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재림이 결혼을 언급한 순간 가인은 공포와 스릴러, 압도적인 서스펜스로 관객의 오감을 사로잡은 뒤 생뚱맞은 로맨스로 반전 결말을 선사하는 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눈앞의 그는 분명 웃고 있었고 속력을 내자는 그의 자동차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그 말…… 진심인가요?”
“설마 제가 결혼을 장난 삼아 말하겠어요?”
다소 억울해하면서도 재림은 금세 웃음을 보였다.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부담, 되나요?”
“아,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그럼 됐어요.”
나름 눈치를 살폈었는지 바짝 힘이 들어갔던 재림의 눈빛이 안도의 숨과 함께 힘이 풀렸다.
재림이 분위기 좋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결혼이야기를 꺼낸 건 어쩌면 무모할 수도 있었던 승부수였다. 다행히 가인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끝이 있을 미래를.
“전 감당할게 별로 없어요. 대체로 맞춰주는 편이거든요.”
재림이 너스레를 떨며 대화를 가볍게 이끌었다.
“벌써 어필하는 건가요?”
“이미 느꼈겠지만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싫어해서요. 딱히 고집도 없고요.”
“세상에 고집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없죠. 하지만 그걸 인지하는 사람은 있어요. 저처럼.”
재림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인지해도 고집 피우는 건 똑같던데요?”
“고집은 결과를 책임질 수 있을 때만 부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주 우스운 사람이 되거든요. 본인만 모를 뿐.”
나름 논리적인 재림의 설득력에 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녀는 이런 소소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 순간이 마냥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신과 가족이 된다는 건 평범하지 않은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가인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묵직한 주제가 남아있는 셈이었다.
“만약 저와 결혼하게 되면 공 선생님에게도 많은 시선이 쏠릴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 시선이라는 게 각종 추측이 난무할 거라는 거죠? 가령 제가 가인 씨 재력을 보고 결혼한다든지…….”
무거운 분위기를 싫어하는 재림답게 묵직한 주제에도 그는 담담했다. 아직 그 세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순진한 청년의 반항기 가득한 자신감이었다.
“생각만큼 쉽지 않아요. 무시한다는 게.”
“쉽진 않겠죠. 하지만 어떤 사람도 모두의 마음에 들 순 없어요. 만약 그것을 목표로 살아간다면 그건 실패한 인생이에요.”
“……그렇겠죠.”
모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며 살아온 가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를 저격하는 무지성 사냥꾼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건 사실이었다.
“가인 씨는 신이 공평하다고 생각해요?”
“네. 누구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시니까요.”
“그럼 고집 없는 사람이 없듯, 근심 없는 사람도 없겠죠. 그 공평한 신 덕분에.”
가인을 위로하고자 건넨 말투 속, 마치 틀어진 창틀처럼 신을 비꼬는 재림의 속내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유독 그를 민감하게 만드는 대상이기도 했다.
“제가 처한 환경에 너무 낙담하지 말라는 말, 맞죠?”
“역시 찰떡 같이 알아들으시네요. 괜히 이가인이 아니죠.”
“결혼하면 서로 맞추고 배려해야 할 게 많은데 최소한 우린 그런 면에서는 마찰이 없을 것 같네요.”
“벌써 그런 것까지 생각했어요? 와, 누가 보면 결혼해 본 줄 알겠어요.”
재림이 전방을 주시한 건 가인에게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걸맞지 않은 굳어버린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니.
“사실 저도 가끔은 이해가 안 돼요.”
“뭐가요?”
“신은 왜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들을 일찍 데려가시는지…… 그럴 땐 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저도 가끔은 혼란스러워요.”
“여긴 완전한 곳이 아니니까요. 만약 신이 데려가셨다면 그곳은 완전한 세상이겠죠.”
결혼이야기 도중 갑자기 화두를 돌린 가인에 재림은 딱히 의아해하지 않았다. 룸미러에 비친 가인의 굳은 얼굴을 이미 알아본 까닭이었다.
***
일주일 후.
수현이 자신의 근황을 가인에게 보고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송미호를 살해한 용의자들이 체포됐기 때문이었다.
3일 전 평창동 야산 공터에서 검거된 다섯 명의 피의자들은 송미호에게서 빼앗은 금품을 팔아넘기다 귀금속에 묻은 미세 혈흔을 발견한 금은방 주인장의 신고로 붙잡혔다.
