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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화준 Oct 21. 2020

#8 조금 작은 고향, 동네

서울 사람도 고향이 있습니다.

# 조금 작은 고향, 동네



고향이라는 거창한 단어는 제게 어울리지 않죠.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자라왔으니까요. 남들은 고향 얘기할 때마다 지역을 말하더라고요. 부산, 전주, 여수, 이천 이런 식으로요. 그들은 ‘이렇게 얘기해야 그나마 어디 있는지 알겠지?’라는 생각이었겠지만, 듣는 제 입장에서는 조금 달랐어요. 마치 그 넓은 지역 전부가 ‘그 사람의 고향’과도 같았거든요. 

그래서 뭔가 부럽더라고요. 어떤 거대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느낌이 물씬 나면서, 동시에 그 지역 특유의 색깔을 품고 있잖아요. 고향이 주는 선물이라 해도 무방할 거예요. 그에 반해 서울은 사람만 많지 쓸모가 없어요. 물론 이 얘기를 들으면 하나 같이 이런 말을 하겠죠.


“야! 서울에 집 있는 게 가장 최고야!”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어!”


알아요. 배부른 소리인 거. 간신히 자취하며 서울에서 버티는 이들에겐 이것만큼 혈압 오르는 소리가 또 없죠. 그러나 서울에서 계속해 살아온 입장에선 ‘서울만큼 밋밋한 곳’이 또 없어요. 고향이라는 개념도 희미해요. 그냥 서울은 서울일 뿐이에요.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색에는 삼원색이란 게 있어요. 빨강, 파랑, 노랑이라는 삼원색.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색은 이 세 가지 색에서 파생되었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모든 색의 기본인 셈이죠. 그리고 이 기본들을 각각 동일하게 섞었을 경우 검정색이 나온다고 해요. 제게는 각각의 지역들이 ‘다양한 색’이고, 서울은 ‘이것저것 다 섞인 검정색’에 가까워요. 

그래서 고향과도 같은 애착이 없어요. 지역은 지역색이 뚜렷한데 반해 검정은 그저 모든 색을 잃은 무채색에 가까워요. 여러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끼리 얘기를 나누다 보면 고향에 대한 인식이나 소속감이 분명하게 구분되죠.


“너 어디 살아? 아! 거기!”

“오, 나도 거기 사는데! 같은 지역 사람이네!”

“아, 난 전혀 반대야. 여기 살거든!”

“아, 거기 가본 적 있어.”

“넌 어디 살아?”

“난 서울.”

“오.. 부럽다! 서울에서 사는 게 최고지!”

"맞아. 서울에 집 있는 게 어디냐!"

“맞아. 서울이 최고지. 그래서 넌 어디 살아?”


지금껏 여러 친구들을 만나면서 위와 같은 경험을 정말 많이 했어요. 저마다 지역을 묻기 바쁘다가 서울에서만 잠깐 침묵이 흐르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는 순간들. 서울이 무채색임을 알고 있지만서도 아쉬움과 함께 약간 욱하는 게 있어요. 

동네에 주목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어요. 서울엔 고향이란 개념이 희미하니,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동네로 접근하는 거죠. 그래서 동네가 가까운 사람들이랑 친해지기 쉬웠고, 동네를 알고 있으면 괜히 가까운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 과정에서 동네를 사랑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겠네요.


“서울 성동구, 왕십리역”


당신도 같은 마음이겠지만, 전 정말 동네가 좋아요. 내가 자라온 이 곳이 허름하든 대단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내가 오랜 기간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좋아요. 살아있는 생명을 보듯이 동네가 변화하는 걸 지켜보왔어요. 어느 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지금은 무엇이 있는지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었어요. 그래서 거리를 걷다 보면 기억 속 앨범을 꺼내듯, 동네의 변화를 차곡차곡 기록해요.

사람이 삶을 정리할 때 빼놓지 않고 찾는 게 ‘고향 풍경’이래요. 우리에게는 ‘동네 풍경’이겠네요. 누군가에겐 그저 어느 동네의 한 풍경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삶 그 자체겠죠. 그 속에 담긴 무수한 이야기와 추억들은 풍경이 주는 선물이겠고요.

당신의 시간 속에선 왕십리 역시 많이 변했을 거예요. 어쩌면 지금 제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지고, 다른 게 세워졌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기에 당신의 기억 속에만 숨쉬는, 2020년의 우리 동네 풍경을 선물해주고 싶어요. 백 마디 말보다 이 사진들이 당신에게 더 많은 얘기와 따뜻함을 안겨줄 테니까요.



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았어요. 당신 덕분에 이 좋은 날, 동네 사진을 찍었네요. 당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는데, 덕분에 나 역시도 기분 좋은 선물을 받아갑니다. 오늘은 우리 둘 다 이 선물을 감상하면서 기분 좋게 웃어보도록 해요.

다음에는 이미 사라진 풍경에 대해 적어보도록 할게요. 당신에겐 모든 게 사라진 풍경이겠지만, 저는 반반이잖아요. 사라진 것도 있고, 아직 존재하는 것도 있고요. 오늘 제가 보내는 사진 속 풍경은 운 좋게도 ‘아직 존재하는 풍경’이겠지만 다음엔 제게도 사라진 풍경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해요. 그땐 당신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어볼 수도 있겠네요. (웃음) 그럼 이만.




추신(P.S)   

사진을 중간에 넣으려 했는데, 그러면 사진에 정신이 팔려 내 편지를 소흘히 대할 거 같았어요. 그래서 장난 좀 쳤습니다. 사진은 여기서 구경하시죠! 물론 이런저런 선물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선물은 제 편지인 거 아시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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