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추리소설] 나는 미쁘고 의로우사
일주일 후.
1차 부검결과와 함께 정밀 현장감식이 진행되며 이소원 유괴살해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용의자는 29살 동갑내기로 다단계 회사에서 만나 범죄를 도모한 차진수, 배승원, 전유정이었다. 이 가운데 사망자는 배승원과 전유정으로 각각 수차례 경부(목)와 복부를 칼에 찔린 후 과다출혈로 사망했으며 경찰이 급습하기 몇 시간 전 살해된 것으로 확인됐다.
바닥에 떨어진 식칼의 지문감식결과 공범들을 살해한 용의자는 차진수로 즉각 지명 수배가 내려진 상황이었다. 또한 사건의 피해자인 6살 이소원 양은 유괴되었던 10월 22일 당일 밤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아이의 위장은 비어있었고 경부압박 흔적이 뚜렷한 것으로 미루어 경찰은 질식사 후 아이를 여행 가방에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다만 면장갑을 낀 채 아이 목을 조른 탓에 아이를 죽인 범인이 용의자들 가운데 누구인지는 특정할 수 없다고 전했다.
한편 부모로부터 소원이가 가족 가운데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두원은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그칠 줄 모르는 어른들을 보고 나서야 다시는 동생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럼에도 활짝 웃고 있는 소원의 영정사진 앞에서 아이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실신해 쓰러지는 엄마와 마치 바보가 된 듯 멍해진 아빠가 더 이상 든든하게 느껴지지 않는 현실이 이 어린아이에게는 그저 혼란스럽고 무서울 뿐이었다.
그렇게 두원은 마음껏 울지도 부모 품에 안기지도 못한 채 홀로 혼돈의 시간을 감당하는 중이었다.
**
며칠 뒤.
도주한 차진수 행방이 여전히 오리무중인 가운데 경찰서로 뜻밖의 제보가 들어왔다.
소망유치원 새싹반 원생인 한 남자아이가 사건 당일, 이가인과 이소원이 함께 뛰어가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이었다.
아이 이름은 강규오, 소원과 동갑내기 친구였다.
아이는 집으로 찾아온 경찰에게 사건 당일 놀이공원 내 동물원으로 가는 도중 이가인과 이소원이 어디론가 뛰어갔고 잠시 후, 이가인 혼자만 동물원에 와있었다고 진술했다.
당시에는 왜 말하지 않았냐는 경찰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규오는 소원이 나쁜 사람들에게 잡혀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까먹고 있었다며 울먹였다.
비록 6살이었지만 아이는 진술의 번복 없이 또렷한 기억력으로 그날의 목격담을 경찰에게 전했고 한 아이의 짧은 목격담은 곧, 미래유통 손녀 이가인을 향했다.
수사방향이 미래유통 손녀에게 향하자 이제껏 침묵하던 가인은 사건 당일, 다람쥐를 좋아하던 소원에게 놀이공원 나무에 다람쥐가 있는지 가보자고 했고 소원이 자신의 손을 잡고 뛰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무에 다람쥐가 보이지 않자 실망한 소원이 다람쥐를 꼭 보고 가겠다며 먼저 동물원으로 가라는 말에 가인은 어쩔 수 없이 혼자 뛰어갔다고 진술했다.
여기까지가 그간 침묵으로 일관하던 아이 진술의 전부였다.
물론 형사 이철영은 가인을 직접 만날 수 없었다. 아이 집 거실까지는 들어갔으나 그를 보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방으로 도망친 가인에 아이 부모는 황급히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유괴살인사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가인은 유치원을 그만둔 상태였다. 때문에 사복 차림의 여경이 평창동 가인 집을 다시 찾아 아이와 자연스레 대화를 주고받으며 녹음하는 형식으로 진술을 얻어냈을 뿐이었다.
아이 옆에는 미래유통 사장 이태진과 아내 도미연뿐 아니라 대형로펌 변호사가 대동하고 있었다고 했다.
뭔가를 해보기도 전, 이미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던 셈이었다.
“앞뒤가 맞는 말이긴 한데…… 뭐가 이렇게 찝찝하지?”
녹취록을 확인한 이철영이 미간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6살 동갑내기 규오의 말도 믿었으니 이가인 말도 믿는 것이 이론상으로는 맞을 터였다. 그 또래 아이들 대부분은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단 한 가지, 그에게 걸리는 게 있었다.
“설마 6살짜리가 거짓말을 했겠어요? 만약 놈들이 이소원을 강제로 잡았다면 무서워서 소리라도 질렀겠죠.”
다소 회의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이철영에 유 경위가 말했다.
“것보다 말이야. 유괴범이 소원이 집에 전화했을 때 통화내용, 기억해?”
“그럼요.”
“거기서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
“이상한 점이요? 뭐, 용의자가 전화를 너무 끈다는 느낌은 있었죠. 꼭 초범처럼.”
“것도 맞아. 게다가 마치 아이를 잘못 유괴한 듯한 냄새도 풍겼지.”
“아! 그러네요. 아이 아빠 직업에 이름까지 재차 확인하는 게 좀 이상하긴 했죠.”
“깊은 한숨도 여러 번 쉬었고.”
“……잠깐만요!”
통화내용을 되짚는 이철영에 뭔가 떠오른 듯 유 경위의 두 눈이 커졌다.
“그럼 혹시…….”
말끝을 흐리는 유 경위의 눈빛이 이철영을 향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소망유치원에는 배경이 평범하지 않은 한 아이가 다녔었지. 미래유통 손녀.”
“게다가 같은 이 씨.”
“그렇지.”
“하아, 어떻게 이런 일이…….”
