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신도시 개발이 박차를 가하던 시기 번번이 신도시 진입에 실패한 아빠는 설마 되겠어하는 곳에 청약을 넣으셨다. 엄마도 몰랐던 청약은 성공했고, 이 문제로 한동안 집안이 시끄러웠다. 이제 우리가 이사 올 곳이라며 아빠의 차를 타고 온 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엄마의 한숨은 깊었고, 우리 자매는 작은 숨을 쉬었다.
고1, 17살에 이사를 왔다. 이 도시에는 고등학교도 부족하고 당시에는 고등학교 전학이 쉽지 않아 매일 왕복 2시간 이상을 버스정류장과 버스에서 보냈다. 눈이 오는 날은 버스에서만 4시간 넘게 있었던 기록도 있으니 나의 방랑적 기질은 아마도 이때 일깨워진 것이 아닐까 싶다.
갑작스러운 이사는 우리 집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파트 동별로 학생들이 있었고 이 틈을 공략해 누군가는 동네 스쿨버스를 등장시켰다. 근처 도시 학교에 가는 학생들이 돈을 모아 미니버스를 타고 다니는 시스템인데 나는 등교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 아빠와 함께 등하교하거나 버스를 이용했다. 당시 이름 모를 동반자도 여러 명 있었다. 같은 라인 6층 남학생과 옆 동 쌍둥이 남매였다. 학교는 달랐지만, 등하교 시간이 비슷해서 아침저녁으로 만났다. 내가 타고 내려오면 그 학생이 타고, 같이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에 또 만나고 학생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그다음에 내가 내리고,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랬다.
대학교 시절에는 엘엘리베이터서 마주쳤다. 낮에는 향수 냄새, 밤에는 술 냄새를 풍기며 만났다. 이십 대 후반 즈음에는 표정 없이 피곤함에 절은 모습으로 만났다. 막차를 같이 타고 오는 일도 많았다. 괜히 뻘쭘해서 버스에서 늦게 내리고, 천천히 걸어와 엘리베이터를 먼저 올려 보내기도 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이와 주절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다 그 총각을 만났다. 속으로 ‘오~반갑네. 아직 여기 사는구나’하고 혼자 생각을 하는데 아이가 “형아, 형아”한다. 그래서 나도 “안녕하세요 인사하자” 했다. 아이가 인사를 하니 청년이 수줍게 손까지 흔들며 인사를 한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장장 23년 만의 첫 대화였다. 이게 뭐라고 참. 갑자기 어찌나 웃음이 나는지 참느라 혼났다. 6층 이웃의 뒷모습을 보며 ‘아직 부모님이랑 살아요? 결혼했어요?’하는 질문이 입안에서 쏟아졌다. 말도 안 해 본 사람한테 결혼 질문이라니. 어른들이 그러시면 왜들 그러시나 했는데 이 질문이 바로 이런 기분에서 나오는구나 싶었다.
우리 집에 다시 살 게 되면서 마트도 가고 미용실도 가고 동네 산책도 하면서 이웃들을 만난다. 오랜만에 간 아파트 상가 1층 미용실은 예전 그대로였다. 예전부터 워낙 말씀이 없으신 분이라 머리를 매만지시면서도 말씀이 없으셨는데 한참 후에 “누구 따님이시죠” 하신다. 나를 기억해주시는 걸 보니 20년의 세월이 짧지만은 않음이 느껴진다. 이때다 싶어 거울로 사장님의 모습을 보는데 정말 그대 로시다. 진심을 담아 “20년 전하고 똑같으세요”하고 말씀드리니 환하게 웃으신다.
집에 돌아오던 길에는 11층 어르신을 뵈었다. 학창 시절 양복을 입고 출퇴근하시던 모습이 선한데 이제는 양복 대신 편한 옷차림으로 강아지와 산책하시는 모습을 더 많이 뵌다. 흰머리와 야윈 모습에서 세월이 느껴져 조금은 서글퍼진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점잖은 기품은 여전하시다.
허허벌판이던 우리 동네가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얼마 전에는 지하철도 생기고 덩달아 집값도 많이 올랐다. 우리 집이 우리 동네가 이렇게 바뀌니 좋기는 한데 창을 열면 산이 보이고, 가끔 멧돼지도 출몰하고, 소리라고는 새소리만 들리던 그 고요함과 냄새가 그립기도 하다.
이제는 산과 하천보다 아파트 로고가 먼저 보이는 풍경을 보며, 우리 집은 또 얼마나 변할까. 나와 우리 가족은 어떻게 변할까. 가만히 우리 가족의 나이를 꼽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