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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눕 Nov 29. 2022

저도 그 길을 걸어봤어요.

기분 좋은 보슬비가 내리던 10월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동료들과 점심 식사 후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가 한 손에는 우산을 또 한 손으론 아기를 토닥이며, 내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아기가 비에 젖을세라 우산을 아기 쪽으로 바짝 기울이고, 아기 엄마는 비에 젖은 손바닥 만한 낙엽이 다리에 붙은 줄도 모르고, 터벅터벅 세상 의욕 없는 걸음으로 앞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지난날의 내 모습과 너무 

닮아있었을까?  그 아기 엄마를 보자마자 예전의 내가 문득 떠올랐다.




아이가 2-3살쯤 되었을 때였나 보다.  집에만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로 나와서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모처럼 만의 외출이라 화장은 나름 곱게 했으나, 얼굴은 여전히 푸석했다. 아이와 함께 외출하는 나의 옷차림은 늘 청바지에 단화, 기저귀 가방, 그리고 아기띠였다.  


아이가 아닌 어른과 함께 먹는 점심, 그것도 집밥이 아닌, 남이 해주는 밥이라니, 별거 아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을 만나러 갔다지하 주차장에서 지상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껏 들뜬 마음으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띵동,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마자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버렸다.  

 눈앞에 보인 사람들은 모두 세련되고 정갈하게 차려입은 직장인들이었다.  하나같이 모두 빛나는 

사원증을 걸고 있었다.


"아니, 애엄마가 여긴 웬일이야?” 마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이곳에 오기라도  ,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향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강하고 강했는지, 그 짧은 찰나 나는 잡고 있던 아이의 손을 순간적으로 놓아버릴 뻔했다.  아니 정말이지 그 손을 놓고 싶었다.  엘리베이터 문 하나를 사이에 둔 그 공간에는 1) 직장인 2) 애엄마 그리고 3) 내 손을 잡은 아이, 이렇게 세 부류의 인간들만 존재하는 듯했다. 마치 외딴 나라에 온 이방인 같았던 나는, 아이의 손을 놓고 그냥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내가 오늘 무슨 짓을 한 건가? 어떤 엄마가 내 소중한 아이의 손을 그렇게 놓고 싶어 한단 말인가. 나는 모성애보다 자기애가 더 강한 사람인가? 나는 정말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의 엄마일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잠든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밤새 울었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날 내 옆에선 아이는 내 손을 어느 때보다 강하게 꽉 붙들고 있었다.




아기띠와 한 몸이었던 그 시절의 나는 사원증을 목에 건 직장 여성들이 참 부러웠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그들의 삶,  누구 엄마가 아닌 내 이름 석자로 온전히 살아가는 일상, 겨울나무같이 온몸이 바짝 말라버린 

나와는 다르게 그들에겐 생기가 돌았다.   


다시 그들처럼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아이가 7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 나는 다시 직장인이 되기 위해 

첫 번째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최소 돌까지는 내가 키워야지’라는 생각에 사실, 전투적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진 않았다.  처음  몇 번의 불합격은 내가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그리고 매우 진지하게 취업활동에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원하는 회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을 무렵, 그땐 정말 극도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분명히 엄마로서 아이와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이와 남편이 잠든 밤이 되면 홀로  꺼진 거실에 나와  많이 울었다.  육아하는 나의 현재는 행복했지만, 내 미래는 너무 어두웠다.  아이와 함께 있는 그 공간은 밝은 빛이 보였지만 한 발치 바로 앞은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긴 터널 같았다.




반복되는 서류 1차 탈락 또는 면접 탈락을 수없이 경험하며 그렇게 한 동안 나의 경단 맘 탈출기는 계속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사원증을 목에 걸게 되었다.  심지어 이전보다 더 좋은 

직장의 사원증이다.


보슬비가 내리던 10월의 어느 날, 나는 내 앞의 아이 엄마를 앞질러 가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그 뒤를 

계속 따랐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응원했다.


괜찮아요. 아직 끝이 아니에요.  지금 당신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진 않지만 아이는 당신에게 오롯이 속해 있고, 사원증 대신 당신 품을 지키고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좋지만, 앞으로는 훨씬 더 좋을 거예요.  제가 그 길을 먼저 걸어봤거든요.  그러니 그때까지 지치지 말고 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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