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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준 Oct 14. 2020

#6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무게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

#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


잘 지내고 있나요? 입추(立秋)가 지났음에도 한여름처럼 더위가 기승이었어요. 9월부터는 긴팔과 반팔 중 무엇을 입어야 할지 고민하는 나날이었고요. 언제까지 이 더위가 이어질까 싶었는데, 10월이 되니 찬 바람이 거세게 부네요. 그래서 하나둘 반팔을 집어넣기 시작했어요. 내년 여름까지는 다시 작별일 테니까.

근데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전 옷장 청소를 하려고 시작한 건데, 꼭 옷장이 아닌 책장이나 서랍장 등을 먼저 정리하는 거예요. 마치 시험 전날엔 재미없던 문학책도 즐겁게 읽듯이 말이죠. (웃음) 그때도 그렇게 해서 공부가 늦었는데, 오늘도 옷장 정리는 꽤 늦게 시작할 거 같네요.

기억날까 모르겠는데, 서랍장엔 칸별로 보관하는 게 달라요. 하나는 그나마 최근의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 그 아래 칸은 그보다 더 이전에 사용했던 물건들. 그렇게 칸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사용했던 시기는 과거로 향해요. 마음 같아선 모든 걸 싹 다 정리하고 싶지만, 그러면 누가 봐도 대청소가 될 테니.. 딱 하나, 맨 밑에서 두 번째 서랍을 열었어요. 



20대를 함께한 녀석들이 서랍장에 있더라고요. 그중에서 눈에 띄는 세 녀석(?)만 골라봤어요. 이거 기억나세요? 하나는 갤럭시 그랜드라는 스마트폰이에요. 아마 갤럭시 노트의 보급용 스마트폰으로 알고 있어요. 그 이전에는 베가레이서라는 폰이에요. SKY라는 로고가 눈에 확 띄죠. 이거 참.. 괜히 들어가서 뭐가 있나 확인하고 싶더라고요. 마지막은 조약돌 컨셉으로 만들어진 mp3플레이어예요. 옛날에는 저게 멋있다고 막 패션처럼 하고 다녔어요. (웃음) 지금 보면 한없이 웃음만 나오네요.

오랜만에 잡아본 옛 스마트폰을 보니까 충전시켜서 켜보고 싶더라고요. 그 안에 뭐가 적혀있을까요? 어쩌면 이제는 기억하지 못할, 그러나 그 당시엔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저장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분명 글 쓰는 걸 좋아했고, 시 쓰는 걸 좋아했으니 글이나 시가 적혀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시 하니까 떠오르는 건데, 20대 때 쓴 시들은 정말.. 오글거림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나중에 따로 편지로 그 당시의 시에 대해 써볼게요. 아마 편지 보는 내내 당신도 민망해서 웃음이 계속 나올 거예요. 세상 겉멋이란 겉멋은 다 들어서.. 어휴!



물건이란 게 참 그래요. 그 당시엔 참 소중하거나 설레는 거였는데, 시간이 지나면 손길에서 서서히 멀어져요. 어느 순간엔 ‘그런 게 나한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잊어먹기까지 하죠. 그런데 신기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쩌면 본능적으로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려나?


“그 물건엔 분명 소중한 무언가가 남겨져 있음을 알기에.”


물건을 버리고, 버리지 못하고를 결정짓는 건 ‘소중한 무언가’의 여부 같아요. 추억일 수도 있고, 함께한 경험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잖아요. 그 한 줌의 무게도 아닌 기억이 계속해서 이 물건을 보관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서랍장의 칸이 하나둘 늘어나는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가진 물건들 중 쓸모없는 물건은 없네요. 물론 어머니께 이 얘기를 꺼내면 “허튼 소리하지 말고 얼른 갖다 버려!”라고 하시겠지만.

마음 같아선 종일 서랍장의 물건을 탐닉하면서 여운을 즐기고 싶어요. 그런데 바람은 불고 옷은 여전히 얇아요. 이 이상 옷에 무신경하다간 감기 걸리기 딱이니 슬슬 옷장 정리를 마저 해야겠어요. 즉 오늘 편지는 여기까지란 소리예요. 아쉬워도 어쩔 수 없어요. 당신의 공간엔 온기가 머물고 있을지 몰라도, 여기는 곳곳에 찬기가 가득하거든요. 

그래도 혹시 몰라 나처럼 찬기가 가득한 곳에 머물고 있다면, 옷 좀 껴입으세요. 전 당신이 아직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제가 보낸 편지들을 모두 읽었으면 좋겠거든요. 아직 나누고 싶은 얘기도 많고, 보내주고 싶은 선물도 많답니다. 그러니 틈틈이 건강 챙기시고, 또 얘기 나누기로 해요. 




추신(P.S)

당신에게 그 무엇보다 아쉬운 건 시간이겠죠. 그런 면에서 추억이 깃든 물건은 당신의 아쉬움을 달래는데 무엇보다 좋을 거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이 말이 당신의 기억 속에서 다시 떠오르길 바랄게요.


“Tempus fugit, non autem memoria”

시간은 도망가지만, 추억은 도망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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