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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눕 Feb 22. 2023

외국계 기업에서 종종 하는 자기소개란?


이틀간의 트레이닝을 위해 본사에서 외국인 직원들이 왔다.  


"각자 이름과 담당 업무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가장 마지막으로는 본인에 대한 fun fact에 대해 한 가지씩 소개해 주세요."


또 시작되었다.  

요즘 저게 유행하는 ice breaker인 모양이다.  지난번 새로운 임원이 왔을 때도 비슷한 걸 시키더니, 또 하란다.  그냥 이름과 담당 업무만 간단하게 소개하고 싶다.


'망했다. 이번엔 뭘 말하지?'

다들 준비 없이도 fun fact를 거침없이 공유한다.  남의 나라 말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저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즉석에서 각자 위트 있는 자기소개를 쏟아내는 걸 보니 뭐라도 하나 특별한 걸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해 온다.


“저는 석사가 두 개예요.”

모두들 이게 왜 fun fact 인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그녀는 이내 업무와 관계없는 조금은 생뚱맞은 한 가지 석사 학위에 관한 설명을 덧붙였고 약간의 셀프 디스를 추가하여, 석사 학위 2개 소지 사실을 fun fact로 승화시켰다.


고등학교를 해외에서 나온 동료는 말했다.

"엄청  포대 자루에 사탕이 잔뜩 들어있었는데, 그게 대략 몇 개 인지 가장 근접하게 추측하는 게임을 했었어요. 근데 제가 가장 근접하게 맞춰서 그 포대자루를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로 낑낑대며 가져와서 사탕을 복도에 뿌린 적이 있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 임팩트 있는 fun fact라고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저는 며칠 전 환승연애에 나온 현규/해은 커플을 옆 테이블에서 봤어요."

내가 젊은이라고 칭하는 직원 역시 고민 끝에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풀어놓았다.  환승연애 과몰입 시청자였던 나는 순간 몹시 솔깃했지만, 곧 내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어쩌지? 뭘 말하지?’

아침부터 밤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그저 분주하고 정신없는 발 동동 40대 워킹맘은 근사하게 공유할 fun fact가 하나도 없다는 서글픈 생각도 잠시, 그저 머릿속에 뭐라도 하나 떠오르는 게 있으면 잽싸게 붙잡으려 노력했다.


‘브런치 작가 데뷔를 말할까? 아냐 안돼.  그럼 뭘 말하지? 에라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뭐라도 말해야 한다.'


"저는 구름을 너무 좋아해서 출근할 때마다 꼭 하늘의 구름을 살펴봐요.  그리고 구름을 항상 만져보고 싶어 했는데,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꿈속에서 구름을 직접 손으로 만져본 적도 있었어요."


이상한 게 튀어나왔다.  맘에 들진 않았지만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게 fun 인지는 모르겠지만 fact 이긴 하다.  아이와 어릴 적 함께 역할놀이나 소꿉놀이를 할 때도 “엄마는 지금 뭐 해?”라고 물으면, “엄마는 구름 위에 누워 있어.”라고 자주 말할 정도로, 구름을 만지면 어떤 느낌일지 늘 궁금했고, 몽글몽글 그 귀여운 녀석을 온몸으로 경험해 보고 싶었다.  하루종일 누워서 하늘의 구름만 보라 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나는 하늘 + 구름 러버가 맞다.


그렇게나 원하던 것을 꿈속에서 이루었던 건 정말이지 큰 행운이었다. 구름을 만져본 촉감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꿈속에서 만져본 구름은, 뭐랄까? 마치 빈 틈 하나 허락되지 않은 빽빽한 오리털 베갯속에 손을 쑥 집어넣었을 때 느껴지는 부드러움 같은 것이었다.  얼만큼 부드러웠는지 수치화는 어렵지만, 대략 내 기준으로 집에 있는 오리털 베개보다 약 200배 정도는 더 부드러웠고, 굉장히 밀도 높은 무언가가 내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감싸는 매우 포근한 느낌이었다.  
막상 멋진 구름을 사진첩에서 찾아 쓰려니 또 안보인다.


그날의 fun fact 소개는 어찌어찌 잘 넘어갔다.   그 이후, 옆 팀에 새로 온 외국인 직원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나를 보며 구름으로 대화 거리를 이어간 걸 보니, 이 자기소개가 효과가 있긴 있었나 보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으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발표는 여전히 한 번씩 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다.  내 차례가 지나간 후엔 어김없이 '바보 같은 말을 한건 아닌지. 영어로 틀리게 말한 건 없었나.' 하며 내 대답을 연신 곱씹어 본다.


이곳에 입사한 지 5년 차,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게 늘 편했던 나는 자기 어필이 자연스럽고 필수인 이 회사의 분위기가 여전히 어색하다.  


내가 누구이고 뭘 좋아하는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무엇인지 등등 업무 외에도 한 번씩 나라는 사람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꽤 있었다.  그때마다 짧은 시간 안에 센스 있는 답변을 찾아내는 동료들이 마냥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던 반면 스스로를 이토록 알지 못해 머리를 쥐어짜 내야만 하는 나 자신도 참 신기했다.

 

다음에는 또 어떤 자기소개를 시키려나?

결코 수줍지 않은 나이에 한 번씩 붉어지는 얼굴을 동안은 마스크로 잘 가렸는데 이젠 어쩌나.  청심환처럼 얼굴 빨개질 때마다 먹는 약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Photo by 하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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