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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Nov 29. 2019

타고난 사람

삶의 무기, 인생, 글쓰기


첫 강습 시간에 강사도 말했었다.

"물론 아주 드물지만 예외는 있어요.
타고난 사람. 타고난 건 아무도 못 이깁니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 중 '안나'
 _ 정이현/문학과 지성사



머리 좋은 사람을 동경한다. 정확지는 않지만 '잘하는 사람'이 추켜세워지는 것을 본 이후로 줄곧 그래 왔던 것 같다. 내가 보아온 세상은 불공평했다. 하나를 잘하는 사람은 꼭 다른 것도 잘한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예술적 감각도 있고, 인물까지 좋다. 특출 난 아우라 덕에 그래 보였던 걸까? 아니면 그들이 어릴 적부터 학습으로 쌓아 올린 작은 성취들이 큰 성공을 만들어 낸 것일까.



<<녹색 부가티를 탄 타마라>> _ 타마라 드 렘피카



고등학교 때 적성검사를 했다. 항목이 꽤 많았고 성심껏 답했다. 결과지는 그래프로 표시됐는데 내가 받아 든 종이 속 막대들은 모두들 고만고만했다. 엇비슷해도 100을 가까이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지표는 50 근처였다. 완전히 바닥을 치는 항목이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려 해도, 생각할수록 기운이 빠졌다. 잘하는 게 없는 사람이란 걸 수치로 확인까지 해야 한다니. 얼핏 본 공부 잘하는 친구의 적성검사 결과지는 그의 성적과 비례해 모두 상위지점을 향해 뻗어있었다.





대학교 1학년 영어 회화 기말고사 때였다. 교수님과 1:1 대화를 마친 후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잘하고 싶었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엉망인 답안지를 그냥 제출하기도 창피하고, 아직 시험 시간도 한참이나 남아 문제를 읽고 또 읽었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교실 밖을 나갔다. 문제가 쉬웠는지 예상보다 훨씬 빨리 교실이 비워졌다. 결국 혼자 남았다. 그쯤 되니 더 초조했다.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친구들에도 미안했다. 그렇지만 기회를 저버리고 답안지를 제출하는 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다. 잠시 고민을 하다 끝까지 해보기로 하고 머리를 쥐어짰다. 민망하게도 교수님은 계속 나의 맞은편에 서 계셨다. 결국 종료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힘없이 답안지를 내밀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답안지를 보지도 않으시고 "에이 플러스"하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멀뚱히 바라보니 "열심히 했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하신다. 그렇게 정말로 난 최고 점수를 받았다. 돌이켜보면 절대평가 수업으로 교수님의 재량이 가능했던 것 같다. 참으로 운이 좋은 일이었고, 가치관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 난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일은 무조건 그 시간까지 했다. 시간이나 기한이 정해진 일이라면 대부분 시험이나 논문, 보고서 제출인데 신기하게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일들은 내게 종종 행운을 불러다 주었다. 중국에 오고 싶어서 중국어 시험을 보던 때가 있었다. 딱히 방법이 없어서 신청 가능한 시험을 모두 신청해서 봤는데 하루 종일 앉아있던 날 우연히 해당 기관의 선생님을 계속 마주치게 됐다. "시험을 하루 종일 보는 건가요? 열심히 하고 있네요"라고 하셨었는데 장학생 면접 당시 나에게 좋은 점수를 주시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그런 몇몇의 경험으로 '끝까지 앉아있기'는 내 삶의 무기가 되었다. 새로운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나마 확률 좋았던 성공 법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흔 언저리가 되니 사는 방법이 생긴다. 오래 보아온 이들의 살아가는 방법도 보인다. 판단력이 좋은 이, 융통성이 좋은 이, 잔머리가 좋은 이, 운이 좋은 이, 솔직한 이, 분위기 전환잘하는 이, 친화력이 좋은 이... 다들 구멍을 빠져나가는 방법이 하나씩은 있다.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용타 싶다.






타고난 사람이 있다. 어디에나 있다. 부럽고 배 아파해도 어쩔 수 없다. 항상 내 앞에 있다. 그들은 그저 꽃으로, 별로, 연예인으로 봐야 한다. 대단한 것을 보여주니 잘 감상하고 배울 수 있는 건 배우고 도움받을 수 있는 건 받는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고 싶은 곳을 간다. 그러면 정말 어쩌다 한 번씩 좋은 일이 생긴다. 작은 것이라도 성공은 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오늘 하루도 힘내어 살아본다.




주변 인물 중 '타고난 사람'이 있나요?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요? 부러운가요?

학창 시절에 어떤 상을 받았었나요? 생각이 날 때까지 생각해 봅니다.
개근상 역시 상입니다. 성실함의 입증입니다.

그 표창장이나 메달의 종목이 내가 잘하는 그 무엇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준은 다르지만, 분명 나는 내 기준점에서 잘하는 것이 있습니다.  




 


<<숙제 중인 에스뵈욘>> _ 칼 라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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