야 고개를 돌린 재림이 의식을 잃은 채 고개를 떨군 가인을 발견했다.
“가인 씨! 괜찮아요?”
급히 차를 멈춰 세운 재림이 가인의 어깨를 흔들자 쳐진 그녀의 고개가 재림에게 기울었다.
“이가인 씨!”
맥박은 정상이었다. 다만 의식을 잃은 것으로 보아 뭔가 쇼크를 받은 듯했다. 가인을 똑바로 앉히고 좌석시트를 뒤로 젖힌 재림이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조금만 참아요. 내가 꼭 살릴 테니까…….”
‘이가인, 넌 절대 죽으면 안 돼.’
양가의 마음을 담은 채 재림은 주차장을 빠져나와 빠르게 도로에 진입했다.
과속 딱지를 끊어도 상관없을 긴박한 순간이었다.
*
병원으로 향하던 재림의 차량은 갓길 한가운데 멈춰 서있었다.
한 뼘 가량 창문을 내린 차창 안으로 긴박했던 순간을 가라앉히는 바람이 스며들었다. 소소한 바람에 눈을 깜박거리며 정신을 차린 가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창백했던 그녀의 혈색도, 볼을 타고 흘러내렸던 땀방울도 사라진 후였다.
조금 전, 눈을 뜬 가인은 병원으로 향하던 재림의 차량을 멈춰 세웠다.
놀이공원을 벗어나자 거짓말처럼 정신이 든 그녀는 마치 등교하기 싫어 학교 앞에서 꾀병을 부린 아이처럼 어설픈 꼴이 되어버렸다.
가인은 재림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정신이 돌아와 힐끗 옆을 돌아본 순간 한 눈에도 심각한 얼굴로 질주하는 재림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팔다리가 경직되고 의식을 잃어가던 놀이공원의 공포가 한순간에 휘발된 다소 민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병원까지 간다면 더 민망한 현실과 맞닥뜨려야 했을 가인이었다.
그녀가 무섭게 질주하던 재림의 차를 멈춰 세운 이유였다.
“정말 병원에 안 가 봐도 괜찮겠어요?”
“네. 잠깐 어지러웠을 뿐, 지금은 괜찮아요.”
“그럼 더 확인해 봐야죠. 그러다 병 키워요.”
“그게…… 그러니까…….”
깨끗하고 매끄러운 가인의 이마에 이슬 같은 땀방울이 다시 맺혔다.
그녀의 모든 것을 바꿔버린…… 거대한 공포와 트라우마의 시발점이 된 놀이공원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28년 전만 해도 대중은 유치원생을 유괴 살해한 차진수 기사에만 집중했을 뿐, 본래 납치 대상이 미래유통 손녀였다는 가사회되지 못한 구체적인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당시 필사적으로 기사를 막은 가인의 부모와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가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재림이 그 과거만은 알지 못하길 바랐다.
가능한, 영원히.
“실은 제가 놀이기구를 무서워해요. 어릴 때 회전목마를 타다 떨어졌었거든요.”
“이런……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놀이공원 싫어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제가 좀 특별한 케이스죠.”
“어쨌든 근본원인은 저한테 있었네요.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자책하는 재림에 가인은 살짝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큰 고비를 넘긴 것 같아 안도감이 일었다.
두 번 다시는 놀이공원에 발을 들이지 않을 공재림일 테니까.
“그나저나 저 때문에 계획을 망쳐서 어떡하죠?”
“망치다니요. 전혀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가인 씨 의식 잃고 얼마나 긴장했는지 과속딱지 떼일 만큼 속력을 높였거든요. 이보다 더한 스릴이 있겠어요?! 완전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었는데.”
그제야 눈에 힘이 풀린 재림이 밝게 웃었다.
“아직 시간 있는데, 그럼 전시회는 어때요?”
“그것도 좋긴 한데 오늘은 한강변으로 가요. 전경 보면서 따뜻한 차 마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요.”
몇 시간 후, 한강변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신 후 근사한 저녁식사를 대접한 재림은 가인을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차량에 올라탔다.
그런데 가인이 벨트를 매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앞으로 딱 열 번만 더 만나보고 결정해요. 우리.”
“결정이라니…… 뭘요?”
“결혼이요.”
***
일상으로 돌아간 수현에게 뜻밖의 위기가 닥쳐온 건 가인이 재림과 함께 꿈같은 미래를 그리고 있던 일요일 저녁이었다.
수현이 송미호 살인사건 용의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배불뚝이는 더 이상 그녀 집을 찾지 않았다. 수현을 위한 작은 힘도, 작은 위로도…… 짧은 인사도 없었다.
발길을 끊은 배불뚝이에 수현은 조금도 서럽지 않았다. 오히려 징그럽도록 출석도장을 찍었던 놈이 자신의 인생에서 삭제되었다는 사실에 수현은 날아갈 듯 기뻤다.
이제 더는 악취 나는 쓰레기와 몸을 뒤섞으며 오물을 묻히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온전한 그녀만의 주말은 그렇게 평화롭게 지나가는 듯했다.
운동을 마치고 오피스텔로 돌아온 저녁때까지만 해도.
“왜 이러지?”
당황한 수현은 문 앞에 멈춰 선 채 꼼짝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도어록 비밀번호가 틀렸다는 요란한 경고음이 울린 지 벌써 세 번째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번이 틀릴 수도 바뀔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수현이 설정한 번호였고 오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드나들었던 문이었으니까.
“후…….”
심호흡을 한 수현이 도어록 위로 다시 손가락을 올렸다. 집중해서 한 번 더 또박또박 눌러보자는 의지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철컥!
수현이 채 번호를 누르기도 전 문이 열렸다. 절대 안에서 문을 열 수 없는, 오직 그녀 혼자 살고 있는 집이었다. 빠른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
가만히 문을 열어젖힌 수현이 낯설어진 그녀 집에 발을 들였다.
“문 닫는 게 좋을 거야. 온 동네 소문나고 싶지 않으면.”
앙칼지고 기 센, 힘을 가진 자의 영락없는 횡포였다.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한 것도 모자라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모습이 흡사 송미호를 연상케 했다.
어림잡아도 10cm가 훨씬 넘는 뾰족한 빨간 구두 굽은 날 선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수현은 여자 옆에 그림자처럼 서있는 한 남자를 보고서야 상황을 인지했다. 선글라스에 눈을 숨긴 검은 양복의 근육질 남이었다.
조용히 문을 닫은 수현이 안으로 들어서며 슬리퍼를 신었다. 그러나 잔인하리만큼 사악한 정적은 이미 그녀를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대역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었다.
“네가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