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나보다 더 대단한 워킹맘이었다.
“엄마 내일 학교 오실 거죠?”
“어? 학교는 왜?”
“내일 공개 수업 이잖아요.”
이건 무슨 소리인가. 급하게 알림장을 확인해 보니, 열흘 전쯤 공개수업 공지가 와 있었다. 평소 알림장을 함께 확인하던 남편도 웬일인지 공개수업 공지를 전혀 보지 못했다 하였고 우리는 그렇게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급하게 반차를 내어 학교에 방문하였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교실을 나서려는 순간 아이가 와서 안기며 인사를 해줬다. 기특한 마음에 아이를 꽉 안은 채 볼을 좌우로 비비며 눈을 떴을 때, 아이 옆에 서있는 같은반 친구가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를 바라보던 그 친구의 시선에 잠시 멈칫하였으나 이내 멋쩍은 티를 감추며, 친구의 이름을 묻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린 시절 내 눈빛과 너무 닮아 있었던 그 친구를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모님이 아무도 오시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껏 살면서 가장 좋았던 추억으로 손꼽는 기억 중 하나는, 바로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예쁜 보라색 원피스 차림으로 아빠와 함께 교문에서 나를 몰래 기다리고 계셨던 날이다. 그 이후,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단 한 번도 딸의 학교에 찾아오시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학기 초가 되면 어김없이 담임 선생님들께서는 XX 엄마가 자모위원 (현, 운영위원)을 해 주시면 좋겠다고 집에 가서 엄마에게 전해달라고 하셨다. 저녁에 집에 가서엄마에게 말씀드리면, 늘 그렇듯 엄마는 “미안해서 어쩌니? 엄마가 바빠서”라는 말대신, “생선장사하는 엄마가 앞치마 매고 장화 신고 학교 가도 괜찮아? 엄마 안 창피하겠어?”라며 나를 놀려대셨다. 장난인 걸 알면서도 엄마의 그런 반응과 대답은 매번 싫었다. 결국 담임 선생님은 엄마에게 전화를 거셔서 부탁하셨지만, 엄마는 바쁘시다는 핑계로 단 한 번도 자모위원을 해주시지 않았다.
그 당시 학급 임원이 되면 반 친구들에게 빵이나 음료 같은 간식을 부모님들이 오셔서 직접 나눠주셨다. 엄마는 학교에 갈 수 없으니 그런 거 제발 맡아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지만, 결국 엄마 대신 막내 이모 또는 빵집 사장님이 우리 반으로 간식을 들고 오셨다.
환경 미화를 앞두고는 교실에 화분도 하나씩 가져오라고 하셨었는데, 다른 친구 엄마들은 핑크색, 다홍색의 화려한 철쭉 화분을 교실로 직접 들고 오시는 반면, 우리 엄마는 꽃이 채 다 피지 않은 주황색 군자란을 어느 꽃집 아저씨를 통해 보내주셨다. 그 당시 어린 소녀는 화려한 꽃들 사이에 낀 군자란이 다소 촌스러워 보여 매번 입을 삐죽거렸다.
복도에 누구네 엄마가 왔다고 친구들이 웅성거리면 괜히 우리 엄마가 아닌 걸 알면서도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한 번은 친구가 너희 엄마가 오셨다길래 반신반의하며 달려가보았지만 나랑 꽤 닮은 다른 친구 엄마이셨다는 웃픈 에피소드도 있었다. 엄마가 학교에 오는 친구들이 그저 부러웠던 소녀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부터 가게에 나가시던 엄마는 굳이 임원을 맡아오는 욕심쟁이 철부지 딸을 위해 애쓰셨다. 운동회나 소풍 때가 되면 담임 선생님의 5단 도시락을 정성껏 만들어서 보내셨고 그 도시락은 주변 선생님들의 이목까지 끌었다.
고등학교 시절, 교내 급식이 생기기 전에는 점심과 저녁 두 끼를 도시락으로 싸가야 했는데 두 끼 반찬을 미쳐 준비할 수 없었던 어느 날은 도시락 통에서 머리 달린 구운 조기 한 마리가 통째로 나와 몹시 민망하였던 적도 몇 번 있었다. 다른 친구들의 정갈해 보이는 도시락은 급히 반찬을 채운 내 것과는 참 달랐다. 하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도시락 싸는 것을 거르신 적이 없었다.
엄마는 학교에 단 한 번도 오시지 못했지만, 엄마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정말 최선을 다하셨다는 것을 워킹맘이 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손에 뭍은 역한 생선 비린내는 여러 번 비누칠해도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는 것을 결혼 후 살림해 보며 알게 되었다. 그런 비린내를 평생 맡으시며, 그 긴 세월 동안 엄마라는 이름 아래 겪었을 고생과 희생을 떠올려보니, 차마 어설픈 내 마음으로는 다 헤아려지지가 않았다.
"엄마. 난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두 아이를 키우며 새벽같이 어떻게 일을 하러 나가셨는지. 그 새벽에 도시락을 어떻게 두 개씩 싸서 보내셨는지! 엄마의 삶이 얼마나 분주하고 고됐을까? 서운한 게 하나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늘 그 자리에서 엄마의 방법대로 최선을 다해주셔서 진심으로 고마웠어요."
군자란 사진: 국립수목원 국가생물종 지식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