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눕 Feb 16. 2023

올 한 해 운을 모두 소진하였다

아이는 올해 3학년이 되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아이가 다니는 돌봄센터는 아침 7시 50분부터 저녁 8시까지 운영하는 곳으로 맞벌이인 우리 부부는 주변 도움 없이 돌봄센터와 학원 스케줄을 잘 조정하여 큰 무리 없이 아이를 키워내고 있다.


학교 방과 후 수업 이후 돌봄센터에 가서 간식을 먹는다.  그 후 센터 프로그램 한 가지를 마치면 돌봄 선생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학원 차량 탑승까지 책임져 주신다.  5시까지 센터에 있는 날은 석식도 제공되어 아이는 식사를 마치고 도보 3분 거리의 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배운다.  재작년 사립초 지원에 탈락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는 몰랐다. 방과 후 수업이 무엇이고 돌봄센터는 뭘 하는 곳인지.)


새 학기를 앞두고 돌봄 센터를 다시 신청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저학년 우선순위이지만, 학교안팎에 몇 개의 센터가 있기 때문에 크게 무리 없이 올해도 돌봄센터를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1학년 신입생들이 많이 들어온 관계로, 3학년 신청자들은 어쩔 수 없이 추첨을 하게 되었다.


3학년에게 할당된 자리는 단 4자리, 12명의 맞벌이 가정 학부모들이 공 뽑기를 하려고 모두 모였다.  센터장님은 학부모들 앞에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공 네 개를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1번부터 8번까지 차례대로 번호를 적어 8개의 공을 상자 안에 넣으셨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는 공을 뽑아야 당첨인 것이고 나머지 공에 적힌 번호는 대기 번호를 뜻 하는 것이었다.


"어떡해.  너무 떨려요."


내 뒤에 앉은 학부모 한분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제 몸집모다 훨씬 작은 아이용 의자에 웅크려 앉은 12명의 학부모들은 모두 긴장한 듯 보였다.  


두근두근. 당일 센터에 입실한 순서대로 드디어 공 뽑기가 시작되었다.


"와.. 예스!!"  

첫 번째로 공을 집었던 아빠 한분이 당첨되셨다.  


"어.... 한 자리 없어졌어"

당첨된 아빠의 환호와 나머지 학부모들의 아쉬운 탄성이 뒤섞였다.  


두 번째 순서도 아빠 분이 나오셔서 공을 잡으셨고 또 당첨이 되셨다.  


"공 뽑기가 이렇게 쉬운 거였나?  우리 집도 나 대신 남편이 왔어야 했나?"


나머지 엄마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세 번째 학부모는 대기 8번을 뽑으셨다.  드디어 내 차례, 손에 잡히는 공을 한차례 밀어내고, 그 옆 공을 잡아 들어 올렸다.  주황색 탁구공엔 "1" 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고 그렇게 아이는 대기 1번이 되었다.


옆에 대기 8번을 뽑은 엄마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둘째까지 있는 상황인데, 육아 휴직도 이미 다 쓴 상태고, 첫째도 돌봄이 되지 않았으니 심각하게 본인의 퇴사를 고민하신다고 했다.  대기 1번인 나는 좋은 내색도 아쉬운 내색도 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오는 길은 생각보다 담담했으나 머릿속은 이미 갖가지 질문으로 뒤죽박죽이었다.


'이제 좀 컸으니, 아침에는 집에 혼자 있다가 등교하는 걸로 하고, 하교 후 학원차량 탑승 전까지는 교내 도서관에서 있으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학원을 하나 더 보내야 하나? 수영 가는 날에는 돌봄에서 석식까지 해결되어서 참 좋았는데. 아차! 학기 중에는 그렇다 치고, 방학 중에 아이 점심은 누가 차려주나?'


일단 올해 여름 방학 전까지, 제발 자리가 나길!

시어머님과의 갑작스러운 동거로 인해 몸과 마음이 정신없었던 덕에 한 동안 잊고 지냈다.  



그 후 2주 정도 지났을 무렵, 근무 중 돌봄센터에서 전화를 받았다.  보통 학교나 돌봄센터에서 연락이 오면, 아이에게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닌 지 지레 겁을 먹는다.  그날도 발신자 표시를 확인 하자마자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머님, 좋은 소식이 있어 빨리 알려드리려고 전화드렸어요."


바로 직감했다.  내게 행운이 온 것을.  

이런 일은 흔치 않은데 2학년 중 한 아이가 이사를 가게 되어 갑자기 한자리가 생겼다고 하셨다.


옆에 누가 듣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저 연신 정말이냐며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처음 알았다.  정말 기쁠 때면,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는 걸. (그 웃음소리가 마치 영구 없다에 나오는 영구가 배시시 웃는 거처럼,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소리긴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선생님, 어떡해요. 너무 좋아서 웃음이 멈춰지지가 않아요."  


딱꾹질을 내 의지대로 멈출 수 없는 것처럼, 그 순간 내 웃음도 내 마음대로 멈춰지지가 않았다.  그날은 너무 기쁜 나머지 남편에게 뽀뽀 100번 하기 미션마저도 가능할 것 같았다.


평소 당첨운이 그리 좋지 않았던 내게 이번 추가 당첨은 더욱이나 특별했다.   설사 올해의 운을 지금 다 소진했더라도,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2023년이다.


Photo by 하눕







이전 10화 워킹맘의 취미생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