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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목격자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by 해달

며칠 후.


경찰 측에서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비밀유지를 하려 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귀신 같이 눈치가 빠른 기자들이 감출수록 곰팡내가 나는 매캐한 냄새를 못 맡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 사건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결정적인 진실을 담고 있었다.


얼마 전 인천의 한 쓰레기 소각장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한 남자가 발견됐다. 관리 직원이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 사이에 묻힌 사람을 발견하고는 곧장 신고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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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쌀쌀해진 12월 날씨에 중장년의 남자는 상하 내의만 걸친 채 손발이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고 했다. 거기다 폭행을 당한 듯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가 즐비했고 의식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고 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된 남자는 이후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남자의 신분을 조사한 경찰은 그가 종로경찰서 서장 박영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서장의 의식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사건을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3일 뒤.


의식이 완전히 돌아온 서장은 충격 탓인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의료진들이 병실을 드나들 때면 화들짝 놀란 어깨를 움츠리며 손발을 떨곤 했다. 병실 앞에 소수의 인력을 배치한 경찰은 면회를 일체 금지시켰다. 수사를 위해 빠른 안정과 회복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틀 후, 서장은 내내 봉쇄했던 입을 떼며 자초지종을 털어놓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은 경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서장이 평창동 연쇄살인마에게 납치되었었다는 진술을 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주말 골프 라운딩 후 사우나를 다녀오던 서장은 귀가 길에 차량에 문제가 생겨 택시에 탑승했던 게 납치의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기억이었다. 서장이 사건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는 결박된 채 감금되어 있었던 배경조차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 단 한 가지, 서장이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게 있었다.


바로 연쇄살인마의 인상착의였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범인은 3,40대가량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라고 했다.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범인의 왼쪽 손등에 역삼각형의 표독스러운 독사 머리가 새겨져 있었으며 자신을 연쇄살인마라고 밝힌 범인은 스스로를 가리켜 ‘품격 있는 구원자’라 소개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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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이유를 묻는 서장에게 범인은 평화를 위해 처단했을 뿐,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덧붙여 배우 지경하 또한 자신의 작품이라고 밝힌 범인은 그녀가 숨지기 전 담배를 쥐어주자 손을 몹시 떠는 게 인상적이었다며 회상하듯 웃었다고 했다.


그렇게 연쇄살인마와 대화를 주고받던 서장은 별안간 날아든 주먹에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고 진술했다.


1차 조사를 마친 경찰은 서장을 신변보호 대상자로 지정하며 24시간 그를 경호하기 시작했고 곧 연쇄살인마가 잡힐 거라는 기대감에 국민들은 동요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퇴원 후 집으로 돌아온 서장은 일절 외출을 하지 않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납치 트라우마로 인해 그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진술을 할 때까지만 해도 서장은 범인을 잡고자 하는 열망에 의지가 대단했다. 그랬던 그가 진술이 끝난 다음날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종일 방 한구석에 웅크려있는 서장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말은 한 가지라고 했다.



“난 약속을 지켰어.”



***



가인은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는 중이었다.


주말 사이 그녀는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위해 재림과 함께 단양에 머물렀다. 마침 따사로운 햇살과 잔잔한 바람이 가인이 마음껏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난생처음 하늘을 날아봤다고 해서 이 순간 가인이 행복한 건 아니었다.


단양에서 서울로 올라온 토요일 밤, 재림은 가인의 집 거실에서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재림이 결혼이야기를 꺼낸 이후 다섯 번째 만난 날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다섯 번의 만남을 뒤로한 채 먼저 약속을 어긴 그는 가녀린 가인의 손가락에 작은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끼워주며 당황한 그녀에게 확신을 주었다.


재림은 가인의 탄생일인 2월 4일, 결혼식을 올리자고 제안했고 그가 가인에게 보여준 견고한 믿음은 곧 그녀로 하여금 추측성 루머 양산이 아닌 결혼발표라는 정면 돌파를 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그렇게 꿈같은 주말을 보낸 가인은 바로 오늘, 외부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준비한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의 헤드라인은 ‘전 미래유통 이강수 회장 손녀 결혼발표’였다.


오전 일찍 유포된 기사는 순식간에 제목만 바뀐 복붙 기사들로 사회면을 도배했다. 바뀐 헤드라인에는 조회수를 선점하기 위해 대부분 ‘이가인’이나 ‘손녀’라는 말 대신 ‘비운의 상속녀’라는 수식어가 올라왔다.


그러나 가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곧 대중들에게 잊힐 수식어였으니까.


