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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눕 Dec 04. 2022

압박 면접 대신 맞선

지금 저랑 맞선 보시나요?


전투력을 상실했다. 이 정도 네임밸류의 회사에서 이런 무례한 질문들을 내게 쏟아내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나머지 면접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이미 충분히 실망스러웠다.  기분 나쁜 티를 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주변 지인이 좋은 자리가 있으니 생각 있으면 한번 지원해 보라고 연락이 왔다. 아기가 아직 돌 전이지만, 평소 나도 눈 여겨본 곳이기에 별 생각 없이 편하게 지원했다. 며칠 후 서류가 통과했는지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렇게 한 번에 바로 된다고? 출산 후 처음으로 지원 한 곳에서 바로 면접 제의가 온 게 왠지 뿌듯했다.


아이가 자는 틈틈이 면접 예상 질문을 작성 해 보았다. 쉬운 예상 질문들부터 쭈욱 적어보고 그 다음 페이지에는 역량과 전문성에 대한 질문들을 차례로 적어보았다. 이 자리에서 요구되는 역량이 무엇인지를 나열하고 다른 한쪽에는 나의 경력과 전문성을 나열한 후 최대한 빠짐없이 서로 매칭 시켜가며 답변을 완성했다.


그리고 회사에 관련된 최근 몇 년간의 기사도 찬찬히 살펴보며, 조금은 들뜨고 신나는 마음으로 나름 압박 면접 준비를 했다. 내가 얼마나 이 자리에 필요하고 잘 맞는 사람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회사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까지 뭔가 조금은 거창하지만 최대한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예상 답변을 정리해보았다.




드디어 면접 날이 왔다. 부담 없이 다녀오기로 했지만, 사실은 오랜만에 면접이라 떨리긴 떨렸다.  처음 시작 질문들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자기소개 및 지원 동기, 그간의 경력 등 예상 가능했던 질문들이었다. 그 다음 질문부터는 지극히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남편은 무슨 일을 하시나요?  현재 거주하는 곳은 자가인가요? 전세인가요?  
아이가 아직 많이 어린데, 일을 시작하면 아이는 누가 키워 주시나요? 시부모님이 갑자기 아이를 못 봐주시게 되는 상황에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야근하다가 늦어지면 아이는 어쩌나요?  혹시 둘째 계획은 있으신가요? 있으시다면, 언제쯤 생각하시나요?
 

7개월 아이를 시어머니께 맡기고 일을 나온다는 내가 영 못 미더워 보였는지, 알지도 못하는 아이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셨다. 자아실현을 위해 어린 아기를 두고 세상으로 나온 모진 엄마가 되어버렸다.


우리 가정에 대한 관심도 얼마나 많으셨는지, 집의 자가 여부부터 가족계획까지 알고 싶어 하신 면접관님이셨다.  인생의 2막을 여는 설렘으로 나간 면접 자리였으나, 마치 결혼을 전제로 맘에 안 드는 상대와 고리타분한 맞선을 한바탕 치른 느낌이었다.  




내일 일도 모르는 내 인생 가운데,

둘째 계획이라.


우리네의 인생이 사전 설정해둔 시스템대로 딱딱 맞아떨어지는 AI 로봇과 같은 삶이라면, 그 또한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아니 어쩜 계획한 대로 이뤄지는 삶이라면, 연초 받아 드는 다이어리에 월별 계획을 미리 표시해 두는 행위는 어쩌면 나름 신나고 기대되는 일이 될 수 도 있겠다.  


하지만, 인생 가운데 예측  불가한 일들을 마주하고, 그 과정을 지혜롭게 겪어내며 성장하는 것이 인생의 묘미라고 믿는 내겐 조금은 이상한 질문이었다.


인생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특히 생명은 계획과 상관없이 하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례하지만,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현재 자산 규모는 어느 정도 이신가요?
결혼 후 혹시 자녀 계획은 몇 명 정도 생각하시나요?

국내 결혼정보업체의 한 책임님께서 소개팅 성공 비법을 알려주시며, 연봉과 부모님 직업에 관해 묻는 것은 최악의 질문이라고 말씀하신 기사를 보았다. 그날 면접에서 받은 질문들이 최악의 맞선 질문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맞선에서는 적어도 이런 질문을 물을 땐 예의상 “실례하지만”을 덧붙인다.



그렇게 면접 대신 맞선을 보고 난 후 며칠이 지나도 애프터 신청을 받지 못했다.  상대가 맘에 안 들었지만, 상대가 보낸 불합격 통지는 더더욱 언짢았다.


시간이 좀 지나고 본격적으로 경단 맘 탈출을 시도할 때도 여전히 맞선 질문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육아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맞선남들은 이제 경력 단절과 차오르는 나이에 대해 걱정해 주셨다.


어, 좀 오래 쉬셨네요. 다시 적응하시기 괜찮으시겠어요?
곧 마흔이시네요, 나이가 있으신 편인데, 혹시 상사가 더 어린 경우 근무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어린 상사나 팀원들과 문제가 생길 경우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요?


경력 단절과 나이에 대한 우려, 그리고 여전히 둘째계획 질문은 빠지지 않는 단골 질문이었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모두가 단번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육아는 경력 단절이 아니라, 자기 계발을 위한 최고 레벨 스펙 라는 것을 말이다.  육아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쟁이 아기를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 올곧게 키워내는 매우 고되지만 숭고한 경력이다.  이 과정 가운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엄마의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를 끝없이 확인하는 자아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육아를 한다는 것은, 웬만큼 예민한 상사나 동료쯤은 가뿐히 상대할 수 있는 능력자로 거듭나는 것이자, 30살 이상 나이차 나는 어린 동료와도 완벽한 팀워크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의 커리어는 단절되었으나, 나는 분명 어느 때보다 가장 성장해있었다.  출산 전 쌓은 경력에다 5년  육아 경력이라는 최고 스펙이 더해진 가장 매력적이고 준비된 취준맘이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나뿐이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수없는 거절로 오기가 바짝 올랐을 때에는 취업 사이트에 내 경력과 관련된 키워드를 모조리 알림 설정해 두고,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는 곳이면 이력서와 자소서를 이리저리 바꾸어 무조건 서류 지원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여러 곳에 지원하는데, 한 군데는 얻어걸리겠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면접 기회가 오긴 했지만, 여전히 애프터 신청은 받지 못했다. 친절한 맞선남들은 출산 전까지의 경력은 아주 맘에 들지만, 현재는 나이가 많고 경력 단절 시간이 좀 길어서 아쉽다는 피드백을 남기곤 했다.




백통 가까운 이력서를 지원해 본 후 이제 아무 곳이나 지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경력 단절, 나이, 그리고 가족계획에 대한 관심 대신, 역량과 전문성에 더 관심 가져줄 회사에만 지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곧 알았다.  그런 회사를 구분하여 찾아내는 것은 마치 광화문에서 피아노 치는 돼지를 찾아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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