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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혜선 May 18. 2019

누군가는 어른이 되는 시간,
나는 무엇을 했을까

일상. 생각


뒤늦게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면서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분들과 연락이 닿게 되었다. 그중에는 내가 독서 수업을 할 때 만났던 학생들의 부모님도계셨다. 안부를 묻고 궁금했던 아이들의 사진을 찾았다. 똘망하고 장난 지던 아이들은 '말 걸지 마시죠!'를 온몸으로 표출하는 청소년이 되어있었다. 다들 언제 이렇게 큰 건가 싶어 손가락을 꼽아보니 대부분 6년 전 만남이 마지막이다. 열 살 남짓의 아이들은 열여섯, 열일곱의 청소년이 된 것이다. 다시 한 명 한 명 얼굴들을 떠올려 보니 열네 살이었던 학생은 이미 성인이다.

 6년은 누군가가 어른이 되는 시간이었다. 미성년이 보호자의 동의 없이 자신의 사회적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는 시간이다. 오늘 날짜를 확인하며, 벌써 한 주가 지나가고 있음에 놀라며 시간이 쏜살같다는 말을 매일같이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체감하는 일은 낯설었다.  

 초등학생이 어른이 되기 위해선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매일 아침 등교해 선택이라고는 없는 시간표를 따라야 하고, 공부하고 시험 보고, 매년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사회성을 함양해야 한다. 그렇게 연령에 맞춰해야 하는 것, 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을 지켜내면 다음 학년으로 진급이 가능하다. 하기 싫다고 안 하면 당연히 혼나기도 한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해도 미성년의 테두리는 제법 엄격하다. 부모님을 모시고 와야만 할 수 있는 일들 천지다. 지키지 않을 시에는 ‘불량 청소년’이라는 낙인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긴 학창 시절 동안 이 모든 걸 인내하면 몸과 마음이 성숙해졌음을 인정해준다. 드디어 손에 쥐고 있던 주민등록'증'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고 알맹이 있게 보내야만 어른이 된다.

 그들이 땀 흘리던 6년의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을까? 이래서 특권이란 게 무섭다. 어른 표 티켓을 획득하곤 그대로 흘려보낸 날들이 셀 수없이 많으니 말이다.


 스무 살이 되면 사회적으로 성년으로 인정을 받는다. 딱히 다른 조건은 없다. 스무 살 이후에도 그랬던가? 스무 살에 어른이 되고, 스물여섯 무렵에는 일을 시작하고, 서른둘 쯤에는 가정이 생기고, 서른여덟에는 부모가 되어있고, 마흔여섯에는 학부모라는 타이틀이 익숙해지고, 쉰둘에는 내가 하는 일의 정점에 서고, 쉰여덟에는 퇴직을 준비하고, 예순여섯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집안의 어른이 되어있는...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이들 역시 있다. 나 역시 이 테두리의 이탈자다.

 어디로 가고 있을까?

 학교 다닐 때는 쉬는 시간 10분 동안 자는 잠이 행복이었다. 그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물론 스스로 원해서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부모님의 동의도 필요 없고, 시간 조정도 가능해서 쉬는 날에는 내 맘대로 맥주 마시며 새벽 4시까지 영화도 보고, 만화책도 보고, 맞고도 친다. 그런데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학교 다닐 때 겪지 않았던 스트레스와 아픔을 참아내기 위해 이런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아이는 6년 후 어른이 됐고, 이미 어른이었던 난 6년 동안 일을 찾고,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며 아이를 보호하는 부모가 되었다. 모두에게 길고 힘들고 의미 있는 시간이다.


 6년 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도 잠 안 자고 영화 보고 맞고는 치겠지만 그것이 다는 아닐 것이다.

 삶의 계획표를 만들 때 6년 단위도 괜찮은 것 같다. 누군가는 어른이 되고, 누군가는 어른을 만들어 내는 시간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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