똑똑!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일개 치과의사 따위에 빠졌냐며 빗발치는 친인척들의 전화를 뒤로하고 영원이 가장 먼저 대표실을 찾았다.


기사를 보고 달려온 영원의 반응은 해바라기가 만개한 얼굴이 대신하고 있었다. 다소 긴장한 가인을 가라앉혀줄 유일한 지원군이었다.



“이가인! 결혼 축하해!”



영원이 직장 상사가 아닌 친구로서 진심 어린 축하를 가인에게 건넸다.



“고마워. 영원이 네 덕분에 실감이 좀 나네.”

“너, 나 안 만나는 동안 되게 열심히 살았구나?!”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어떻게 3년째 연애하는 나보다 진도가 빨라? 잘 어울린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은 몰랐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란 토끼처럼 커진 영원의 두 눈이 가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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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머! 이거 커플링이야? 지난주만 해도 분명 없었는데?”

“……주말에 꿈같은 일이 있었어. 그리고 지금은 보다시피 용기를 냈고.”

“기자, 유튜버, 악플러들이라면 끔찍이 여겼던 네가 먼저 기사 낸 거 보니까 확실히 알겠네. 공 선생님이 어떤 인물인지.”



영원의 말에 가인이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반지가 가인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마치 재림이 함께 있는 듯한, 그래서 어떤 것도 두렵지 않은 담대함이 그녀 안에 자리 잡은 거였다.


그때였다. 무표정한 수현이 마실 차를 들여온 가운데 한 눈에도 들떠있는 영원과 비교적 침착한 가인이 수현을 의식했다.



“수현아, 너도 기사 봤지?!”

“네. 조금 전에 봤습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이가인이 결혼이라니…… 정말 생각도 못했어.”

“대표님, 결혼 미리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수현이 너도 곧 좋은 사람 만날 거야.”

“…….”



가인의 영혼 없는 덕담에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 수현은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고소를 대비한 자료준비였다.


아침부터 득달 같이 달려온 악플러들은 이미 기사마다 흔적을 남기며 누군가의 불행을 위해 열정을 바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제껏 가인을 조롱하거나 비하했던 것과는 달리 악플러들은 그녀의 결혼 상대자인 공재림을 저격하고 있었다. 이미 그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형성해 대중들을 가스라이팅화 시키려는 악플러들의 광적인 인생낭비가 시작된 셈이었다.


악플러 최효준이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되며 ‘이블데드’는 사라졌지만 지구상에 수많은 바퀴벌레가 알을 낳듯 여전히 양산되고 있는 ‘악’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능이자 선택이었다.


놈들은 가인이 댓글을 잘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가인이 아닌 공재림을 공격해 이 결혼이 무산되도록 쓸모없는 업적에 매달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유독 수현 눈에 띈 댓글이 있었다.


[속보 : 이가인 치과의사 남편 의문사. 이 글은 곧 성지가 된다.]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마당에 피가 거꾸로 솟을 악담이었다. 그럼에도 수현은 당장은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연신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들떠있는 가인이 오늘만큼은 다시없을 행복을 만끽하라는 그녀의 자그마한 자비였다.


얼마 못 가 공재림은 더 이상 가인에게 행복의 아이콘이 되지 못할 테니까.



“식장은? 알아봤어?‘

“교회에서 할 생각이야. 공 선생님도 동의했고.”

“신혼집은?”

“그게…… 우리 집에서 살겠대. 내가 동생 기다린다고 흘리면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더라고.”

“와, 공 선생님은 완벽히 너를 위해 준비된 남자구나!”

“나도 좀 얼떨떨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



조곤조곤 감정을 드러내는 달라진 가인에 영원이 박수를 쳤다. 여전히 감흥이 없는 수현만이 테이블 위에 조용히 차를 내려놓았을 뿐.


수현은 남의 결혼에 관심을 기울일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연쇄살인마로 성가셨던 김세현의 협박은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 납치사건 이후 자택에서 은둔 중인 서장은 김세현과 주치의, 소수의 경찰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침없이 거머쥐었던 독불장군 박영일이 한순간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수현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서서히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가인처럼.


사무실을 나가려는 수현 뒤로 영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늘 저녁 시간 돼?”

“응. 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그럼 편한 시간으로 이따 알려줘.”

“오케이!”



그날 오후, 뉴스에서는 혼수상태에 빠졌던 차진수가 결국 사망했다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가인이 결혼발표 기사를 낸 바로 오늘이었다.


기사를 접한 가인은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먼저 세상 밖으로 발을 디디니 되레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가인의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드러났다.


처음으로 세상을 이겼다는 희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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