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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눕 Aug 19. 2023

외국인 상사의 이벤트 (2)

400개의 화분을 선물하는 남자


지난 3월 세계 여성의 날에 여자 직원들에게 화분을 선물한 외국인 산타가 도대체 어떤 사람일지 계속 궁금했다.  (관련글 링크: https://brunch.co.kr/@8planets425/25 ​)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한 번씩 그 상사가 계속 생각났고, 여유가 생기면 꼭 한번 점심을 대접하고 싶었다.  아니 고마운 마음을 핑계 삼아, 도대체 어떤 분인지 꼭 알아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이메일을 보내던지, 직접 찾아가던지 점심 식사 제안을 해야지라고 다짐하고 미루기를 몇 달, 어느 날, 우연히 복도에서 그를 마주쳤다. 평소 I 성향의 내가 어쩐 일인지, 다음번에 점심 식사를 하자고 용감하게 제안해 버렸다.  사무실에 와서 잊기 전에 이메일로 가능 한 날짜를 묻고 바로 calendar invite까지 보내어 그의 수락을 받아냈다.  



함께 식사하기로 한 날,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사무실 한쪽 벽면에는 아이들 사진이 가득했다.  갓난쟁이 아이들부터 돌잔치 사진들, 그리고 그의 자녀들 사진까지, 수십 명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아이는 어느 직원의 아이이고, 이 사진은 그 아이가 몇 살 때고.. 등등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원하면, 내 아이의 사진도 이 키즈존에 붙여준다며 언제든 사진을 달라는 그는, 처음 보는 유형의 상사가 맞는 듯했다.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는 그는, 직원들이 부득이하게 아이를 맡길 곳이 없을 때면 본인 사무실로 데려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했다.  


회사를 나오며, 근처에 좋아하는 식당이 있는지 물으니, 그는 평소에는 주로 도시락을 싸 오고 점심시간에는 되도록 사무실 근처 식당에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물으니, 함께 일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점심시간만큼은 상사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식사를 즐기기 바라는 본인의 작은 배려라고 했다.  ‘이렇게 까지나 배려한다고?’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지만, 역시 뭔가 달라도 다른 그에 대해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한편으론 몹시 기대가 되고 설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화분 산타가 된 이유부터 캐물었다. 같은 층에 있는 여자 직원들 몇십 명에게 선물한 줄 알았었는데, 제대로 물어보니, 총 400개의 화분을 자비로 구매하여 여자 직원들 전체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가 산타 3년 차라고 하니, 그는 지금까지 1200개의 화분을 선물한 스케일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화분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처음엔 다들 “뭐야?”라는 눈빛으로 본인을 바라본다고 한다. 심지어 무례한 어떤 사람은 “Are you supposed to be here?” 이라며, 당신 여기 왜 있냐고 재수 없게 묻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바쁜 업무로 모두가 날이 선 공간에서 “Happy Women’s Day”라고 외치며 이벤트를 시작하게 되는 순간, 무표정과 찡그린 표정의 사람들이 모두 환하게 웃는 표정들로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느꼈던 희열로 인해, 매년 산타가 되기로 결심 한 그는 본인이 한국을 떠난 이후에도 누군가가 전통처럼 이런 이벤트를 지속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마도 없을 것 같지만요.)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정말 어른다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인생이 참 어려운 내게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다.  정말 멋진 어른으로 나이 들고 싶은 나는, 언젠가부터 국적과 성별을 막론하고 인생의 선배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면, 물어보는 공식 질문이 있다.  다시 40대로 돌아가면 뭘 하고 싶은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말이다.  이렇게나 특별하고 멋진 어른인 그에게도 공식질문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니, 내 안에 끊임없이 존재하는 선과 악의 감정들로 인해 참 힘들었었다.  악의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고 자책하는 시간이 많았다.  신이 아닌 이상, 두 가지 감정은 필연적으로 공존하기 마련인데, 그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절에는 스스로를 옥죄며 악의 감정을 느끼는 나 자체를 부인하려 했다.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관대하였다면 더 편안한 시간을 보냈을 거 같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매번 스스로에게만 유독 엄격하게 채찍질하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보였다.  삶에 대해 고민하며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지혜로운 일이니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지 말라고 그는 덧붙였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낯가림이 있어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는 게 성격상 어렵고, 특히 외국인 상사 앞에서는 더 불편할 법도 한데, 희한하게 이 산타 앞에서는 점심 먹는 내내 온전한 내 모습 그대로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나이차를 뛰어넘어 2주에 한 번씩 만나 점심을 먹는 친구 사이가 되었고 어쩌다 오가며 만나면 누구보다 반갑게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이제 겨우 두 번의 점심식사 밖에 하지 못했지만, 함께 있을 땐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 마냥 수다스러워지는 내 모습에 흠칫 놀라곤 한다.  아직 그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묻고 싶은 것도 많다. 그리고 그를 통해 더 많은 삶의 지혜도 배우고 싶다.     


Photo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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