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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각자의 길에 들어서다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by 해달

그날 저녁 8시경, 가인 집에 들른 영원은 전할 말을 뒤로한 채 가인의 사정을 챙겼다.



“공 선생님과는 통화했어?”

“응. 퇴근 전에 잠깐.”

“오늘 정신없었다고 하시지?”



영원이 그렇게 묻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영원이 질문을 승화시키지 않았다면 “공 선생님, 괜찮으셔?”라고 물었을 터였다.


오전 일찍 기사가 나간 이후 가인의 결혼상대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몰리자 발 빠르게 입을 턴 누군가와 또 발 빠르게 캐고 다닌 기자에 의해 재림의 신상은 금세 퍼져나갔고 그 후폭풍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결혼을 축하하는 정상적 사고를 가진 댓글이 주를 이룬 반면 그에 못지않은 온 세상 벌레들이 모여든 탓이었다.


가인에게는 ‘비운의 상속녀’란 꼬리표답게 그녀가 끝까지 불행하길 바랐던 다수의 악플러들과 사냥꾼들을 한 방 먹인 짜릿한 승리를 만끽했을 하루였다. 그러나 공재림은 그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발가벗겨진 험난한 현실을 체감했을 게 뻔했다.



“목소리는 담담했는데 무슨 기분인지 아니까 더 안 물었어.”

“잘했어. 그 마음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지.”

“안 그래도 프러포즈받았을 때 괜찮겠냐고 물어봤었는데, 딱 한마디 하더라.”

“뭐라고 했는데?‘

“악플러들이 말하는 미래는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멋지네. 공 선생님.”



3개월도 못 가 이혼할 거라는 확신, 그전에 치과의사가 죽을 거라는 악담, 혹은 이가인이 죽고 남편이 재력가가 될 거라는 예언 등 입에 담기조차 역겨운 저주들이었다.


대중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연예인도 아니고 지지를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인도 아닌, 가인은 그저 성공한 기업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한 가정의 손녀이자 딸이었을 뿐이었다.


가인은 조용히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슬픈 가족사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언론과 남의 불행을 악용해 인간이 얼마나 추악하고 사악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악플러들로 인해 가인은 졸지에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참! 할 얘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사실 오늘 점심쯤 말하려고 했던 건데…….”



살짝 가인의 눈치를 살피던 영원이 말을 이었다.



“나, 도영이랑 결혼해.”



영원의 고백에 가인은 기쁨과 탄식이 교차했다. 축하받았어야 할 영원의 시간을 자신이 빼앗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종일 직원들과 외부 인사들에게 축하를 받은 건 오직 이가인, 그녀뿐이었다.



“어머, 정말 축하해!”

“고마워.”

“날짜는 잡았어?”

“응. 사실 도영이 한국 왔을 때부터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어.”

“……그랬구나. 그래서 언제 하기로 했어?”

“내년 1월 11일. 이미 식장 예약을 끝냈거든.”

“아…… 그동안 너도 바빴겠다.”

“비용 줄이려고 발품 팔았지 뭐. 참! 그리고 말이야…….”



무슨 영문인지 영원이 망설이자 가인은 혹 금전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결혼은 목돈이 들어가는 만큼 사정이 여의치 못한 영원으로서는 부담이 컸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 사정을 충분히 알기에 만약 영원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가인은 아예 살림살이를 선물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나, 싱가포르로 떠나.”

“음? 그게 무슨 말이야?”

“결혼하고 도영이랑 싱가포르에서 살기로 했어.”

“…….”


일순간 가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좀처럼 표정관리가 안 되는 충격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영원이 자신의 곁을 떠날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인이 당황스러운 건 어쩌면 당연했다.



“잠깐이 아니고 아주 가는 거야?”

“응. 이민, 같은 거지. 도영이가 일하면서 자리를 잡아놨더라고.”



영원의 설명에 가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갑작스레 통보하는 영원에 깊은 서운함을 느꼈을 뿐.



“도영 씨가 자리를 잡아놨다니 다행이네. 그나저나 너 가고 나면 누구한테 네 업무를 맡겨야 할지, 좀 난감하다.”

“인재가 넘치는 세상에 무슨 소리?! 내가 뽑아놓고 갈 테니까 걱정 마.”

“……그래. 그럼 너만 믿을 게.”

“응. 나만 믿어.”

“이제 우리도…… 각자의 길을 가는구나.”



말끝을 흐리는 가인에 영원이 밝은 미소를 보였다.


오늘은 서로의 결혼을 축복하는 좋은 날이니까.



“너한테 어떻게 말할까 고민했었는데 공 선생님 덕에 마음이 가벼워졌어.”

“네 마음이 편하면 됐어.”



가인과 영원은 지난날들을 회상하며 꽤 오랜 시간 담소를 나눴다. 그런 가운데 가인은 내년 초 집을 비워줘야 하는 영원을 고려해 결혼식 전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했다.


물론 영원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제안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에게는 결혼 선물이라는 가인에 영원은 코끝이 빨개지며 마치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렸다.



“정말 고마워.”

“고맙긴. 날 위한 거야. 참! 결혼식 전날은 내 방에서 같이 자자. 마지막 추억이잖아.”

“좋아!”



어느새 밝아진 가인에 영원이 와락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이자 미소를 머금은 가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가 가진 추억이 있다는 게, 참 좋다.”



***



도영이 초인종을 누른 건 밤 9시가 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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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을 훑고 있던 재림이 문을 열자 정장외투에 백팩을 멘 도영이 서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퇴근 후 곧장 온 듯했다.



