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눕 Feb 22. 2023

외국계 기업에서 종종 하는 자기소개란?


이틀간의 트레이닝을 위해 본사에서 외국인 직원들이 왔다.  


"각자 이름과 담당 업무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가장 마지막으로는 본인에 대한 fun fact에 대해 한 가지씩 소개해 주세요."


또 시작되었다.  

요즘 저게 유행하는 ice breaker인 모양이다.  지난번 새로운 임원이 왔을 때도 비슷한 걸 시키더니, 또 하란다.  그냥 이름과 담당 업무만 간단하게 소개하고 싶다.


'망했다. 이번엔 뭘 말하지?'

다들 준비 없이도 fun fact를 거침없이 공유한다.  남의 나라 말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즉석에서 각자 위트 있는 자기소개를 쏟아내는 걸 보니 뭐라도 하나 특별한 걸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해 온다.


“저는 석사가 두 개예요.”

모두들 이게 왜 fun fact 인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그녀는 이내 업무와 관계없는 조금은 생뚱맞은 한 가지 석사 학위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고 약간의 셀프 디스를 추가하여, 석사 학위 2개 소지 사실을 fun fact로 승화시켰다.


고등학교를 해외에서 나온 동료는 말했다.

"엄청  포대 자루에 사탕이 잔뜩 들어있었는데, 그게 대략 몇 개 인지 가장 근접하게 추측하는 게임을 했었어요. 근데 제가 가장 근접하게 맞춰서 그 포대자루를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로 낑낑대며 가져와서 사탕을 복도에 뿌린 적이 있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 임팩트 있는 fun fact라고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저는 며칠 전 환승연애에 나온 현규/해은 커플을 옆 테이블에서 봤어요."

내가 젊은이라고 칭하는 직원 역시 고민 끝에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풀어놓았다.  환승연애 과몰입 시청자였던 나는 순간 몹시 솔깃했지만, 곧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어쩌지? 뭘 말하지?’

아침부터 밤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그저 분주하고 정신없는 발 동동 40대 워킹맘은 근사하게 공유할 fun fact가 하나도 없다는 서글픈 생각도 잠시, 그저 머릿속에 뭐라도 하나 떠오르는 게 있으면 잽싸게 붙잡으려 노력했다.


‘브런치 작가 데뷔를 말할까? 아냐 안돼.  그럼 뭘 말하지? 에라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뭐라도 말해야 한다.'


"저는 구름을 너무 좋아해서 출근할 때마다 꼭 하늘의 구름을 살펴봐요.  그리고 구름을 항상 만져보고 싶어 했는데,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꿈속에서 구름을 직접 손으로 만져본 적도 있었어요."


이상한 게 튀어나왔다.  맘에 들진 않았지만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게 fun 인지는 모르겠지만 fact 이긴 하다.  아이와 어릴 적 함께 역할놀이나 소꿉놀이를 할 때도 “엄마는 지금 뭐 해?”라고 물으면, “엄마는 구름 위에 누워 있어.”라고 자주 말할 정도로, 구름을 만지면 어떤 느낌일지 늘 궁금했고, 몽글몽글 그 귀여운 녀석을 온몸으로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하루종일 누워서 하늘의 구름만 보라 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나는 하늘 + 구름 러버가 맞다.


그렇게나 원하던 것을 꿈속에서 이루었던 건 정말이지 큰 행운이었다. 구름을 만져본 촉감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꿈속에서 만져본 구름은, 뭐랄까? 마치 빈 틈 하나 허락되지 않은 빽빽한 오리털 베갯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을 때 느껴지는 부드러움 같은 것이었다.  얼만큼 부드러웠는지 수치화는 어렵지만, 대략 내 기준으로 집에 있는 오리털 베개보다 약 200배 정도는 더 부드러웠고, 굉장히 밀도 높은 무언가가 내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감싸는 매우 포근한 느낌이었다.  
막상 멋진 구름을 사진첩에서 찾아 쓰려니 또 안보인다.


그날의 fun fact 소개는 어찌어찌 잘 넘어갔다.   그 이후, 옆 팀에 새로 온 외국인 직원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나를 보며 구름으로 대화 거리를 이어간 걸 보니, 이 자기소개가 효과가 있긴 있었나 보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으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발표는 여전히 한 번씩 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다.  내 차례가 지나간 후엔 어김없이 '바보 같은 말을 한건 아닌지. 영어로 틀리게 말한 건 없었나.' 하며 내 대답을 연신 곱씹어 본다.


이곳에 입사한 지 5년 차,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게 늘 편했던 나는 자기 어필이 자연스럽고 필수인 이 회사의 분위기가 여전히 어색하다.  


내가 누구이고 뭘 좋아하는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무엇인지 등등 업무 외에도 한 번씩 나라는 사람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꽤 있었다.  그때마다 짧은 시간 안에 센스 있는 답변을 찾아내는 동료들이 마냥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던 반면 스스로를 이토록 알지 못해 머리를 쥐어짜 내야만 하는 나 자신도 참 신기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자기소개를 시키려나?

결코 수줍지 않은 나이에 한 번씩 붉어지는 얼굴을 동안은 마스크로 잘 가렸는데 이젠 어쩌나.  청심환처럼 얼굴 빨개질 때마다 먹는 약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Photo by 하눕













이전 08화 엄마는 한 번도 학교에 오시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