“이가인도 자신이 표적이었다는 건 몰랐을 거야. 세상에 그런 상상을 하는 아이는 없으니까.”
“대상이 누구든 아이를 유괴할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 새끼가 아니죠!”
금세 안타까운 그늘이 드리워진 유 경위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이가인 부모를 비롯한 미래유통 일가는 눈치챘을 거야. 다만, 수면 위로 드러내진 않겠지.”
이철영이 그렇게 추측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유괴사건을 파고들며 수시로 서를 드나들었음에도 미래유통 손녀가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기사를 여태껏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여러 정황을 고려해 앞으로도 보도가 나올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럼 소원이네는요? 아이는 죽었는데 범인은 두문분출인 데다 사건의 내막이 가려진 거잖아요.”
“내가 개인적으로 얘기할 생각이야. 어쩌면 그쪽 부모도 짐작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다 후폭풍 일면 어쩌시려고요? 팀장님 괜찮으시겠어요?”
분노하던 유 경위가 그새 우려스러운 눈빛으로 이철영을 응시했다.
이소원 가족이 이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언론에 알릴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고 그렇게 되면 누군가는 일을 크게 만든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자칫 고작 6살짜리 미래유통 손녀에게 유괴사건에 대한 책임을 전가한다며 되레 유가족과 이철영 팀장이 거센 비난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 경위가 우려한 바로 그 후폭풍이었다.
“그런데 왜 범인들은 이가인이 미래유통 손녀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안 했을까요?”
“나도 그게 의문이야. 설령 우발적인 유괴였다 해도 분명 누군가에게 확인했을 텐데 말이야.”
그들 또한 수사과정에서 가장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유괴범들은 얼굴이 알려진 이태진 사장을 보고 범죄를 도모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당시 놀이공원으로 소풍 온 이 씨 성을 가진 소망유치원 여자아이들이 무려 일곱 명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무리에서 이탈한 이소원을 무작정 유괴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참고인 격인 아이 진술에 대형로펌 변호사까지 대동한 걸 보면 뭔가 냄새가 나긴 하는데 단서가 없으니 원…….”
“그래서 나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얘기할 작정이야. 아이를 잃었는데 이런 것까지 숨기면서 유족에게 모든 걸 감당하게 하는 건 너무 잔인해.”
20년 남짓한 경찰생활에 확실한 촉이 온 듯 이철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
소원의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난 후였다. 형사 이철영이 경윤의 집을 찾았다.
아이가 실종된 당일부터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경윤은 그 사이 몰라볼 만큼 피폐해져 있었다. 형사의 방문에 혹시라도 범인이 잡혔는가 싶어 애써 귀를 기울이고는 있었지만 세상에 대한 희망은 버린 듯 눈빛은 어두웠다.
이철영은 결심한 대로 유괴범들의 표적이 이소원이 아닌, 같은 새싹반 원생이었던 이가인을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과 함께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아픔을 위로했다.
그런데 듣고 있던 이경윤에게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소원이를 찾기 전부터 아내와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범인의 한숨에서 느껴졌죠.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역시 예상하고 계셨군요. 도주한 차진수가 검거되면 확실한 전말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게…….”
확신을 줄 수 없던 탓에 이철영이 말을 아꼈다.
지명수배가 내려진 지 한 달이 되어가도록 제보는커녕, 놈이 머물렀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철영은 범인이 이미 해외로 도주했을 거라 보고 있었다. 다만 인터폴 적색 수배령에도 놈이 어디로 밀항을 했는지 그 동선조차 깜깜하다는 게 문제였다. 차진수는 그렇게 연기처럼 종적을 감췄다.
“수사가 종결되더라도 제가 은퇴하는 날까지 놈을 찾는데 소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만은 약속드리죠.”
“말씀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범인이 꼭 살아있었으면 좋겠네요. 궁금한 게 아주 많거든요.”
“뭐가 제일 궁금하십니까?”
“그야 우리 소원이죠.”
“만약 놈이 잡히면 직접 만나보실 생각입니까?”
“아니요. 제가 그놈을 보면 죽일 거라서 만나지는 않을 겁니다.”
중학교 도덕선생님에게서 섬뜩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철영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이기 이전에 아버지였으니까.
“많이 힘드시겠지만 두원이를 위해서라도 꼭 기운내시길 바랍니다.”
“그래야죠. 참! 저희 곧 이사 예정입니다.”
일어나려는 이철영에 경윤이 새 소식을 전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로 가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부산이요.”
“네? 부산이라면…… 혹시 연고가 있으십니까?”
“아니요. 우리 소원이가 바닷가를 무척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실컷 보여주려고 가는 겁니다. 실은 어제…….”
살짝 멈칫한 경윤이 이내 이철영을 믿는다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내가 미래유통 사장 이태진 집을 찾아갔었습니다. 우리 소원이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아이라 그날 얘기를 직접 듣고 싶다고요.”
“그래서, 가인이를 만났습니까?”
물어오는 이철영에 경윤이 떨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문턱도 넘지 못한 채 경비원들에게 쫓겨났습니다. 아이 가족 누구도 나와 보지 않았더군요. 진작 제가 알았더라면 말렸을 텐데…… 유괴 대상이 우리 소원이가 아닌 미래유통 손녀였다는 사실에 아내가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놈들의 목적대로 기업가 손녀가 납치되었다면 이렇게 쉽게 죽이지는 못했을 거라고 매일 울었거든요.”
억장이 무너졌을 시간들을 격한 감정도 없이 담담히 전하는 경윤에 이철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사건의 모든 전말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차진수를 하루빨리 찾아야 한다는 다짐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