14세부터 19세의 피의자들은 각각 남자 3명과 여자 2명으로 구성된 가출청소년으로 경찰은 그들에게 폭행과 절도, 살인 및 시신훼손 등의 혐의적용을 고려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범행을 확신하는 경찰과 달리 피의자들은 조금 다른 진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장인즉, 순서가 바뀌었다는 의미였다.
사건 당일 새벽 공터에 모인 아이들은 버려진 드럼통에 주어온 나무를 넣고 불을 지피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전에 없던 마대자루가 공터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호기심에 열게 된 자루 속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여자가 몸을 웅크린 채 죽어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한눈에도 심하게 폭행당한 듯 여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고 속옷 차림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었다고 진술했다.
죽은 사람을 처음 목격한 탓에 너무 놀란 나머지 아이들은 자루를 둔 채 도망쳤다고 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모인 아이들은 신고를 하는 대신 다른 머리를 굴렸다고 말했다.
죽은 여자가 착용하고 있던 각종 귀금속, 옷가지와 함께 자루 안에 버려진 지갑을 발견한 이후였다.
결심이 서자 죽은 여자 몸에서 반지와 목걸이 등 귀금속을 갈취한 아이들은 찐득한 피가 잔뜩 묻어있는 지갑을 열어 현금 80만 원을 훔쳤다고 진술했다. 더불어 여자의 신분은 지갑 속에 든 신분증을 통해 알게 됐다고 밝혔다.
더 이상 훔칠 게 없자 아이들은 증거인멸을 위해 활활 타오르는 드럼통 안에 여자를 넣고 불태웠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버려진 옷가지와 타고 남은 재를 비밀봉투에 담아 주택가 쓰레기통에 버린 이유를 묻는 형사에 아이들은 죽은 여자의 가족이 더 이상 실종자를 찾아다니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다는 식의 다소 엉뚱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경찰은 사실 확인이 끝난 범죄행위에 대해 절도 및 시신훼손 혐의로 일단 피의자들을 모두 구속시켰다. 진술의 진위 여부는 아직 가려지지 않았으나 송미호 살인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들임에는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수현이 용의 선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었다. 살인을 입증하지 못한 이상, 그 누구도 용의자가 될 수 있었으니까.
수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이런 미래를 알지 못했던 송미호에게 악담을 퍼부은 게 내심 거슬렸을 뿐.
수사에 진전이 있자 수현은 결과 보고와 함께 김세현과의 일도 가인에게 전했다.
서장과의 불륜관계에 있어 수현은 부끄러움이 없었다. 이가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 다만 가인은 수현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김세현이 곧 버려진다…… 어쩌면 당연한 거야. 불륜의 끝이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건.”
“…….”
“김세현도 불륜으로 그 자리를 꿰찼으니까.”
수현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가 반박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죄’라는 것은 언제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하니까.
“서장도 이 사실을 알아?”
“김세현이 저와 서장 관계를 세상에 밝히겠다고 벼르고 있는 건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럼 서장에게 맡겨.”
“네?”
“아마 수현이 네가 손쓰기 전에 서장이 먼저 수습할 거야. 속물이긴 해도 치부가 겉으로 드러나는 건 끔찍이 싫어하는 인물이잖아.”
다소 섬뜩한 가인의 조언에 수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세현이 불쌍해서는 아니었다. 단지 그녀에게 시간을 주고 싶어서였다. 상처가 컸을 박영일 본처와 그 자녀들에게 용서를 구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 수현의 속을 꿰뚫었는지 가인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음 쓰지 마. 김세현은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될 수 없어.”
*
저택을 나온 수현이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랬듯 그녀의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이 저택을 드나들 때면 항상 그랬다.
이가인은 유난히 들떠있었다. 그사이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듯했다.
“공재림이 프러포즈라도 했나? 풉!”
뒤늦게 정원을 둘러싼 아기천사 동상들이 수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등장할 때면 하나같이 눈을 감거나 손으로 눈을 가리던 천사들이었다. 그랬던 아이들이 오늘은 무슨 영문인지 동그랗게 뜬 하얀 눈으로 수현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신경 끄라고 경고했을 텐데?”
수현이 날 선 반응을 보이자 아기천사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돕겠다는 포용의 손길이었다. 그런 천사들의 손길을 무시한 수현이 딱딱한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대문을 연 수현이 문 밖으로 발을 내딛기 전, 뒤돌아 천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미 늦었어. 그 손을 잡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