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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그녀는 그 집에 사는 유령이었다

[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by 해달

수현에게서 대답이 없자 명품백에서 담뱃갑을 꺼낸 여자가 곧장 담배를 입에 물었다. 허리를 숙인 남자가 그녀 앞에 라이터를 들이댔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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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 피어오른 희뿌연 연기와 매캐한 담배 냄새가 화려한 여자의 얼굴과 짙은 향수 향을 압도적으로 삼켜버렸다.


얼마 못 가 수명을 다한 담배꽁초는 불씨가 꺼지며 바닥 한가운데 차디차게 버려졌다.


흡사 본처를 밀어내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그녀의 인생이었다.


관심 밖으로 밀려나 점점 불씨가 꺼지고 있는……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외줄 위의 삶.


뛰어난 미모 덕에 쉽게 남의 자리를 꿰찬 배불뚝이의 두 번째 여자 김세현은 그녀 나이 43살 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어색한 동안에 타이트한 검은 원피스로 글래머 한 몸매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 있는 외모 덕분인지 수현을 향한 그녀의 눈빛은 비웃음, 그 자체였다.


여성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에 날렵한 숏컷 머리, 후줄근한 트레이닝 복에 걸친 롱패딩이 자신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짐승 발톱 같은 긴 손톱에 까만 매니큐어를 바른 그녀의 손이 아직 수현에게 닿지 않은 이유일 터였다.


물론 수현 또한 그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수현은 그런 김세현이 불쌍할 따름이었다.


최고의 의술을 자랑하는 한국 성형의료에 힘입어 부자연스럽게 커진 눈과 조각 같아진 콧대는 차치하더라도 주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톡스로 빵빵해진 얼굴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도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나이를 역행하려는 김세현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현 눈에는 마치 새 강아지를 품에 안은 주인에게 사랑받으려 어지럽도록 꼬리를 흔들어대는 버려진 노견처럼 애처로워 보인 거였다.


수현은 그녀가 골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 새빨간 립스틱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입술, 간간이 흘리는 잔기침, 성형외과는 친숙해도 치과는 극혐인지 착색된 니코틴으로 인해 변색된 치아, 향수와 뒤섞인 불쾌한 입냄새까지.


거기다 두꺼운 메이크업으로 가린 칙칙한 피부와 짙은 다크서클은 그녀가 말년에 어떤 질병을 앓다 사라질지 돗자리를 깔게 했다.


사실 그녀는 수현을 찾아 올 자격이 없는 여자였다.


배불뚝이와 한 집에 살고 있긴 하지만 각방을 쓰는 데다 자녀들 반대로 여태껏 혼인신고도 하지 못한 동거인일 뿐이었으니까.


지금은 장성해 독립한 배불뚝이 본처의 자녀들은 학창 시절 안방을 차지한 김세현을 투명인간 취급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배불뚝이마저 찾지 않는, 한마디로 그녀는 그 집에 사는 유령이었다.


김세현은 수현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 본처를 내쫓았다. 그녀가 수현에게 삿대질할 자격이 없는 이유였다.


10년 전의 세현은 세상에 무서울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배불뚝이에 대한 애정도, 집착이 남아서도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 버려진 후 살아갈 길이 막막해서일 뿐.


위태롭기만 한 그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고자 김세현이 먼저 발톱을 세운 거였다.



“월급은 적지 않던데, 돈이 부족했니?”

“…….”

“설마 그 늙다리와 결혼까지 꿈꾼 건 아니지?”



떨리는 세현의 동공 속으로 담담한 수현의 얼굴이 보였다.


불안, 초조, 강박…… 한 순간에 보인 김세현에 대한 진단이었다.



“박영일 서장님, 이젠 여기 안 오실 겁니다.”

“틀렸어! 결정은 네가 하는 게 아니잖아!”



서둘러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수현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기다렸던 세현이 분노했다.



“그쪽과 재미 볼 땐 그랬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난 서장님이 더 이상 필요 없거든요.”

“뭐?”

“내 뒷조사 다 했으니까 알지 않나요?”

“네가, 친모 죽인 거?”

“하!”



감정을 자극하는 세현에 수현이 어이없는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김세현을 쓰러뜨리고 싶은 분노까지는 일지 않았다. 곧 다가올 그녀의 딱한 미래를 아는 탓이었다.