“나 좀 들어갈 게.”



다짜고짜 재림을 밀치고 들어선 도영이 가방과 외투를 내려놓고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들었다.



“맥주 있는데, 마실래?”



재림이 차분히 물었다. 뭔가 단단히 화가 난 도영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대충 짐작되는 바는 있었다. 종일 빗발친 녀석의 전화를 씹어버린 재림이었으니까.



“됐어. 술기운에 꼬장 부린다고 내쫓기지 않으려면 참아야지.”



도영의 말투는 확실히 깊게 날이 서있었다. 어쩌면 곧 악플러들처럼 맹독을 내뿜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재림은 안도영이라면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그사이 생수를 비워버린 도영에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든 재림이 침대 끝에 걸터앉자 그를 쏘아보듯 서있던 도영이 뒤따라 간이소파에 앉았다.



“캬아! 오늘 맥주 맛 죽인다!”



도영이 앉자 기다렸다는 듯 재림이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 텐데…… 그럴 수밖에.”

“너 오늘 회사 안 잘렸어? 왜 그렇게 전화를 해? 누가 보면 내가 네 애인인 줄 알겠다!”

“몰라서 물어? 형, 미쳤어?!”



역시 까칠한 성격답게 군더더기 없이 도영이 직설을 날렸다.



“야! 살살 좀 해. 무서우니까.”

“그 결혼, 보스 하고도 상의된 거야?”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도영은 매우 심각한 얼굴이었다.


결코 선하지 않은 그의 눈빛에 재림을 향한 우려가 잔뜩 묻어난 이유였다.



“아니. 내가 결정한 거야.”

“뭐?”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 이가인은 투명한 여자가 아니거든.”

“그렇다고 형 인생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꼭 이렇게 해야 해?”

“믿음을 줘야 속을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보스는 뭐래?”

“별말씀 없으셨어. 조만간 따로 보자는 것밖에.”

“하아…….”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는 도영의 깊은 한숨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안개를 드리웠다.


도영은 종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가인 결혼기사에 해피엔딩은 있을 수 없는 결말이었다.


그녀의 결혼상대자는 공재림이었고 그는 이가인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나, 영원이랑 결혼해. 결혼식은 1월 11일이고 다음날 바로 싱가포르로 떠나.”



생각에 잠긴 도영이 긴 침묵을 깬 건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서였다.



“듣던 중 최고 반가운 소식이네! 잘 생각했어. 넌 한국 뜨는 게 맞아.”

“영원이는 아직 내가 믿음이 안 간다던데, 형은 긍정적이네.”

“철들었잖아. 일단 넌 물욕이 없으니까 돈도 금방 모을 거고.”

“물욕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는 거지.”

“그러니까 철들었다는 거야. 네가 탐욕이 넘쳤으면 절대 한국 못 뜨지.”

“형이 웬일로 내 칭찬을 다 해? 맨날 정신 차리라고 쥐어박았으면서.”

“그래서 네가 성장했잖아. 사람이 성장한다는 건 깨달았다는 거야. 나이 먹을 자격이 있다는 거지.”



힐끗 눈치를 살피던 재림이 일어나 냉장고에 남아있던 캔맥주를 꺼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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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축하한다. 마셔”



재림이 맥주를 건네자 못 이기는 척 받아 든 도영이 단숨에 맥주를 들이켰다.



“성공만 하고 성장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이제 마음 편히 너 보내도 되겠다.”

“진짜 오늘 맥주 맛 죽이네! 근데 나는 형한테 결혼 축하한단 말, 못하겠어.”

“축하하지 마. 바라는 바도 아니니까.”



인상을 찌푸린 재림이 절레절레 손을 흔들었다. 안 그래도 치과직원들의 영혼 없는 축하에 종일 웃어주느라 근육이 경직될 정도였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딱히 어두운 기색이 없는 재림에 되레 도영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자칫 영영 그를 보지 못할까 싶어서였다.



“댓글 읽어봤어? 대부분 형이 죽을 거래. 그 여자의 저주로.”

“악플에 관심 주지 마. 지나가는 시선이야.”

“형, 솔직히 말해 봐. 혹시 진짜 이가인한테 빠진 거 아니야?”

“뭐, 그렇게 보였다면 성공이고.”

“결혼 후에는 어쩔 셈이야? 언제 이혼할 건데?”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왜? 시간 끌기 싫어서 결혼하는 거라며.”

“가장 중요한 조력자를 아직 못 만났거든. 뭐 어쨌든 결국은 이혼당하겠지.”



재림은 가볍게 웃어넘기면서도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을 애써 도영과 마주하지 않았다.



“대체 형 혼자 총대를 메는 이유가 뭐야?”

“진실을 직접 들어야 하니까.”

“무슨 수로? 아무리 남편이라도 28년 전 얘기를 꺼내는 순간 이가인은 분명 형을 의심할 게 뻔해.”

“……2년 전 필리핀에 다녀왔었어.”

“필리핀을? 왜?”

“차진수를 찾았거든.”



그제야 서늘한 어둠이 차분한 재림의 얼굴에 드리웠다. 그가 얼마만큼 이가인을 증오하고 있는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악의에 찬 눈빛이었다.



“형, 뭔가 알아냈구나.”

“…….”



재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새 삶을 살기로 한 도영이 행여 흔들릴까 싶어서였다.


공재림.


그에게는 깊이 묻어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이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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