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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준 Oct 16. 2020

#7 부끄러워도 보게 되는

젊은 날의 치기라기엔 정말 소중한

# 부끄러워도 보게 되는



…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 역시 선 하나를 그린다


이게 뭔 내용인가 싶죠? 오늘은 좀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에 대해 적어볼까 해요. 일전에 얘기했던 거 기억나요? 20대 시절 썼던 시들을 보니 얼마나 오글거리는지 몰랐다고. 위의 저 문장은 그 당시 썼던 시들 중 가장 오래된 시(라고 생각되는 것)의 일부예요. 지금 봐도 살짝 웃음이 나올 정도로 민망하네요.  

2020년을 맞이하면서 작성했던 버킷리스트(Bucket list). 해마다 적었던 버킷리스트였지만 올해는 좀 더 특별했죠. 2020이라는 이 숫자가 특별하게 느껴졌거든요. 마치 내게 “30대가 되었으니 지나간 20대를 정리해봐야 하지 않겠어?”라고 얘기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10가지 버킷리스트 중에서 가장 공들이고 있는 건 딱 하나였었죠. 


20대 때 썼던 시들을 모아 시집 만들기


아, 그때부터 시작된 눈물겨운 고생이 갑자기 머리에 스치네요. 따로 가입해놨던 카페의 글과 댓글을 조사하기부터 여기저기 적어놓고 잊어버렸던 시들을 찾아내기까지. 정말 눈물겨운 과정과 지루함, 거기에 시를 확인할 때마다 찾아오는 민망함까지. 고생이란 고생은 다 내 몫이었고, 민망함은 피할 수 없었어요.

이 시 기억할까 모르겠네요. 한창 신화와 꿈이라는 주제로 몰두했을 때 썼던 시였어요. 당시 20대의 방황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신화와 엮이면서 썼던 거였죠. (정말 민망해서 숨기고 싶지만, 당신을 위해 특별히 민망함을 감추고 써볼게요.)



가슴 깊이 차오르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이 마음을 표현하리라


죽음이 내 눈을 멀게 할지라도

나는 용기라는 작은 횃불을 들고

미궁의 바닥, 그 아래의 바닥으로

조용히 들어가리라


그 끝에 미노타우로스와

희생당한 이들의 뼈가 즐비해도

걱정 말아라, 걱정 말아라


아직 너에겐 횃불 하나가 남았고

어디든 뛸 수 있는 두 다리가 있고

미궁을 탈출할 수 있는 지혜가 있으니


- 횃불 -



손가락 살아있나요? 막 오그라들지 않았나요?! 으아.. 정말 부끄럽네요. 이 시는 그리스 신화 속 크레타섬, 그 섬에 존재하는 라비린토스라는 미궁이 모티브예요. 라비린토스란 누구도 들어가면 그 복잡한 미로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미궁 심처에 자리하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곳이죠. 당시 크레타 섬의 왕 미노스가 요청해 만들었던 곳이기도 해요. 미노타우로스란 그런 미노스의 아내가 낳은 반인반수예요. 그래서 미노타우로스는 그 뜻이 미노스의 황소죠.

전 그 미궁이 마치 20대의 방황과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얼른 빠져나가고 싶은데 갈수록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방황. 언제 도움의 손길이 찾아올지 모르니 미궁 속에 머물고 있을 때 스스로를 다독이고자 이 시를 썼어요. 마치 테세우스와 같이 지혜롭고, 현명하게 이 방황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실상은 20대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치 영웅과도 같다는 심리가 잔뜩 반영된 거겠죠. (어우...) 

그 당시에는 정말 진지하게, 마음을 담아 썼던 시예요. 그런데 30대가 되니 이게 얼마나 민망한지 몰라요. 마치 어린 남자애가 “왜이래?! 난 어른이야!”라고 외치면서 어른처럼 입고, 말하고, 행동하는 걸 곁에서 바라보는 심정이랄까요? 새삼 느끼지만 민망함이란 항상 그 시기를 지나온 이의 몫이네요.



그래도 시를 차곡차곡 모으다 보니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우선은 20대 썼던 시들이 참 많다는 걸 알았어요. 걔 중 시집에 담기 어려운 것들을 배제하고도 122개나 되었거든요. 122개를 모두 넣어 시집을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하나하나가 추억이고 기록이더라고요. 그 당시의 기억과 감정이 잔뜩 묻어난, 어쩌면 가장 짧고도 강렬한 일기.

어릴 때부터 감정을 꺼내는 게 낯설었기에, 시를 쓰는 행위만이 그나마 ‘솔직한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었죠. 그래서 시를 모으는 내내 민망했지만, 반대로 그 민망함이 시를 선택하는 척도이기도 했어요. 시를 보며 민망한 만큼 내가 감정을 토해냈다는 결과니까.

아직 2020년이 끝나지 않았기에 시집은 계속해서 ‘제작 중’이에요. 아마 11월 즈음에 시집을 만들 거 같은데, 그때 시집을 받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요. 당신은 이미 제 표정을, 그때 떠오른 감정을 기억하고 있겠죠? 이왕이면 즐겁고 유쾌한 기억이길 바랄 뿐이에요.

더 민망해지기 전에 얼른 시집을 마무리해야겠어요. 차일피일 미루다간 민망함이 가득 채워질 거 같거든요. (웃음) 아직도 제 시집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하루는 그 시집을 읽어보며 20대의 제가 느꼈던 그 감정을 다시금 마주하는 건 어떨까요? 상상해보니 꽤 유쾌하고도 민망한 여행이겠네요.  




추신(P.S)

그러고 보니, 맨 처음에 적어놨던 시의 원본을 궁금해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한 번이나 두 번이나 부끄러운 건 똑같으니까, 이거까지 선물로 보낼게요. 그 외 나머지 120편의 시는 시집으로 보세요. (웃음)



친구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이미 흘릴 눈물 다 흘려서

이제는 흘릴 게 없다 한다


괜찮다 말하는 눈동자

그 눈동자 아래로

흐릿한 물의 흔적

깊고 길게 세겨진 물줄기가

눈에서 볼로 볼에서 턱으로

가슴을 아리게 하는

선 하나를 그렸다


보이지 않는 그 선을 따라

계속해 고개를 내려가다보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계속해 볼 자신 없어

무릎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 역시 선 하나 그린다


- 선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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