“우리 서장님이 필요 없다는 건, 널 돕지 않았다는 뜻이네?”



김세현이 되물었다. 뭔가 확신이 필요한 눈치였다.


일렁이는 눈빛과 이탈해 버린 불안한 음정이 담배를 꺼내려다 간신히 참는 그녀의 손가락을 진동시켰다.



“종로경찰서 서장님께서 수사 중인 사건에 관여하시면 큰일 나죠. 그 위치로 누리며 사는 분인데.”

“너, 우리 서장님 무슨 목적으로 만난 거야?”

“그런 거까진 알 거 없고, 아무튼 난 서장님의 그 어떤 것도 욕심낸 적 없으니까 걱정 말고 나가주세요.”



한쪽으로 비켜선 수현이 정중히 현관으로 손을 뻗었다. 김세현이 조용히 나가주기만 한다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곧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세현이 수현 앞으로 다가왔다. 흉기나 다름없는 날카로운 검은 손톱이 턱에 걸치자 뾰족한 손톱 끝이 턱을 파고들며 수현의 고개가 들렸다.



“서장님 딸이 27살인 건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더러운 짓을 하고 살았는지 알고는 있냐고.”

“후우…….”



감정이 실린 수현의 한숨에 돈깨나 들였을 세현의 웨이브 진 머리가 가볍게 흩날렸다.


수현은 절대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무 이유 없이 항상 그녀를 벌세웠던 예쁘장한 보육원 선생님도, 먼저 손을 내민 이가인도, 별안간 찾아와 자식 노릇을 하라며 돈을 뜯어간 송미호에게도 수현은 절대 먼저 물어뜯지 않았다.


그러나 조롱이 빗발치는 이런 식의 선제공격은 그녀가 가장 혐오하는 도발이었다.


탁! 쿵!


수현이 양손으로 힘껏 김세현의 어깨를 밀치자 균형을 잃은 세현이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10cm가 넘는 구두 굽만큼의 자존심이 결국 그녀를 넘어뜨린 거였다.


지켜보고 있던 근육맨이 서두르긴 했지만 이미 참사는 벌어진 후였다.



“괜찮으십니까?”

“놔!”



일으키려던 남자의 손을 뿌리친 세현이 허리를 부여잡고 수현을 노려봤다.



“너 미쳤어?!”

“내가 진짜 미쳤으면 그쪽은 걸어서 못 나가지. 정상이라서 그나마 이러는 거야.”

“뭐라고? 하!”

“내가 애라도 가져서 서장한테 질척거렸어? 다 끝난 악연에 왜 아줌마가 나한테 질척이는데?!”



공격받은 수현의 분노는 더 이상 절제되지 않았다. 머지않아 처참하게 버려질 세현도 더는 안타까워 보이지 않았다.


각자의 인생에 각자의 입장에 맞춰 그저 하던 대로 늘 최선을 다 할 뿐.



“이런 싸가지 없는 년! 뭐 해?! 당장 저년 붙잡아!”



세현의 눈짓에 거침없이 달려든 남자가 수현의 양팔을 비틀어 등 뒤로 단단히 붙잡았다.


수현은 딱히 저항하지 않았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었다. 구두를 벗은 세현이 일어섰다. 오른쪽 구두 굽이 부러진 까닭이었다.


높은 자존심에서 내려온 그녀의 키는 수현보다 한 뼘 이상 작았다.


찰싹!


일순간 일방적인 난타전이 벌어지며 금세 빨갛게 부어오른 수현의 볼에 핏방울이 맺혔다. 그녀의 뺨을 훑은 검은 손톱이 드디어 일을 낸 거였다.


수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수현은 조금도 아파하지 않았다.



“웃어? 좋아. 네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



찰싹! 찰싹! 찰싹!



점점 숨이 차오르는 세현의 거친 호흡 뒤로 결국 입술이 터진 수현이 그제야 입을 뗐다.



“아줌마, 사실 이거 서장한테 갈기고 싶은 거, 맞지?! 흐, 흐흐흐.”



수현이 웃었다. 점점 커지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오른손을 높이 든 세현의 숨통을 옥죄어왔다.



