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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눕 Jan 21. 2023

집으로 출근하는 엄마의 호사


집으로 출근하던 시절, 이전에 누려보지 못한 한 가지 호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온 감각을 총 동원하여 느껴본 ‘자연(自然)’ 의 신비로움이었다.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경외함이 내 눈과 마음에 비로소 들어오게 된 시기는 바로 집에서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 동안이었다. 서른이 넘은 엄마도, 태어난 지 몇 해 되지 않은 아이도, 자연과 사계절을 오롯이 처음 경험하는 시간이었다.


늘 앞만 보고 달려가던 경주마 같은 삶 가운데, 주변을 둘러볼 여유 따윈 없었다.  ‘꽃이 피면 봄이 온 것이고, 더워지면 여름이 왔나 보다’ 내가 느꼈던 계절은 이렇게 아침밥 먹으면 점심때가 오듯, 경이로울 것도 없는 그저 당연하게 지나가는 세월에 불가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느끼는 사계절은 달랐다.  목표를 향해 전진만 하던 내 삶에 마치 슬로우 모션이 걸린 듯 주변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겨울 내 앙상한 가지로 추위를 버티다 봄이 채 이르기도 전, 새 순을 하나 둘 틔어낸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아이에게 설명해 주려고 돋아난 새순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생각해 보니 처음이었다.  어른이 된 이후, 나무에 돋아난 새순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일이.


겉은 앙상한 나무인데, 군데군데 파릇한 새순이 나오려고 꼼틀대는 모습이 이토록 귀여울 일인가.  옆에 있던 아이보다 더 해맑게 웃으며 신기하다는 듯 시선을 뗄 수 없다.  김훈 작가가 <자전거 여행>에서 묘사한 자연을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계절마다 냄새와 공기가 다르다던 말 정말 사실이었다.  봄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무언가로 가득 찬 밀도 있는 공기가 느껴진다.  마치 기온과 습도가 완벽하게 섞인 비율인 듯하다.  거기다 가끔 은은한 봄 꽃향기도 더해진다.


벚꽃이 흩날리는 계절이면, 떨어지는 꽃을 잡기 위해 빙글빙글 돌며, 연신 박수를 쳐본다.  어쩌다 예쁜 꽃이 손안에 들어왔을 땐 아이도 나도 그 꽃의 생김새가 너무도 아기자기하여 두 손 곱게 모은 채 꽃을 탐색한다.  얇은 꽃잎을 조심스레 만져볼 때면, 적당히 촉촉한 벨벳 느낌의 부드러운 촉감도 느껴진다.


작은 꽃 하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형상으로 각기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 게 그저 신기했다.  많은 꽃들이 가지에 풍성히 매달려 하나의 완벽한 벚꽃나무를 이룰 때에도, 바람에 흩날려 떨어진 작은 꽃에 지나지 않을 때에도, 모두 눈부시게 빛났다.


흩날리는 벚꽃속에서 봄의 향기를 느꼈던거야




활짝 핀 꽃들이 지고, 새로운 계절이 오는 것도 경이로웠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때에 맞춰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는 자연의 섭리가 새삼 그렇게 오묘할 수가 없었다.  


정수리에 관통하는 뜨거운 여름 햇살을 한 차례 보낸 후에는, 흔치 않은 이름의 맥문동과 옥잠화도 만난다.  일 년을 손꼽아 기다렸다 여름이 지나가기 직전,  딱 한 철에만 피는 아이들이다.  일 년 동안 이 날을 위해 잘 버티고 나타나준 녀석들이 그리 또 대견할 수가 없다.  


아이와 나는 매년 여름이 되면, 싱그럽게 피어오를 녀석들을 기다린다.  맥문동과 옥잠화가 피었던 자리를 지나칠 때면, 보이지도 않는 땅 속 어딘가에 있을 그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옥잠화 꽃이 완전히 질 때쯤이면, 이제 가을의 문턱에 완연히 접어들었음을 달력을 보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옥잠화야. 맥문동아 너희는 참 근사한 이름을 가졌구나




형형색색의 단풍이 드는 가을이 되면, 아이와 단풍잎을 주으러 다녔다.  5갈래 또는 7갈래의 단풍 모양이, 마치 쫙 핀 손바닥 같다는 재밌는 사실을 발견한 우리는 주워온 단풍잎 중 가장 예쁜 단풍잎을 서로에게 선물해 주었다.  


단풍 빛깔이 이토록 다양하고 아름다웠던가.  찬란하기 그지없는 빛깔에 홀려 자꾸만 단풍나무를 올려다본다.  봄과 여름을 버텨 이토록 황홀한 빛깔을 내보이기까지, 그 수고로움이 괜스레 짠하게 느껴진다. (모성애 탓인지, 나이 탓인지 뭐든 애쓰고 수고로운 과정이 자꾸만 눈에 밟혀 그저 모든 게 짠하다.)   




코 끝 시린 차가운 겨울, 시원한 공기를 먼저 코로 한가득 들이마시며 겨울을 느낀다.  겨울을 좋아하진 않지만 코안으로 불어오는 시큰한 공기와 하얀 입김의 조화가 한 번씩 그리울 때가 있다.  모락모락 김 나는 붕어빵이 세상 제일 맛있게 느껴질 때이다.  


눈 쌓인 공원은 그럴싸한 분위기를 품어낸다.  단 하나의 발자국도 없는 뽀얀 눈 위를 걸어갈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신 웃어 대던 우리였다.  하지만 겨울의 공원은 대부분 거칠고 황량하다.  온기도 습기도 없이 바짝 말라버린 생기 없는 나무들이 그득하다.  몇 해 지났을 때였을까?  그 적막한 엄동의 시절을 견디며, 봄을 위해 바삐 움직이는 생명체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무렵, 그곳의 겨울이 그제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아이와 산책하며 공원의 사계절을 여러 해 동안 보고 느껴보았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그 공원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공기와 냄새, 소리, 주변 풍경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다.  전업주부로 집에 있는 동안, 내게 허락된 작은 호사였지만, 아이와 나에게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이 멋진 걸, 이렇게나
어른이 된 후에 알았는데
넌 훨씬 먼저 알게 되어
다행이야.

온몸으로 느낀 사계절과
자연의 경이로움이
너의 삶 속에 오래도록 기억되길.
이번 주말에는 꼭 산책하러 가자.

두 계절의 공원


Photo by 하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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