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마스크 착용이 의무였던 불과 몇 개월 전쯤 일이다. 외국인 상사는 본인의 방송 출연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업무 하는 장면이 촬영될 예정이니, 방송 촬영 동의 여부를 개별적으로 알려달라고 했다. 당시 마스크를 모두 착용하던 상태로, 방송에 나가지 못할 이유가 크게 없었기에, 출연 가능 의사를 밝혔다.
그러길 몇 개월 후, 마스크를 더 이상 착용하지 않던 어느 날, 그는 본인의 방송 출연이 확정되었음을 알렸다. 아예 출연을 원치 않는 직원들은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하는 분위기였고, 나는 개별 인터뷰를 제외한 나머지 출연을 허용했다. 주변 의식을 많이 하는 성격으로 sns도 안 하는 내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촬영 시까지 시간적 여유가 조금 있었던 탓에 그 당시에는 크게 고민하지 않으려 했고(아니, 사실 너무 바빠서 고민할 에너지도 시간도 없었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그다지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 아니기에, 잠깐 스치듯 나오는 것은 크게 문제가 없을 것으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여러 팀원들이 촬영을 거부한 이유도 사실 한 몫했다.
열정적인 상사 덕분에 늘 일이 많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고 잘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든 인정해 주고 감사해할 줄 아는 상사이다. 그리고 얼마 전 회사에서 부주의로 셀프 발가락 찍기를 시연하여 발톱이 빠지는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회사에서 다치게 된 경우에는, 직원의 잘못은 1도 없다라고 말해주며 그 문이 평소 위험했다는 것을 해당 부서에 보고 하여 해결책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한, 가끔은 든든하고 고맙기도 한 사람이다. 그런 상사이기에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의 촬영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화면에 안 잡히면 가장 좋겠지만, 어쩌다 배경으로 한번씩 나오게 되면, 최소한 이상하게는 나오고 싶지 않은 희한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어쩜, 우아하고 프로페셔널한 커리어우먼으로 비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방송을 앞두고, 생전 가지도 않던 피부과 라도 다녀와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최근 수년 만에 한국에 들어온 친구가 한국은 피부과가 그렇게 좋다고 들었는데, 너는 왜 얼굴이 바뀐 게 없냐며, 관리도 안 하고 뭐 했냐고 핀잔을 주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모습 이대로의 초췌한 워킹맘의 모습은 도무지 방송 출연 불가이므로 피부과와 미용실 예약 및 방송 출연 전에 준비해야 될 사항들을 찬찬히 To do list에 적어두고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 정신없는 삶을 살아냈다. (참고로 배경으로만 나오겠다고 출연을 허락한 사람 맞습니다.)
몇 달 전 ‘To do list’에 꼼꼼히 적어둔 리스트가 무색할 정도로, 별다른 외적 업그레이드 없이 방송 출연일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고작 미용실에서 염색과 커트 예약한 게 전부였으니 이쯤 되면 방송 울렁증도 다 사라진 건지, 방송이라고 새로 뭘 준비하는 것도 촌스럽지. 있는 그대로가 자연스러운 법이지, 그 동안 계속 정신없었잖아...라며 모든 것을 워킹맘의 분주함으로 합리화시켜버리는 내 모습을 보니, 나이가 들면서 자기애와 뻔뻔함도 나날이 함께 늘어가는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상사와 3일간의 촬영을 마쳤고, 내일 드디어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있다. 실제 업무 중에 촬영한 것으로, 일하는 중간에는 카메라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구부정한 자세는 아니었는지, 틀리게 말한 건 없는지부터, 촬영과 업무를 병행한 날은 온갖 찜찜함으로 인해 퇴근 후에도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개인 인터뷰는 안 하고 싶었으나, 촬영 중간중간 피디님이 물어보시는 질문에 답변도 하고, 그때마다 카메라도 어김없이 내 얼굴 앞에 들이밀어졌다. 어떻게 하다가 여기서 근무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질문에, 본인의 태생 스토리부터 시작하여 이곳에 오게 된 동기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직원의 모습에 질세라, 나도 모르게 세상 구구절절한 답변을 말하고서는 후회가 잔뜩 밀려오는 밤이다.
내일 피디님께 편집해 달라고 요청해야 할까? 어차피 내가 말하지 않아도 편집되지 않을까?
휴. 피곤하다 피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