“아무리 어린 게 좋아도 이런 정신 나간 년을 만나다니…… 박영일도 늙으니까 어쩔 수 없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세현이 벗어놓았던 구두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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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장님이 좀 데리고 놀았다고 세상 무서운 게 없나 본데, 내가 똑똑히 가르쳐 줄 게. 어디 그 후에도 그 입, 함부로 놀리나 보자.”



곧 젓가락 같은 뾰족한 구두 굽이 수현의 머리 위를 정조준했다. 그러나 독수리 같은 수현의 냉혈한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후회할 텐데…… 아줌마, 상대를 잘못 골랐어.”

“쳇! 너도 무섭기는 한가 보네.”



박영일이 품었던 여자가 수현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세현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서장이 필요 없다는 수현의 한마디가 누구보다 서장이 필요한 세현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퍽! “아악!”



뾰족한 구두 굽이 수현의 이마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날렵하게 뻗은 수현의 발차기가 순식간에 세현을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이게 감히 누굴 건드려!”



수현의 양팔을 잡고 있던 남자가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세현을 대신해 수현에게 달려들었다. 다부진 근육질만큼이나 그는 확실히 강했다. 비록 유단자에 날다람쥐 같은 수현의 날렵함을 따라가진 못했지만.



“으아악!”



주먹을 날리는 남자의 팔을 낚아채 꺾어버린 수현에 남자는 선글라스도 벗어던진 채 고통스러워했다. 꺾인 모양새가 골절이었다.


벽시계를 쳐다본 수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세현에게 다가갔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줌마 곧 노숙자 돼.”

“……뭐? 하하!”



어이없어하는 웃음이 세현은 믿지 않는 듯했다.


수현은 상관없었다. 일에 관해서만큼은 입이 무거운 박영일이 세현을 퇴물이라 부르며 입버릇처럼 내다 버릴 거라는 말을 늘 들었으니까.


그는 본처와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보다 자신의 비리를 쥐고 버티는 세현이 꽤나 미운 모양이었다.


수현은 그런 박영일 또한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신이 공평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려면.



“난 서장한테 일도 관심 없으니까 여기서 이럴 시간에 담배 값이라도 받아 나갈 수 있게 서장한테 잘 보여. 그리고 아저씨!”



바닥에 떨어진 선글라스를 주워 든 수현이 남자에게 내밀었다.



“이 아줌마 끈 떨어졌어. 괜한 시간낭비 하지 말고 딴 데 알아봐.”



수현의 충고에 잠깐 혼란스러운 듯했지만 곧 선글라스를 받아 든 남자가 세현을 남겨둔 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아줌마만큼 머리가 나쁘진 않네.”

“…….”



세현은 일어날 생각도 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두드러기 같은 두려움이 이미 그녀를 덮친 후였다.


수현은 처참히 버려질 그녀에게 희망이나 용기, 위로 따위를 건넬 마음이 없었다.


서장 본처와 그 자녀들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지도 않은 여자를 감싸는 건 죄를 감싸는 것이요, 죄를 감싸는 건 결국 똑같은 짓거리를 한 공범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여길 올 게 아니라 서장 본처를 찾아갔어야지. 사람답게 죽으려면.”

“박영일…… 죽여 버릴 거야.”

“이제 제정신이 좀 들었네. 근데, 굳이 그쪽 손에 피 묻힐 필요가 있을까?”



현관으로 걸어간 수현이 활짝 문을 열자 구두와 백을 챙긴 세현이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수선받아야겠네. 이게 얼마짜린데…….”



강아지를 안 듯 구두를 품에 안은 세현이 현관을 나서다 돌연 뒤돌아섰다.



“나만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서장과 네가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내가 세상에 다 밝힐 거야. 힘은 없어도 증거는 차고 넘치거든. 두고 봐.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무너뜨리는지.”



세현은 맨발로 집을 걸어 나가는 순간까지 꼿꼿한 허리와 곧은 목을 꺾지 않았다.


부러져버린 그녀의 자존심을 품에 안은 채.


철컥! 문이 닫히고 비로소 혼자가 되자 창문을 활짝 연 수현이 청소를 시작했다.


오물이나 다름없는 박영일의 흔적도 김세현이 남긴 짙은 향수 냄새도 수현에게는 그저 악취일 뿐이었다.



“김세현, 마지막 말은 묻어두지 그랬어.”



바닥에 버려진 당배꽁초를 주워 든 수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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